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6-16

제목: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Where is your brother?)

 

1.

가족을 건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특히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무거운 숙제입니다. 한국 어르신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농사에 빗대어 자식 농사라고도 부르곤 하셨죠.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녀를 키우는 것은 수고해야 하고 시기 적절한 보살핌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있기에 즐겁고 보람된 일들도 많지만, 자녀들을 키우며 겪는 수고와 애씀은 더 많은 듯 합니다. 또 자녀가 많으면 아이들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요. 아무리 쌍둥이도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특히 형제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 형제의 이야기는 대부분 갈등의 이야기이고, 그 갈등은 서로가 너무 달라서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형제의 이야기인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만 형제라는 히브리 말 아흐(אָח)’6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아담의 삶에 분명 이 두 아들의 탄생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큰 아이를 낳은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얻다, 생산하다라는 뜻의 가인이라 짓습니다. 곧이어 둘째 아들 아벨이 태어났으니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적잖은 위로가 됐을 겁니다. 큰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은 서로가 너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목자의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 먹이를 찾고 자라는 양을 키우는 것에 비하면 척박한 땅을 가는 농사가 훨씬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힘들게 농사를 지어본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그들의 제사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각자가 생산해 낸 것에서 취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제물과 제물을 드린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에서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해석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제물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곡식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신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깔뱅주의적인Calvinism 전통에서는 그 이유를 가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중에 동생을 돌로 쳐죽인 것을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벨은 제사를 더 정성스럽게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신약의 용어를 가져와서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요한복음 4)’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합리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의 자유를 우리의 좁은 견해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가인의 제물과 그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했는지 솔직히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 이후에 나타난 가인의 반응입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반응이라면 가인은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무엇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즐거워 하지 않고 자신의 제물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받지 않는지 성찰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가인의 마음을 아시고 따끔하게 충고하시죠. 7절 말씀입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이 가인의 행실을 가지고 평가하며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르지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반응하고 있는 가인에게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도 가인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져버리고 오히려 죄에게 주도권을 넘겨 줘버립니다. 동생을 죽이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3.

가인은 인류 최초의 판사가 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는 사법시험을 치르지도 않았고 누가 그를 재판관으로 세우지도 않았는데도 동생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합니다. 가인의 법정에서 내려진 동생 아벨에 대한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가인의 법정은 공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긍휼과 자비 또한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인데도 그에게 베풀 자비와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가인의 법정을 지배하는 원리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동생의 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시기심이었고 그를 사형에 처하는 기준 또한 시기심과 같은 뿌리를 둔 질투였습니다.  결국 시기심과 질투는 가인의 마음의 문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를 통째로 삼켜버린 뱀과 같이 폭력적이었습니다. 가인의 판결의 칼날은 아벨을 향한 것 같았지만 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하나님에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인은 동생을 죽여 하나님에게 분풀이 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벨이 뭔 죄라고 아벨이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를 찾아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집에 돌아온 아빠가 엄마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아빠의 이유 없는 화풀이에 짜증이 난  엄마는 잘못도 없는 아들에게 큰 소리 칩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화가 난 아들은 밖으로 나가 강아지에게 발길질 하지요. 풀리지 않는 분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이어져 내려갑니다.

 

가인의 모든 폭력적인 결정의 뿌리는 비교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의 제물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를 비교했습니다. 가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은 늘 동생보다 앞서야 했고 동생보다 좋은 결과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강요당한 삶의 습관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들어 낸것인지는 모르지만 가인은 비교했고 괴로워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비교하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비교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합니다. 비교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가인의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는 어리석은 판결을 내리게 했고,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판결문을 보십시오. “니가 흘리게 한 동생의 피로 인해 땅이 더럽혀졌다. 그리고 이제 동생의 피를 받아 마신 땅은 너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니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수확은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너는 객이 되어 떠돌아 다니며 살게 될 것이다.” 아벨을 죽인 저주의 결과는 농사꾼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인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일 때는 그렇게 폭력적이더니 이제는 마치 자기가 피해자라도 되는 것 마냥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죠. 내가 하면 로멘스고 다른 이가 하면 불륜이다. 가인은 동생에게 스스로 내린 판결은 정당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판결은 부당하다고 따지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가인이 아벨을 향해 내린 판결보다 더 이상한 일이 가인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항변에 반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인이 이제 자기가 떠돌이가 되고 객이 되어 살아가면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을 품으로 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15)”

형제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예상하며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토록 자기 중심적인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동생을 쳐죽인 죄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을 죄인인 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놀랍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스스로 위험에 빠진 인간을 부둥켜 안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4.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이야기에 바로 잇대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한 가족이자 친구처럼 지낸 자신의 형제를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 연약한 인간을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대조시킵니다. 형제를 죽인 죄인의 살길을 염려하시고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가인 나쁜 놈, 가인과 같이 살면 안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서로의 다름과 차이을 인정하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형제가 여섯 번 반복되는 것은 형제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시편103).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첫걸음은 형제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314절도 시편 103편 말씀과 마찬가지로 형제 사랑을 영원한 생명과 연결시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줍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5.

