설교문2014. 1. 25. 05:38

어떤 작은 도시에 마틴 아브데이치라는 구두 수선공이 살았습니다. 그는 지하에 작은 방을 하나 갖고 있었고, 그 방에 길을 향해 난 작은 창 하나가 있었습니다. 창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았고 신발로도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성실했고 일감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틴은 언제나 착한 사람이었지만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구둣방을 차리기 전 아직 고용주 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틴의 아내는 세 살배기 아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아들도 몇 년 못살고 고열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습니다. 마틴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부터 교회당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아는 순례자 노인이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틴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마틴은 노인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슬픈 일을 털어 놨습니다. “저는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청하는 건 빨리 죽게 해 달라는 것뿐예요. 이제 저는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없으니까요. “ 노인은 대답합니다. “자네에게는 그런 말할 권리가 없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판단할 수 없어. 만일 하나님께서 자네의 아들이 죽고 자네가 살기를 원하신다면, 그게 최선임이 틀림없네. 자네의 절망은 자네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럼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마틴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자넨 그 분을 위해 살아야해. 그분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웠을 때 자넨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게 편하게 보일거야.” 마틴이 잠시 침묵한 뒤에 물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신을 위해 살 수 있지요?” 노인이 대답합니다. “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가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셨지. 복음서를 읽어 보게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알게 될걸세. 그 안에 모든게 나와 있어

 

그날 저녁부터 마틴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휴일에만 읽을 생각이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마음이 매우 가벼워져서 매일 읽게 되엇습니다. 그 때부터 마틴의 모든 삶이 변했습니다. 마틴의 삶은 평화롭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는 틈만나면 성경을 읽었고 읽을수록 더욱 잘 이해되고 행복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하루는 잠 자기전 누가복음 7장의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던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집에 오신 손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지. 손님이 누구였지? 바로 그리스도였어! 만일 내게 오신다면 나도 그렇게 하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마틴하고 큰 소리가 났습니다.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내가 내일 갈 것이니 거리를 내다 보거라

 

다음날 마틴은 기도문을 외우고 불을 피운 뒤 양배추 스푸와 메밀 죽을 준비했습니다. 따뜻한 차도 주전자에 담아 난로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마틴은 창가에 앉아 일하는 것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한 노인이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마틴은 노인을 흘긋 보고 나서 일에 몰두 했습니다. 노인이 삽을 세워 놓고 손을 호호 불며 잠시 쉬려고 하였습니다. 마틴은 그를 불러 차를 따라주었고 몸을 녹이게 해 주었습니다. 노인은 마틴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눈치를 챘고 누구를 기다리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네 부끄럽지만 내 주님 그분을 기다리고 있답니다.”하고 그 노인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습니다. 노인은 가고 마틴은 계속 창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초라한 행색으로 아기를 팔에 안고 가던 여자가 지나쳤지만 이내 멈춰섰습니다. 여자는 벽에 기대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를 감싸려고 했지만 아기를 감쌀 수 있는 변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기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마틴은 그녀를 집안으로 불려들였습니다. 마틴은 아침에 준비해 둔 빵과 스푸를 준비했습니다. “앉아서 먹어요 아기는 내가 돌볼 테니 나도 아이를 키워봤기 때문에 아기 다루는 법을 알지요. 그런데 따뜻한 천이나 옷이 없나요?” 여인은 군대에 간 남편이 소식도 없고 일을 구해 보지만 너무 야위어서 써주지 않고 마지막 남은 숄까지 전당잡힌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마틴은 자신의 낡은 외투를 가져와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받아요 닳고 해지긴 했어도 아기를 감싸는 데 적당할거예요.” 마틴은 저당잡힌 숄을 찾을 수 있도록 돈까지 쥐어주어 보내고 계속 창밖을 보았습니다.

 

한 사과장수 노파가 사과를 거의 팔았는지 사과가 몇 개 남은 바구니를 들고 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허름한 모자를 쓴 소년이 사과를 냅다 들고 지나치려 하다 노파에게 잡혔습니다. 노파는 아이를 경찰로 데려가겠다고 소리쳤고 아이는 자기가 훔치지 않았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던 일을 놓고 마틴은 그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마틴은 노파를 타이기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테니까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 중에 생각이 모자라는 아이들을 용서하세요.” 노파는 마틴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지만 결국 마틴의 설득으로 일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해는 졌고 등불을 켤 때가 되었습니다. 마틴은 등불을 켜고 성경 책을 펼쳤을 때 어제의 꿈이 떠올랐고, 꿈에 대해 생각하자 마자 마치 누군가 뒤에서 걷고 있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귓가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 마틴 마틴, 나를 모르느냐? “ “누구십니까?” “나였느니라라는 소리와 함께 눈을 쓸던 노인이 미소를 짓고 다가와 사라졌고 또 나였느니라하는 소리와 함께 아기를 팔에 안은 여자가 웃으며 다가 오더니 사라졌습니다. 다시 한 번 나였느니라하는 소리와 함게 노파와 사과를 든 소년이 걸어 나와 미소를 짓더니 또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틴의 영혼은 기쁨으로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바로 그 펼쳐진 부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위쪽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대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리고 그 면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제 마틴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었고, 구주께서 정말로 그날 자신에게 오셨으며 자신이 그분을 기쁘게 맞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의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게 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내게 오십니다^^

40절 말씀을 읽고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4. 1. 14. 06:41

http://youtu.be/g637sMpmxFQ

-본문 : 느헤미야 8장 1-12절

-제목 : 깨달아 밝히 아는 기쁨

1. 허기가 축복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 저녁부터 아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몸살기도 있고 소화도 안되고 그렇다고 토하지도 못하고 너무 괴로워 하더군요.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다고 그러길래… “임신한거 아니야?” 라는 말을 던졌는데 끝을 흐리며 주섬주섬 주어 담았습니다. 제가 올해 한 농담 중에 가장 위험한 농담이었습니다^^ 다음 날까지 아내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계속 괴로워 했습니다. 뭘 먹으라 해도 입맛이 없다고 하더군요. 저와 애들이 아무리 잘먹더라도 아내는 진수성찬을 차려 놔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저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허기진 상태가 얼마나 축복인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를 느낀다는 것이 건강한 것이구나.’ 였습니다. 