아우 아벨은 나보다 더 연약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들의 판결자가 되어서 판단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죠.

지금도 하나님은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심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형제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의 노예에서 벗어나 아우 사랑 또는 이웃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질투 또는 시기심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아우와 이웃들의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내 옆에 있는 이들로 말미암는다는 이 놀라움을 깨닫는 사람만이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신비로 다가옵니다.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 신비로워 하는 자만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아우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그들을 도우며 살 때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가인을 위해 보호자로 자청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Vulnerable한 존재가 되어버린 가인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잖아요. 그의 몸에 잘 보이는 곳에 표시를 해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 또한 시기심과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vulnerable한 존재들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vulnerable한 아우들은 누가 있을까요? 여러분의 사시는 동네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미네소타와 로체스터 안에는 많은 난민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낙인 찍힌 가인처럼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네소타에 와서 히잡을 한 여성들이나 무슬림 복장을 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눈에 띄더군요. 솔직히 다른 종교와 피부색,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이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사는 집 주변에도 여러 아프리카계 난민으로 보이는 이웃들이 있더라구요. 그들에게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걸어주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이 받는 위로는 클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 미국 땅에 이주해 왔을 때 미국사람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주고 웃어줄 때 느꼈던 우리 마음의 평안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vulnerable 한 존재들이 있지 않은지 살피고 서로 돌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로체스터에 온지 1년 미만인 분들은 모두 취약함 가운데 계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라를 이주해 온 분들은 더더욱 그렇구요. 어느 누구나 낯선 땅에 들어가면 취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이야기 나눌 상대도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편안하게 느꼈던 안정적인 곳을 떠나 왔기에 모든 것이 불안합니다. 한국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합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아 보이고 자존감이 확 떨어집니다. 이런 분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시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냥 웃어주고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큰 격려가 될 겁니다.  진로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 임산부들도 정서적으로 돌봄이 필요하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아우네요.

 

요한 일서 3장 말씀에서 말하듯,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아우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아우 또는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들과 나를 비교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연약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신비함으로 대하십시오. 그가 있음으로 나됨이 이뤄진다는 신비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비감이 우리 삶에 사라질 때 인생은 버거워지고 다른 이들을 향한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지금도 묻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의 아우는 누구이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자가 아닌 형제이자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길 우리 주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설 곳이 없는 이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시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Text: Genesis 4:6-16

Title: Where is your brother?

translated by Myunha Kim

 

1.

Taking care of a family is not an easy journey. Raising children is a particularly difficult task. Korean elders often used to refer to raising children as farming and thus, called it “child farming.” Because raising children, like farming, requires hard work and timely care. Several aspects of having children are enjoyable and worthwhile, but it also seems that many times there is more hard work and effort in raising children as well. Additionally, if you have multiple children, you will need to provide adapt the way you care for each child. I've heard that even twins are very different from each other.

We must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tory immediately following Adam and Eve after they were expelled from the Garden of Eden is the story of the brothers. Only in Genesis 4, the Hebrew word for brother, ‘Ah (אָח)’, is used six times. The birth of these two sons must have been a great comfort in Adam and Eve's life. The joy of giving birth to their firstborn was so great that they named him Ga-in, which means “to obtain, to produce.” Soon after, when their second son, Abel, was born, it must’ve been very comforting for Adam and Eve to have two sons. Cain, the eldest son, and Abel, the second son, seem to have been very different from one another. This is evident when you look at their career choices. Cain became a farmer, and Abel became a shepherd. The life of a farmer plowing the fields and the life of a shepherd tending sheep are completely different lifestyles. Farming in a barren land where thornbushes and thistles grow must not have been easy. Of course, the life of a shepherd was also difficult, but I think farming in barren land was much more difficult than finding food for oneself and raising sheep. This is my opinion purely from my experience in farming.

2.

The conflict between Cain and Abel arises from their different sacrifices or offerings. Cain and Abel took what they each had produced and offered these things as sacrifices to God. However, the problem arises from the different attitudes of the two people who offered it. Until now, many interpreters have made great efforts to find out what the difference was between Cain and Abel's offerings. Some even make the ridiculous claim that God prefers animals to grains. The Calvinist tradition interprets the reason as Cain having a problem. You can assume what kind of person he was by observing that he later stoned his younger brother to death. Some interpret it because Abel offered sacrifices more carefully. Referring to the New Testament terminology, Abel says that God accepted the sacrifice because he offered it “in Spirit and truth” (John 4). Any interpretation is reasonable, but we honestly cannot judge God's will from our narrow views. Frankly, we do not know why Cain's offering did not please God. It was simply God's will.

An important factor is Cain's reaction after making his sacrifice. If it was a humble and honest response, Cain should have reflected on himself. He would have thought to reflect on why God did not accept him and if there was a problem with his offering that God did not like. However, Cain tried to find the reason for someone other than himself. God knew Cain's heart at that time and gave him harsh advice in Verse 7.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rule over it.” It seems that God was evaluating Cain's heart and conduct, He is warning Cain, who is reacting with a wrong attitude and action. Even after hearing these words from God, Cain did not change his mind or his heart. No, rather, he didn't understand God even more. He forgot God's Word that he had to rule over sin, and instead gave the initiative to sin and decided to kill his younger brother.

3.

Cain decides to become mankind's first judge. He decides to pass judgment on his brother even though he has not taken the BAR exam, and no one has made him a judge. Cain's court sentenced his brother Abel to death. Cain's court was not only without justice, but it was hard to find any sort of mercy. Even though Abel is his brother who shares the same blood, there seems to be no mercy or love to be given to him. The principles governing Cain's court were envy and jealousy. The criterion for judging Abel's sin was envy, and the criterion for Cain punishing him was jealousy, which also had the same root as envy. In the end, envy and jealousy were as violent as the snake that coiled around the door of Cain's heart and swallowed him whole. The blade of Cain's judgment seemed to be aimed at Abel, but it was pointed at God. Cain wanted to take his anger out on God by killing his brother, but he couldn't take out his anger on God. What sin did Abel have to die for? People try to relieve their anger by finding a weaker being than themselves. After being fed up with the boss at work, the dad comes home and yells at his spouse out of anger. The wife, annoyed by her husband’s unprovoked anger, yells at her son without any plausible reason. Angry at the mother's nagging, the son goes outside and kicks the dog. Unresolved anger bites its tail and passes on to those who are weaker.

The root of Cain's violent actions stemmed from the act of comparing. He compared his offering to Abel's and God's evaluation of them. Cain did not want to admi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rothers. He always had to be ahead of his brother and outperform his brother. I don't know if it was enforced by his parents or if it's something he created himself, but Cain compared and suffered. As we discussed last week, a life of comparison is an unhappy life. The results of comparing are truly devastating. Comparison is a self-defeating, foolish act. The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ain's comparison led to a foolish judgment and returned to him like a boomerang. Look at God's sentencing that came back as a boomerang. “Now you are under a curse and driven from the ground, whic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your brother’s blood from your hand. When you work the ground, it will no longer yield its crops for you. You will be a restless wanderer on the earth.” The curse of killing his brother Abel was fatal for Cain, who had to live as a farmer.

Cain was so violent when he killed his younger brother, but now he is arguing against God as if he was the victim. Humans are such fragile beings. There is a saying that it is a “fire within me”. If I do it, it's romance, but if someone else does it, it's an affair. Isn't Cain arguing that the judgment he passed on his brother was just and that God's judgment against him was unjust?

However, it was at this moment that something stranger than Cain's judgment toward Abel was happening to Cain. It means that God is responding to Cain's protest. Cain complains to God that if he continues to live as a wanderer and a stranger, everyone will try to kill him. God takes such a sinner into his arms and speaks. "It will not be like that. Anyone who kills Cain will be punished sevenfol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so that no one who met him could kill him (v. 15)."

When Cain unleashed his merciless judgment on his brother, he was unaware. But now as he anticipates the dangers approaching him, Cain realizes the seriousness of his circumstance.

It is amazing the mercy and compassion of God, who takes himself as the protector of Cain, a sinner who deserves punishment for the sin of striking and killing his brother. We can observe God's love to embrace human beings who are in danger due to disobedience.