요즘 염산교회 아침 큐티집의 본문이 마태복음인데요. 마태복음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5장에서 7장의 산상수훈에 여덟 가지 복이 나오잖습니까? 그 여덟 가지 복 중에 첫째 복과 네 번째 복이 바로 이 비워진 상태인 허기와 배고픔에 관한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육신은 많이 채워진 것이 복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내면은 비워진 상태, 허기진 상태가 복입니다. 그 허기를 의로움으로 채우려하는 사람은 행복하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죠. 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배고파 하고 갈급해 하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영의 건강 상태를 이 영의 허기짐으로 판단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씀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면 벌써 내 영이 병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그 안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내 영이 대체되어 채워져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량식품으로 채워 놓고 밥이 안먹힌다고 하는 거나 같은 격이죠. 

2002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I am still hungry” 아무리 많은 승리를 취했더라도 여전히 나는 승리를 향한 갈망이 있다는 뜻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은 어떠십니까? 허기가 느껴집니까? 목마름이 있습니까? 여전히 배가 고프십니까?

2.포로귀환자들의 허기

본문도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진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로시기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 봅니다.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 시드기야와 백성의 일부가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포로 생활을 시작하죠. 포로 생활을 한 지 70년 이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이었던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합니다. 첫번째 귀환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 스룹바벨과 선지자 학개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무너졌던 성전이 다시 세워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디어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이 완공 된 후 60년 후에 바사왕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포로들의 두 번째 귀환이 이뤄집니다. 이 두 번째 포로들이 귀환할 때, 에스라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에스라 7장에 자세히 나오지요. 

에스라 7장 6절에서 에스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순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은 모세의 율법에 도통한 학자요 제자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에스라의 귀환이 얼마 있지 않고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자원하여 아닥사스다 왕의 어명을 받고 유다에 온 사람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완성된 성전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방해꾼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하는데 성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벽을 완성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더 간단히 정리해 보면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습니다. 예배고 뭐고 당장 오늘 끼니를 떼울 것이 걱정이었고 밤이슬을 피해 가족들이 잠자야할 집을 짓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학개 같은 선지자들은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우선이여야’ 라고 깨우치며 성전 건축을 독려했습니다. 이제 성전건축이 되고 예배는 드리고 있는데 주위에 오랑케들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소위 안전과 안보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지요. 이제 안전하게 좀 살아보자 하고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만도 하고, 예배도 드릴 수 있고, 안전도 보장이 됐는데 뭔가 허전한 겁니다. 이것이 완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7월 초 하루에 초막절을 맞이하여 일제히 수문 앞에 있는 광장에 모여든 겁니다. 우리로 치면 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것이지요. 이 백성들이 일제히 모여 에스라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기서 주목 해야 할 것이 에스라가 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들려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뭘 말하고 있냐면요. 이들의 삶에 허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먹고 살만도 하고 종교인으로서 주일이면 꼬박 꼬박 예배도 드리지만 여전히 뭔가 허전하고 갈증이 느껴졌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제사장이요 학사였던 에스라를 찾은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특별하게 만들어 준 높은 강단에 올라가 율법을 낭독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의 양 옆으로 레위인들이 늘어 섭니다. 11명이 좌우로 섰다고 나오지요. 에스라는 새벽부터 정오까지 꽤 긴 시간 내내 율법을 낭독합니다. 율법 낭독이 끝나자 에스라 좌우로 서 있던 레위 인들이 이제 그 말씀을 해석해주고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목적은 백성들로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3. 염산교회 소금길 학당의 의미

저는 이 말씀에서 우리 교회의 소금길 학당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보릿고개를 잊은 지 오랩니다.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합니다. 국가적으로 안보가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울타리가 되어주는 안정된 국가가 있습니다. 또한 맘 놓고 자유롭게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종교생활이 이만큼 보장된 나라도 찾기 힘듭니다. 특히 교회 예배당을 찾기란 편의점 찾는 것보다 식은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서로가 드러내 표현은 안했지만 여전히 내 내면은 뭔가 허전하며 나의 신앙생활은 뭔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주일 예배 한 번만으로 그러니까 수동적인 예배생활의 참석으로는 나의 신앙의 갈증을 해갈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말씀을 찾아 나서야 하고 우리 스스로 말씀의 두루마리를 들고 그것을 해석해 주고 깨닫게 해줄 랍비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그 사명을 에스라와 레위인들에게 감당하게 합니다. 우리를 좀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들이 에스라에게 상징적으로 만들어 준 것이 4절에 나오는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든 나무 강단이란 뜻입니다. 백성들이 서서도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위치하게 한 나무 강단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바로 우리 염산교회 안에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진 나무강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 강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될 뿐만 아니라 해석되어지고 여러분들은 말씀이 말하는 바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강단은 깨달음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말씀공급의 젖줄이었던 것입니다. 

4. 깨달음의 복

깨달음만한 복이 있나 생각이 듭니다. 8-9절을 보면 이 레위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합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두 가지일 겁니다. 첫째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감격일 것이고, 둘째는 그 말씀이 백성들의 폐부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방망이가 자신들의 내면을 두들기자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와 직면하게 되고 그 죄 때문에 어찌할꼬 어찌할꼬 울게 된 것입니다. 
우는 백성들에게 다시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인들이 말씀을 통해 권면합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깨달음을 통해 참 자유를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인생의 참 행복을 맛보았고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무거운 죄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깨달음을 통해 그 죄를 해결하는 복음을 듣고 자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통해 밝히 아는 것이 큰 복입니다. 옆에 분에게 고백합시다. “깨달음이 복입니다.”

소금길 학당은 다름 아닌 깨달음과 깨우침을 주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배 이외의 보충수업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더 깊은 말씀의 바다에 빠져 들어 보십시오. 스스로는 깨우칠 수 없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시는 은혜를 누려 보십시오. 사람은 깨달음이 없이 변화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깨달음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사 50:4)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마 13:23)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때입니다.

깨달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저는 작년 한 해 이런 기도를 늘 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날 마다 한 가지 이상씩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저에게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깨달음을 입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이곳 저곳에 ‘아하’ 하는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깨달을 때 내는 감탄사가 바로 ‘아하’아니겠습니까? 아하 이 말씀이 이런 뜻이었어요? 소금길 학당을 통해 여기서도 ‘아하’ 저기서도 ‘아하’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유명한 슈바이쳐 선교사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한 명을 자신의 고국 독일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독일에 갔을 때는 한 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바깥에 나갔던 흑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집안으로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입에서 입김이 나온 건데 연기로 알고 불이 난 걸로 잘 못 알았다는 거죠. 겨울이 없으니 입에서 연기나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 원주민은 그제서야 추우면 입에서 입김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놀라운 자유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고등부 학생을 둔 여집사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딸이 잠이 너무나 많아서 교회 예배에 항상 지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 하얀밤 때 연극팀의 팀장을 맡아서 아이들을 이끌면서 지각하는 습관이 고쳐졌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팀장으로 아이들을 이끌다보니 미리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늦게 나오는 친구들 때문에 많이 속썩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이끄시는 분들이 얼마나 수고한지도 깨닫고 늦으면 안되겠구나 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달음이 임한 후 이 아이는 교회에 지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쭉 말입니다.

저는 작년에 한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소금길 학당이 열리던 해의 첫 번째 학기에 저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리와 역사”를 공부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이 분은 모태 신앙이셨고 어머니도 염산교회에서 내로라하면 서러울 정도로 열심이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소금길 학당의 강의를 듣고 갖게 된 소감을 문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집사님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공개합니다. 
“지난 해, 이스라엘 역사와 지리 수업으로 촉발된 말씀에 대한 기갈을 맛보았고, 성경 통독 시간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는 경이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기쁨으로 수금을 켤 수 있게 되었고, 영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던 토굴에서 나와 빛이신 주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 개를 가르쳐 주면 여덟 개를 까먹는 갱년기 아줌마이지만 ‘달콤한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딱딱한 텍스트가 아닌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로 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목사님 전도사님들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집사님의 문자 내용은 한 마디로 소금길 학당에서 시작된 깨달음이 말씀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는 겁니다. 그 깨달음에서 촉발된 말씀에 대한 임팩트가 50년 넘게 나태하게 길들어져 왔던 자신의 신앙을 깨웠다는 것이지요. 그런 후 이제 매번 열리는 성경강좌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진정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인 줄 믿습니다.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말씀을 깨달아 밝히 알아 참 자유의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방금 특송을 하셨던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이번 해에도 최선을 다해서 양질의 강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김종익 에스라 목사님 좌우에 선 11명의 레위인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분들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 만으로, 그리고 예배 잘 드리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제작된 말씀의 강단에 동참하여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성장이 촉발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서서 말씀을 찾아 나서십시오. 소금길 학당은 여러분들의 삶을 변화시킬 충분한 말씀의 장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기독교신앙과 그리스 철학, 구약 성경통독, 기독교 에니어그램, 성서지리, 엄마방 스윗 리딩이 일제히 개강을 합니다. 신청서를 작성 못하신 분도 오실 수 있고, 동네 아줌마 친구들 모시고 와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을 권면합니다. 올 한 해 말씀을 향한 갈급함 하나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일어나면 말씀으로 달려가시고, 모든 일을 할 때 말씀이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할 때도 말씀으로 하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샤워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립니다. 그럴 때 “샤워중이예요”라는 말 대신에 창세기 3장 11절을 말하는 것이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 말씀의 영향력이 침투하고 말씀으로 한 해가 풍성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올 한해 우리 염산교회가 말씀으로 충만해 지는 해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지 배웠습니다. 올 한해 깨달음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하옵소서. 염산교회에 깨달음의 장으로 소금길 학당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금길 학당을 통해 참 개달음과 참 자유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3. 11. 10. 06:50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우리 인생은 B D사이의 C의 연속이다. B는 태어나다는 뜻의 birth이구요 D는 죽는다는 뜻의 death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C choose입니다. 선택하다는 뜻이지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아침도 교회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이곳에 오신 것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람의 선택이 나옵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과 자손과 이름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 약속이 실현되어 갑니다. 아브라함은 새로 이사온 땅에서 재산도 많아지게 되고 유명해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문제는 함께 가나안땅으로 이주해 온 조카 롯과의 갈등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목민들에게 재산은 가축이었습니다. 가축들이 많아지자 양과 소들을 기를 땅(목초지)이 부족했습니다.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여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롯과 아브람의  종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아브람은 뭔가 결정을 해야했고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너무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돈이 많아지면 다툼도 많아지고 더 죄짓기 쉽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을 선택합니다. 더 부자가 되는 쪽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선택의 기준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갈등과 다툼을 피하는 쪽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의 선택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롯은 더 편안하고 부한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명이 발달된 도시쪽을 선택했고, 기름져 보이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롯은 잘못된 선택을 하여 가정이 파탄이 나 버리게 됩니다. 롯은 돈이, 재물이, 부가 자신에게 구원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했고 더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점점 불행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달랐어요. 아브람은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어요. 그에게 재물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는 평화를 위해 더 안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더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롯과 아브람 중에 어떤 사람의 선택을 기뻐하셨나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롯의 삼촌이었고 연장자였습니다. 관례상 그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삼촌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롯을 대합니다. 먼저 좋은 것을 선택해라.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더 편한 삶, 더 가지려하는 삶을 선택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내가 손해 보는 선택을 하면 어떨까요? 거창고라는 고등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에 십계명이 있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죠.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 자리로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롯의 선택인가요? 아브람의 선택인가요?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3. 9. 15. 22:35

이주 노동자 주일 오후 예배 설교문

룻기 4장 13-17절

제목 : 사람이 왔습니다. 


1.

오늘 주일 5부 예배는 이주노동자 선교예배로 특별히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 하면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새까만 피부가 연상되실 수도 있고, 명동 같은 곳을 몰려다니는 제 3세계 사람들을 떠올릴 수도 있구요. 3D 업종이 떠오르실 수도 있겠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어렵고, 지저분한 일들을 대신 해 줄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그 3D 업종을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대신에 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꺼리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도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오히려 그런 고마운 그들을 꺼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주 노동자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렸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자연스레 좋지 않은 것들을 연상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주노동자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을 떠올리셨던 분은 없으신가요? 이삭을 떠올리신 분은 없나요? 야곱과 요셉 그리고 모세 또한 예수님의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을 생각해 보시진 않았나요? 바울은 어떤가요? 제가 방금 언급한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이주 노동자들이었고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핵심 인물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떠나는 경험을 했고, 타지에서 노동을 하며 밥벌이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이주 노동자들 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이주해서 살아가신 이주 노동자가 아닐까요? 


2.

성경의 인물들을 이주 노동자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흥미롭지 않겠습니까? 더 크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집단적인 이주 노동을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들의 원래 근거지인 가나안 땅의 이역만리 이집트에서 집단 노동을 했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의 DNA 에는 이주노동자라는 DNA 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그들에게 율법 조항으로 너희는 이주 노동자였으니 이주 노동자들을 잘 대해 주라고 못을 박아 버리십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3장 9절은 비슷한 말씀인데 한 가지를 더 추가 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 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나그네 되어 봤으니 나그네의 사정을 잘 알지 않느냐는 거죠.