4.

Why does the story of Cain and Abel appear right after Genesis 3 which is the story of the fall of humanity? First, it is to show the reality of humanity that has left God. It is to accuse the human weakness and sinfulness which led to killing a brother, who was like a family member and friend, due to envy and jealousy. Then, the Bible contrasts the love and mercy of God who embraces the weak, sinful human being. The mercy of God who cares about the life of the murderer and being his protector is amazing.

The story of Cain and Abel does not convey the message that Cain is a bad guy and that you should not live like Cain. Rather, it wants to show us how destructive humans can be when we compare ourselves to others and fail to acknowledge each other's diversities and differences. Brotherhood repeated six times is meant to tell us how valuable brotherly love is. It was meant to be paradoxical to show how good and beautiful it is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in unity (Psalm 103). The first step in living as a child of God is brotherly love.

Like the words of Psalm 103, 1 John 3:14 connects brotherly love with eternal life.

“We know that we have passed from death to life because we love each other. Anyone who does not love remains in death.”

5.

The younger brother Abel represents those who are weaker. God did not call us to judge as judges for those who are weaker than ourselves. Rather, He called us to be protectors of the weak and to love them.

Even now, God asks us, “Where is your brother Abel?” He invites us not to be judges but to be brothers. He calls us to get out of the slavery of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omparison and move to the place of brotherly love or neighborly love.

Is there any way to escape from the sin of envy or jealousy? There are two ways. First, I must not be the judge of my brother and neighbors. To do so, we must not forget that we are nothing more than a ‘day-living’ creature. Only those who realize the mystery that my ‘identity’ comes from the people next to me. Only those who are mystical about the existence of others can advance to loving others.

Second, when we feel responsible for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and live by helping them, we can become true people of God. The fact that God volunteered to be a guardian for Cain, who became a murderer, showed us what kind of life we should lead. God won't just leave Cain who has become a vulnerable being. He puts a mark on his body where he can see it, revealing that he is protected by God. We also must embrace vulnerable beings to escape from the bondage of envy and jealousy.

Who are the vulnerable brothers around us? It may be different depending on where you live, but many refugees live as our neighbors here in Rochester and greater Minnesota. They left their homes and came to this strange land for a better life, yet many times they are discriminated against like Cain who was stigmatized. When I first came to Minnesota, I noticed women wearing hijabs and Africans wearing Muslim attire. To be honest, it is true that people with different religions, skin colors, and cultures feel unfamiliar and strange. Around the house where I live, several neighbors appear to be African refugees. The consolation they receive will be great just by smiling at them, talking to them, and saying hello. We all remember the peace of mind we felt when we first immigrated to this land and the Americans were kind to us and smiled at us.

We will have to take care of each other to see if there are vulnerable brothers in our church. For instance, if you have been to Rochester for less than a year, you can think of it as vulnerable. This is especially true for those who have immigrated to the country. Everyone is vulnerable when they enter a foreign land. Emotionally unstable. There aren't many people to talk to. Everything is unstable because he or she has left the stable place where they or felt comfortable. I sometimes make absurd mistakes here in a foreign land that I would never make in Korea. Then I realize how foolish I probably looked and my self-esteem plummets. However, telling those people it's okay and warmly encouraging them will be greatly comforting. Simply, sharing a smile or asking them how they're doing will add a lot of encouragement to their lives.

As the words of 1 John: 3 say, those who do not love their brothers and sisters remain in death. Loving our 'brother' is evidence of our faith. If you are a man of faith, love your brother or your neighbor. Treat those around you mystically so as not to fall into the weakness of envy or jealousy by comparing yourself to them. Only those who live with a sense of understanding that “I become who I am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ose around me” can taste true freedom in life. When this sense of mystery disappears from our lives, life becomes burdensome and the room for others disappears. The Lord still asks us who want to live a life of faith. “Where is your brother?” Who is your brother and where is he now? Our Lord desperately wants you to respond to His call to live as a brother and neighbor, not as a judge. I bless you to live a blessed life that provides a place for those who have no place to stand.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태복음 2020-28

제목: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

1.