레위기 19장 33-34절입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당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굼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가 타향살이 해 봤잖아. 거류민 즉 이주민으로 학대를 당해 봤고 많은 설움을 당했었잖아. 그러니 너희 땅에 사는 거류민들과 나그네들에게도 잘 해줘야 하지 않겠니? 라고 하나님은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명령하고 계십니다.


경험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은 역사에 근거하여 호소한다는 것이죠. 이주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타향살이 설움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 무슨 어려운 말 같지만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이죠. 역사를 잊을 때 역사 또한 너희들을 기억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주 노동의 설움은 없었나요? 먼 과거로 갈 필요도 없이 100년 정도의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자그마치 500만명의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이주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갔던 지역도 다양했습니다. 만주 또는 간도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았죠. 많은 조선의 사람들이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특별히 러시아로 떠났던 이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했죠. 그들은 러시아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강제 이주를 또 한 번 겪으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까지 강제 이주 당하며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카작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후손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었죠. 간증하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현대사에서의 이주 노동은 없나요? 1963년 우리나라는 독일로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노임을 담보로 외화벌이를 위해 반 평생을 나그네로 그 땅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탄광과 하인리히 탄광 등에 흩어져서 석탄을 캐 냈던 광부들은 노임을 담보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는 중동의 산업현장으로 떠난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우리 남편, 삼촌,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낸지 5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 자매들의 그 아픔의 역사를 잊은 듯 합니다. 또 다른 이방인들이 이 땅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50년 전의 우리들처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나라를 살려보고자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생명과 임금을 담보로 너무나 힘들고 차별된 삶을 그들에게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007년에 40여년 만에 고국을 찾은 재독 광부 간호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 정부에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제안했다고 하죠. 그들이 독일에서 받았던 이주 노동자로서의 대우를 생각할 때 한국 정부의 이주 정책이 많이 아쉬워 보였나 봅니다. 이제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http://youtu.be/7AarJrDjrPk


 “독일이 필요로 해 이곳에 온 우리는 ‘필요 없다’고 버리는 상품이 아니다” 라는 문구가 가슴팍을 찌르지 않습니까?  이러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독일시민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1만여명의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했고 결국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 제정을 만들게 되기까지 했습니다. 독일 소설가가 말했다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노동력을 원했지만, 노동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왔다.” 노동력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더라는 거죠. 상품인줄만 알았는데 사람이더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을 귀찮게 하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독일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무기한 노동 체류를 허가하는 특별법까지 만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독일 민족의 호의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민족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4.

오늘 우리는 룻기의 마지막 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룻기는 잘 아시듯이 유대사람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에서 온 며느리 룻의 이야기 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염리동의 한 한국 사람 시어머니와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의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 주인공들 또한 이주노동자들의 설움을 몸소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를 했었습니다. 이주해간 타향에서 아들 둘을 그 민족 여자랑 결혼을 시켰습니다. 국제결혼까지 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오미입니다. 불행하게 남편과 아들 둘은 이역만리 모압땅에서 요절하게 되지요. 맞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나 그들의 민족으로 돌아가지만 둘째 며느리 룻은 그 시모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비친 룻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신명기 23장 3절에 나와 있듯이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총회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혐오하는 민족이 모압민족입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몇 년 만에 돌아와 데리고 온 며느리가 모압 여인이라고 합니다. 룻을 바라보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서리 내릴 정도였을 겁니다. 모두가 개 쳐다보듯 룻을 바라봤을 것이 뻔합니다. 룻이 그 차가운 시선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시모 나오미를 향한 인애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인애와 사랑으로 시모를 섬겼습니다. 외국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들 법도 한데 보아스의 침상에까지 찾아가 시모와 그의 가문을 구해달라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룻은 차가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그 마음에 가득한 시어머니를 향한 인애를 실천하지요.

그에 상응하는 보아스의 인애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침실에 찾아와 누워 있는 룻을 향해 건내는 보아스의 말입니다. “이것은 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인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애로구나” 보아스는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의 파산한 가문을 세워 주기 위한 한 여인의 간절한 노력을 보았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그 자리에서 범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룻기 3장의 보아스의 타작마당의 침실 장면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격적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룻을 사랑했지만, 딸과 같은 룻의 젊은 나이 때문에 절제하고 있습니다. 당황스러울 룻을 위로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인애이죠. 보아스는 룻을 노동력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가득한 사람으로 대하며, 인애가 넘치는 이방여인 룻을 자신 또한 인애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애는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친족을 위해 밭을 사주고 기업을 무르는 일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인애의 행위였습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는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친족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죠.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베들레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야하는 문제기이도 했습니다. 보아스는 책임감과 희생을 통해 그의 인애를 룻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 또한 이들의 아름다운 인애의 행위에 대해 인애로 답하십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평범하지 않은 인애의 가정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애는 사람으로 보답이 됩니다. 그 가문을 이을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을 아이였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며느리 한 명 잘 들어왔을 뿐인데, 가문이 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다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룻을 단순한 이방여인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권리와 아내될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대했더니 사람 노릇을 하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넝쿨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보아스의 인애는 룻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보았고 따뜻함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애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은 바로 룻과 보아스와 같은 인애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인애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땅에 찾아온 또 다른 이방인들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 할까요? 그들은 단순한 노동력인가요? 아니면 그들은 우리가 못하는 힘들고 고된 일들을 해주는 지저분하고 가난한 제 3세계 민족일 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이 가득 담긴 사람이며 우리의 믿음을 이을 형제 자매들인가요? 


2013년 현재 국내 등록 외국인은 약 140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그 중 비율로 봤을 때 중국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베트남  3위로 필리핀 사람들이 그 다음 인도네시아 미국 태국 순이라 합니다. 등록 외국인들이니 등록하지 않는 외국인들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이주민들이 우리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배타적인 마음과 차가운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더 이상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함께 살아갈 새 식구들이 들어왔는데도 그들을 한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주 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들을 외국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을 우리 나라 사람, 우리 식구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룻이라는 한 사람이 들어옴으로 보아스의 가정이 큰 은혜를 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피부가 다른 우리의 다른 식구들이 이제 우리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나갈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우리가 겪었던 이주 노동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독일인들이 보여주었던 우리 노동자들을 향한 세심한 배려와 포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룻과 보아스가 보여주었던 그 따뜻한 인애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주 노동자들의 보아스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주 노동자들의 나오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개인이 역사를 잊을 때 역사도 스스로를 잊는다. 그러나 역사를 잊지 않는 개인들이 있을 때, 역사는 스스로를 잊지 않는다.”라고 아까 말씀 드렸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특별법을 재정하여 대한민국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따뜻한 인애를 가지고 앞장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6.

우리 교회의 국젝교회인 YIC를 찾아온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보십니까? 이들은 우리 교회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의 한 식구이고 우리의 믿음의 가문을 함께 이어갈 친지이며 가족인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큰 명절 절기에 레위인과 고아와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말씀합니다. 이번 주는 추석 주간입니다. 우리 이주 노동자들 나그네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기가 바로 명절 기간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배려 하나가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 국제 교회 YIC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주십시오. 


이분들의 필요를 몇 가지 알리겠습니다. 먼저 이 분들 중에 좋은 사장님을 만나 일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장을 꾸리고 계신 성도님들 YIC 가족들 중에 가능한 형제 자매님들을 채용하셔서 일을 시켜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많은 임금보다 따뜻한 사랑과 안전입니다. 우리 국제교회 식구들을 고용하시어 써보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또한 YIC 예배는 매주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 장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통역자들이 한 두 사람이 붙어서 통역을 하며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각 나라 커뮤니티별로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렇기에 설교통역과 소그룹을 함께 진행할 통역자들의 수요가 항상 있습니다. 영어 베트남어 중국어 캄보디아어 통역자들을 수시로 구하니 관심 가져 주십시오. 

예배 후에는 식사를 직접 해서 나눠먹는데, 김치와 반찬거리들이 늘 필요합니다. 묵은 김치 남아 도시는 분들은 조금씩 갖다 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비빔국수 할 때 묵은 김치가 필요하거든요.


외국인 나그네들이 대한민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염리동으로 급격히 몰려 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3. 7. 27. 22:40
저는 목사가 되고 장례에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장례식을 직접 진행하기도 합니다. 숨을 거두시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화장(cremation, 火葬)을 하든지 아니면 묻든지(埋葬, burial)합니다. 화장을 하고 나면 사람은 한 줌의 재로 변합니다. 매장을 하더라도 죽은 사람은 땅에 묻히게 되고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되죠. 장례식에 항상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여러분 우리 인생이 별것인 것처럼(특별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쓰인 히브리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땅이라고 쓰인 단어는 ‘아다마(אדם)’ 입니다. 사람이라고 쓰인 단어는 ‘아담(אדם)’입니다. 두 단어가 자음(子音,consonant)은 똑같습니다. 모음(母音, vowel)만 다릅니다. 아담(사람)은 아다마(땅)에서 나온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땅에 있는 먼지(尘土, dust)를 가지고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먼지라는 단어는 아파르(עפר)입니다. 사람 아담은 아다마에 있는 아파르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우리의 본질(本質 ,substance)은 먼지입니다. 먼지에 불과하던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생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먼지인 우리에게 들어오자 짠하고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생기이고, 사람의 본질은 먼지입니다. 먼지에 생기가 들어오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말에 ‘죽는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숨을 멈춘다. 숨을 거둔다”라는 말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지요. 호흡은 살아있는 존재의 특권입니다. 그 호흡은 바로 하나님의 생기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호흡을 거둬가시면 우리는 다시 먼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다마로 돌아가는 아파르가 되는 것입니다. 아파르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 ‘돌아가신다’입니다.

지금 제가 뭘 계속 얘기하고 있냐면요. 우리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지임이 깨달아지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면 우리는 다시 먼지가 되어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你本是尘土,仍要归于尘土,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여러분이 별 것(特別的 ,Something)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不是 特別的, nothing). 단지 먼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땅을 갈 사람도 없으므로” 하나님은 아담(사람)을 아다마(땅)을 갈게 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땅을 통해 생산되는 모든 혜택을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일하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땅을 통해 생산되는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일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는 땅을 갈 때, 즉 일할 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외국인 노동자로 온 여러분들의 일을 축복합니다. 그 일을 통해 보람을 찾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 생각해볼 꺼리

1. 땅, 사람, 먼지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무엇인가요?
아다마, 아담, 아파르

2. 이 히브리 말들을 통해 우리 인간의 본질과 만들어진 목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범답안>
- 본질 : 땅으로부터 나온 먼지에 불과하다.
- 목적 : 땅으로부터 나온 존재로서 땅을 갈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일은 신성한 것이며, 소중한 것이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3. 3. 15. 04:39

1.    자연은 돌아오는 때를 안다.

    어느 샌가 봄이 우리 가운데 성큼 다가왔습니다. 자연의 순환을 볼 때마다 놀랍지 않나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정말 춥고 과연 봄은 오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봄은 이미 우리 가운데 돌아왔습니다. 봄이 오면 이제 강남에 갔던 제비도 다시 돌아 오겠지요. 자연이 돌고 도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 모든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에게만은 그런 돌아갈 마음을 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런 회귀본능을 주셨는데도 인간이 교만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요? 본문 예레미야 8장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주제와 테마는 돌아옴입니다. 히브리 말로 슈브라는 말인데요. 돌이키고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5절을 보세요. 예루살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을 떠나있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7절에 보면 공중의 학, 산비둘기, 제비, 두루미는 그들이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미물보다 못하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게 쉽지 않죠. 한국의 청년이 제일 가고 싶어 하던 교회, 삼일교회에서 시무했던 전병욱 목사는 교회의 여성도들에게 수차례 성추행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죠. 그리고 교회에서 제시한 1년의 치리 기간을 무시한 체 가까운 홍대 옆에 새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현 주소인 것이지요. 자신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꼬집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과 똑같죠. 죄를 지었지만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 지 모릅니다. 죄를 지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인정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인정하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제 아내는 항상 잔소리를 해줍니다. 잔소리가 무척 싫죠. 짜증도 냅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는 말은요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라며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돌아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알아야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했던 탕자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인식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주님 내 모습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그리고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2.    치료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의 상태를 병들었다라고 진단하십니다. 11절에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백성의 상태가 상처가 가득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21절에도 보십시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

하나님은 백성들을 딸이라고 칭하십니다. 딸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딸은 아들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고 귀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겠죠. 반면에 딸은 연약하여 부모의 관심이 더 많이 가는 존재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도 한 때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연약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하나님은 딸이라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스런 딸이 상처가 가득하여 너무나 마음이 슬프다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딸의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고름과 진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 딸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처투성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아버지의 마음 또한 상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상한 백성들의 환부를 치료할 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문 22절은 그 치료약이 있는데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있고 치료하지 않으려고한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기르앗에 있는 향료로 그 병을 치료할 수 있고, 그곳에는 의사도 있어서 능히 이 병을 치료할 수 있건만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슬프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병든 마음, 죄악 된 마음을 치료할 치료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 치료약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의사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 몇 가지를 정리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첫째, 상한 마음의 치료는 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 나에게 이런 연약함이 있구나. 내가 이런 죄를 저질렀구나.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었구나. 깨닫는 순간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둘째, 깨달았다면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깨닫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은 치유와 회개의 완성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처럼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품으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셋째,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한 마음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썩어 문드러진 양심을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사이시며 치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만 이런 하나님의 치료의 혜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마음의 병과, 육신의 질병을 깨끗이 치유받고 돌아가십시오. 우리의 마음과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칠 향유와 의사가 있습니다.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돌아오십시오. 우리의 참된 치료자 하나님의 품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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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3. 3. 2. 04:42

      일시 : 2013.3. 2 새벽설교

      본문 : 이사여서 61장

      제목 : 치환의 은혜를 주시는 성령님


1.    3이사야서의 삶의 자리 설명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사야서 56장부터 66장까지 10장의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동체를 향하여 선포된 메시지입니다. 포로로 귀환되어 왔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절망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나 에스라서를 보면 포로귀환 공동체가 당하는 위협과 절망을 잘 알 수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남아있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포로로 끌려 가 있는 동안 에돔이나 암몬과 같은 이방 민족이 빼앗긴 땅에서 하이에나처럼 활개를 치고 다녔습니다. 하이에나가 지나간 곳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듯이 멸망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황폐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포로로 귀환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녹녹치 않았던 것이지요.

 

여전히 가난과 상한 마음과 억눌린 마음과 포로되었을 때 가졌던 부자유함이 그들을 짖누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느헤미야서와 에스라서에서 보듯이 그들은 다른 것에서 그들의 만족을 찾으려 했고 탈출구로 찾은 것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탈출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답답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환공동체를 향하여 메시지를 선포하고 계신 것이 이사야서 56장부터 이어지는 제3이사야서의 내용입니다.

 

2.    치환되는 은혜

오늘 본문에서 특이하게 발견되어지는 것은, 뭐 대신에 뭐, 뭐 대신에 뭐 이런 식으로 삶의 여건과 상황들을 바꿔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부요함이겠지요. 마음이 상한자들에게는 마음의 상처 치유를, 여전히 포로로 있는 자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십니다. 갇힌 자들에게는 놓임을, 슬픈 자들의 슬픔은 위로로 치환해 주십니다. 이 치환의 은혜, 바꿔주심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치환이라는 것은 바꾸어 놓는다는 의미잖습니까? 이 치환이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나에게 있는 슬픔을 가져가시고 기쁨을 주신다니 얼마나 은혜입니까? 나에게 있는 가난을 가져가시고 부요함으로 바꿔주신다. 나에게 있는 근심을 가져가시고 참 평강을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피를 생각할 때 이러한 치환을 묵상하게 됩니다. 피에는 철성분이 있습니다. 이 철 성분 때문에 산소가 붙을 수 있습니다. 피는 산소를 가지고 우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산소를 우리 몸의 세포에게 주고는 자신은 산소대신에 이산화탄소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이산화탄소를 폐로 가져가서 우리 몸밖으로 내 뱉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는 내 안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같이 발생한 죄의 찌꺼기들, 죄악의 결과물들을 정결함으로 치환해주고 그리스도의 생생한 생명력을 우리 영혼에게 공급해 주지 않습니까? 저주를 축복으로 치환해주고, 질병을 건강으로 치환해주는 능력이 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에 있습니다. 특별히 4순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치환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치환의 목적

그런데 여러분 이런 치환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 이후부터 그 목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4절과 6절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중수라는 것은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지요. 이미 망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을 치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로 다시 세우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6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네 여기까지요. 이 말씀은 출애굽기 19 4-5절을 연상케하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9장 말씀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킨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출애굽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적은 첫째,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어 이방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 제사장 나라가 되어 나를 예배하고 나아가 이방민족들과 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었지요. 그런데 이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을 보고 많은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나아오게 될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신 겁니다. 그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시키시겠다는 겁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인정받는 것처럼 큰 복이 어디있습니까? 치환을 경험한 자들에 의해 그들 민족의 원래의 부르심과 정체성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슬픔과 가난과 억눌림과 포로됨과 갇힘과 근심을 아름다운 것들로 바꾸어주어 결국에 너희를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받게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4.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본문은 제시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없이 이런 엄청난 치환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대전제가 있는 것이지요. 너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구나, 너희 집은 여호와께 복 받은 집이구나 라는 명성을 얻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십시오.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시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잖습니까? 내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잖습니까?

이 아침에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지십시오. 성령님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시고, 우리의 모든 좋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들로 치환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백성이라는 원래의 부르심이 회복되어지길 축복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님께 순종하시고, 성령님을 따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가난과 환란과 근심과 두려움과 모든 질병을 좋은 것들로 바꿔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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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3. 3. 2. 04:40

일시 : 2013. 3. 1 새벽설교

본문 : 이사야서 60장

제목 : 일어나라 빛을 비추어라


본문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듣고 있는 사람 또는 대상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는 건가요? 일어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지금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엎드러져 있겠죠. 빛을 비추라고 명령하고 너의 빛이 왔다라는 말을 보아서 이 명령을 듣는 대상은 쭉 어둠 가운데 있었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앉아 있든 엎드러져 있든 간에 어둠 가운데 머물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명령을 듣고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13~14절에 그 단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13절에는 내 거룩한 곳” “나의 발 둘 곳이라 하여 이 대상이 장소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죠? 14절 말씀은 구체적으로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라고하며 이 명령의 대상이 시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시온이라는 명칭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시온산이라는 명칭도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께서 발을 두시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의 상황이 참으로 참담한 상황이었으나 그 상황이 이제 역전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말씀이 이사야 60장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8세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인 이사야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제 1이사야서 라고 칭합니다. 40장부터 55장까지는 바벨론 포로기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예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예언자나 예언자 그룹에 의해 선포된 말씀으로 제 2 이사야서라고 합니다. 56장부터 66장까지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자신들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귀환공동체를 향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이사야서라고 합니다. 1 이사야서, 2 이사야서, 3 이사야서의 삶의 자리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 말씀에 대해 훨씬 깊이 있게 깨달을 수 있겠지요.

 

오늘 읽은 60장 말씀은 어둠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빛의 시대가 열릴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엎드러져 좌절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 체로 포로생활을 했었지만, 이제 그 억압의 시기 압제의 시기 좌절의 시기는 끝이 났다고 확신 있게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전반적으로 모든 상황이 역전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갔던 부귀와 재물과 온갖 보물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다 돌아오게 될 거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갔던 이스라엘의 아들 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 뿐입니까? 사방에서 이방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이방민족들은 회복된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몰려드는 것입니다.

 

어둔 밤에 불을 밝히면 나방들이 몰려 오듯이, 아름다운 꽃의 향기를 맡고 벌들과 나비들이 몰려들 듯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회복된 영광을 보고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라는 겁니다. 완전한 역전입니다. 이전의 어둡고 괴로웠던 모든 날은 잊혀지고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예루살렘이 그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그들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영광으로 비춰주시기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줍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그 영광이 회복될 것인데, 그 영광은 이스라엘의 공로로 얻게되는 영광이 아니라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와 은혜가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얻게 되는 영화와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진행되어가는 역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빛으로 임하시면 가능한 일이라는 거죠.

 

오늘은 3.1 94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94년 전 이 나라의 상황은 폐허된 예루살렘 성을 방불케 했습니다. 국권을 빼앗긴지 10년이 되어갔고, 민족의 얼과 기상은 짖밟혀져 가고 있는 참으로 어두운 상황이었죠. 1910 8월 일제의 한국 강점으로 강요된 포학한 무단식민통치로,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던 한민족은 이 3.1운동을 계기로 민족 독립과 민족사를 변혁시키는 데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잃어버린 민족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에서 일어나 일제를 향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진행해 갔습니다. 일어나 외쳤고, 부르짖었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였는데, 그들은 아마도 이사야 60장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내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94년이 지난 지금 이 민족의 상황은 어떤가요? 교회의 상황은 어떤가요? 70-80년대 급속도로 성장하며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아오던 교회는 이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세속화는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고,  세속화는 교회를 병들게 했고 나아가 이 사회를 병들게 했습니다. 참으로 어두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교회에서까지 돈과 안정된 직장은 하나님보다 높아져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피말리는 경쟁에서 밀린 낙오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절망속으로 내 던지고 있습니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젊은이들, 그들은 취업의 높은 장벽 앞에서 미래를 잃고 엎드려 있습니다. 과연 이 민족에 머물던 그 찬란했던 영광은 떠난 것일까요? 교회 가운데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은 유효한 것일까요?

 

이러한 어두운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이 본문을 선포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좌절하여서 쓰러져 있는 너의 그 자리에서 이제 일어나라~~ 더 이상 어둠 가운데서 헤매지 말고 이제 일어나라~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너에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 아침에 이 민족과 이 나라와 조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잃어 버린 우리의 영광을 되찾게 해주십사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떠나갔던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 머물게 하시고, 그 영광을 보고 절망가운데 있던 이방 민족들이 우리를 귀감으로 삼아 몰려들게 하시옵소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절망과 좌절가운데 쓰러진 분이 계시다면 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가운데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영광의 빛이 여러분 위에 임하였습니다. 일어나십시오~ 1-3절 말씀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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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12. 11. 13. 09:4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1. 캄캄한 밤길을 걸어 보셨나요?

빛이 없는 깜깜한 밤 길을 걸어 보셨습니까? 

저는 초딩 중딩 시절에 학교에 다녀오면 항상 밭으로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러 갔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하시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시골 길에는 전등도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늘 정말 깜깜한 밤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치는 사당이 있었어요. 

거기를 지나칠 때는 어린 마음에 정말 무서웠죠. 

뭔가가 막 튀어 나올 것 같은 두려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고성방가를 내며 빛의 속도로 뛰기 시작합니다. 


2. 보이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두렵지 않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 화장실에 가다 어두운 방을 걸어보기라도 했을 겁니다. 

어두우면 사람이 본능적으로 두려워 집니다. 

무엇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뭐에 부딪힐까 알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내 눈에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하지만 빛이 비춰지면 보이게 되고 무엇이 있는 지 알게 되죠. 

알게 되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즉 빛은 두려움을 제거하고 참 자유함 가운데로 우릴 인도하죠.


3. 초막절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님은 7장에 이어서 초막절이라는 행사 중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를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기본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되새기는 절기이죠. 

첫째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죠. 

둘째 모세가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영광가운데서 율법을 계시받은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계시 (revelation)을 기념하는 것이죠. 

하나님 시온산에서 영광가운데  어두운 인간의 세상을 비추실

율법을 주셨으며, 그 계시를 받고 모세는 내려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기념하기 위해 초막을 짓고 성전 뜰에 불을 켭니다.

불기둥과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성전의 뜰에 불을 켜서 비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이 켜져 있는 성전 뜰에서 지금 이 설교를 하고 계신 겁니다.


4. 나는 세상의 빛이다. (Ego sum Lux mundi)

예수님은 담대하게 선포하시죠.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는 너희를 불기둥으로 너희의 캄캄한 인생길을 인도할 수 있는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모세가 율법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나는 빛이 되어 너희로 보게 할 것며(계시) 

너희가 보게 될 때 그 때 너희는 영적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어둔 세상을 비춰주기 전에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빛되신 예수님 어둠을 비추실 때, 우리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결코 멸망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영광의 구름 기둥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것이지요.


빛되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모든 두려움 벗고, 참 자유를 맛보실 겁니다.

빛되신 주님은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결코 멸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다. 

비추소서~ 주님~ 내 어둔 영혼을 ...

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12. 11. 11. 18:51

  1. 1. YIC 그 생소한 이름

    제가 염산교회에 처음 왔을 때, YIC YIC 그러길래 저게 뭐지? 궁금했었습니다. 생소한 이름 YIC, 여러분의 표정도 보아하니 듣도 보도 못했다는 표정이군요^^ Yumsan International Church 의 약자라고 하네요. 염산 국제교회가 YIC더군요. 염산국제교회라는 이름으로 중국, 필리핀, 베트남, 네팔 등의 외국인들이 공동체를 이뤄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모여서 예배하는지는 좀있다 영상을 통해 나누도록 하구요. 오늘 말씀은 이 YIC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숙제를 던져주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한국에는 텃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텃세란 말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말합니다. 한국은 예부터 단일민족 국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좋게 작용하면 좋지만 다른 민족들 입장에서는 되게 배타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기 쉬웠습니다. 텃세가 심한 민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제 3세계 사람들의 한국에서의 차별과 그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제가 10년 전에 시골에서 서울 구경하러 올라와서 명동성당을 보고 싶어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동성당 앞에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과 폭력을 금해달라는 시위현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천막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운동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권적인 행위의 근절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인 이슈가 됐었고, 많은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코미디 프로에서도 폭력적인 한국 사장님들을 비꼬기 위한 캐릭터들도 등장했었죠.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기억 나십니까? 여러분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제가 재연을 해 드려 보겠습니다.


하루는 사장님 갑자기 막 때렸어요
왜 때리냐고 했더니 생일방이라며 계속 막 때렸어요
전 너무 아파서 그만하라고 했더니
사장님 작은 마음의 표시니 거절하지 말라며 계속 막 생일방을 줬어요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월급 올려달라 하면 생일방 줍니다
몸 아파서 일 못하겠다 하면 생일방 줍니다
저 1년에 생일 한번 있어요
왜 자꾸 사장님 매일 생일빵 줍니까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그 당시의 우리 사회를 비꼬는 풍자 코미디극 이였죠. 10 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외국인 그것도 제 3세계 외국엔들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변했을까요? 크게 변한 거 같지 않습니다. 지난 달에도 우리 YIC 형제 한 명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사장님이 자신이 1년 가까이 일한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불법 채류자이기 때문에 신고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거랍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저랑 신대원을 같이 다니던 윙풍남이라는 베트남에서 유학온 전도사가 한 명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기숙사 저의 옆 방에서 살았는데 정말 시끄러웠어요. 전화통을 계속 붙들고 통화하는 소리 때문이었죠. 맨날 전화로 베트남 말로 상담전화를 받는데, 한국 사장님들이 일 시켜 놓고 돈을 안주는 베트남 동료들의 전화라는 거였습니다. 그 친구도 늘 사장님 나빠요를 입에 달고 살았죠. 

한국 남편에게 국제 결혼 온 여자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남편과 시댁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느 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염리동도 도심 속의 다문화 동네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제 3세계 외국인들이 염리동으로 모여 들고 있는 것이죠. 이 외국인들이 아파트촌으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나마 시내 중심에 염리동 같은 동네가 있어서 이분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거죠. 어느 새 우리 가운데로 가까이 오게 된 이방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하고 있나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1. 2.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

여러분 텃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 가운데서도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문제였나 봅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억압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만 탈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 12장 38절에는 잡족과 동물들도 그들과 함께 탈출했다고 말합니다. 잡족이란 섞여있는 군중이란 뜻인데요 한 마디로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외국인들도 그들 사이에 섞여서 이집트를 탈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외국인을 상당히 억압했었나 봅니다. 적어도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다른 외국인들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할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아예 율법 조항으로 못박아 놓은 것이지요. 


우리 개역 성경에는 거류민이라고 나와 있는 데요,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이 거류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게르’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꼭 알아 두어야 할 단어 중 하나입니다. 게르는 히브리어로 나그네, 거류민, 이방인이란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게르였다라고 합니다. 나그네였다는 것이죠.


33절과 3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외국인들에 대해 3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 외국인들을 억압하지 말아라~ 노동착취를 하지 말고, 과도한 의무를 부여하여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자국민처럼여겨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대하라는 겁니다. 조금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조금 파격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외국인들, 특별히 신앙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그들을 외국인들로 여기지 말고 자국민, 원주민들로 여기고 대하라는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명령은요 한 술 더 뜨십니다. 그 외국인들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저는 이 사랑하라는 히브리 동사 아하브 동사가 쓰여진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하브라는 동사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성지 답사 갔다 오신 분들이 사해의 진흙으로 만든 아하바라는 비누를 사가지고 오셨던데 아하바라는 뜻이 바로 사랑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사용됐던 단어가 바로 아하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쓰인 사랑하다라는 뜻의 아하브가 지금 나그네 게르들을 대상으로 쓰인겁니다. 게르를 사랑해라.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그릇의 크기에 저는 탄복합니다. 게르를 압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너희 국민으로 받아들여~ 아니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해 주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윷놀이 할 때 윷을 담아 던지는 작은 종지 그릇만한 스케일인데 하나님은 아예 큰 저장 탱크와도 같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말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는 겁니다. 저만 충격을 받은 것 같군요.


여러분들은 여기 참석하신 YIC 의 형제 자매님들이 외국인들로 보이십니까? 우리 나라사람으로 여겨지십니까? 솔직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이들을 외국인으로 보았지 우리 나라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게르들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를 보십시오. 이집트 땅에 있을 때 너희도 게르였기 때문이다. 너희도 나그네였기 때문이야. 너희가 나그네로서 당한 그 설움을 알잖아~ 이 사람들이 당할 아픔을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게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도 게르였다. 옆에 사람에게 고백해 주세요. 당신도 게르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염리동 토박이다. 적어도 우리 조상때부터 100년 이상 염리동에서 살았다. 라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모두 여기에 굴러온 돌들이 아니십니까? 나그네의 설움을 아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염리동에서 나그네의 설움을 당하고 있는 우리 외국인 형제 자매들의 사정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페러다임을 바꿉시다. 이분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우리 조국의 국민이며, 우리 형제요 자매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염산국제교회 YIC는 우리 염산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게르인 우리 외국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손짓이며 몸부림인 것이지요. 그래서 YIC는 이제 그냥 주일에 저 구석에서 따로 모이는 외국인 모임 수준이 아니라 우리 아들 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공동체, 게르 공동체인 YIC는 정말 염산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며 프라이드입니다. 게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귀한 도구가 바로 YIC입니다. 단순한 영어 이니셜인 YIC라는 이름 대신 나그네 예배, 나그네 커뮤니티, 게르 커뮤니티, 이런 의미 있는 말로 이 모임의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요?


YIC에 오시는 70%의 사람들이 불신자들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대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들 중에 YIC 예배 오기 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중국 한족들은 전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한족 3명 조선족 교포 1명이 세례까지 받았잖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늘에서는 지금 잔치가 벌어진 것이지요. 이 분들이 주일 한 번 YIC를 통해 신앙이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막노동을 통해 돈 벌러 온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한국인 남편 만나서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 온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 나그네 공동체 YIC는 정말 귀한 모임입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한 번도 예수님을 믿어 보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네 명의 초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분들이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히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 YIC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주십시오. 우리는 봄 가을에 힐링캠프라는 이름으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재정과 기도로 후원해 주시면 저희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예배 후의 한글교실,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해서 나누는 친교모임도 있고 함께 큐티를 하는 큐티 모임등 다양한 소그룹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YIC는 더 이상 염산에서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그네였으니….나그네된 우리의 외국인 형제 자매들을 더욱 사랑합시다. 이것이 염산교회를 향한 YIC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