여러분의 인생에 목표가 있으세요? 어린이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인생의 목표가 있나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질문이 어려운 것 같으니까 쉬운 질문을 드려볼게요. 여러분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왜 공부하세요? 무엇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좋은 대학에 가려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좋은 대학은 왜 가야하나요?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구요? 그렇다면 좋은 직업을 가지면 뭐가 좋나요? 좋은 직업을 가지면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이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니까요. 그럼 돈을 많이 벌면 뭐가 좋나요?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살 수 있다구요? “목사님 저는 멋진 자동차를 타고 싶어요. 돈만 있으면 멋진 집도 사고, 제가 원하는 뭐든지 다 살 수 있다구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1등이 되는 것이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부를 잘 하고 1등이 되면 물론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을 자랑스러워할 테니까요. 목사님 친구가 스텐포드 대학교 후디를 선물해 주었어요. 스텐포드 대학교 후디를 입었더니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당신 부모님은 분명히 당신을 자랑스러워 할거예요.”

 

이제 부모님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 대한 목표가 있으신가요? 이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좋으시겠어요? 많은 부모들의 자녀들을 향한 소원은 비슷합니다. 우리 아이가 top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가 큰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아이들의 삶을 향한 목표는 높은 지위와 풍부한 재력을 통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아이들과 상관 없이 성인 여러분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셨고 목적을 발견하셨나요?경쟁에서 살아남고 남보다 높은 위치에 앉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은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그걸 놓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2.

세베대의 부인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어요. 그녀는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큰 사람이 되길 바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는 아들들이 가장 높은 지위를 갖길 바랐죠.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죠. 자기 아들들이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예수님이 갈릴리 근처에서 3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왕이 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엄마는 큰 맘 먹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직접 부탁해 보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부탁했을까요? 예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높은 벼슬(position)을 달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엄연한 반칙이었죠.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너무나 화가 났어요. “누구는 엄마가 없어서 안 부른 줄 알아?”, “너희 정말 못됐구나. 그렇게 살고 싶냐?”, “야이 삐리리야~” 이제 욕까지 오고 가며 서로 싸움이 일어났죠.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서십니다. “워워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얘기해 주고 싶었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을 제자들이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이 무엇인 것 같나요? 목사님이 두 개의 보기를 드릴테니 맞춰보세요.

1) 예수님은 1등이 되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

2) 예수님은 꼴찌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정답은? 2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죠.

 

자 부모님 여러분.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자녀의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뒤쳐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servant가 되는 것이라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 큰 사람(Mega)이 되고자 하는 자는 헬퍼(diaconos)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 1(protos)이 되고 싶으면 종(dulos)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자녀가 헬퍼가 되고, 또한 그들이 servant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돕기만 하는 사람이 되면 좋으시겠습니까? “네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뭔가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가 꼬리보다 머리가 되는 게 좋아 보이니까요.

 

3.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미가 없는 일을 하는 것 만큼 사람을 힘 빠지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힘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삽을 주면서 웅덩이를 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웅덩이를 2 피트까지 팠더니 다시 그 웅덩이를 메꾸라 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기운 빠지겠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왜 이런 생각이 듭니까? 웅덩이를 팠다 메우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1등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얻었어요. 그런데 인생의 의미를 못 찾는다면 그것만큼 불쌍한 삶이 있을까요? 꼴찌를 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것만큼 값진 인생도 없을 거예요. 꼴찌하라는 말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때 의미를 느끼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하는 일들에는 기쁨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만족과 보람을 찾기는 힘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연결될 때 인생의 의미를 찾게 만들어져 있어요. 하나님은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이죠. 큰 사람이 되려면 헬퍼가 되고, 1등이 되고 싶으면 종이 되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뜻이죠.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다른 친구가 넘어졌다고 합시다. 진짜 일등인 친구는 결승선에 맨 먼저 통과한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주고 그 친구와 같이 꼴찌로 들어온 친구입니다. 공감하고 함께 아파해주는 친구가 가장 큰 친구인 겁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도와주는 인생이 의미있는 인생이고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호랑애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요. 이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애벌레는 문득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랑애벌레는 먹고 자라는 것만 하기에 인생이 너무나 따분했어요. 그래서 나무 밑을 내려 왔죠. 그리고 애벌레는 이상한 기둥을 하나 발견했답니다. 그 기둥은 꿈뜰거리고 있었어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애벌레들로 만들어진 애벌레 더미였고 애벌레 기둥이었어요. 그 기둥의 애벌레들마다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어요. 하지만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어요. 애벌레는 저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애벌레들이 모두 다 올라가기 때문에 따라서 올라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다른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죠. 밟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밟혀서 떨어지느냐 였어요. 애벌레들은 친구가 아니라 서로가 위협이자 장애물일 뿐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라는 책의 내용이예요. 이 애벌레는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갔을까요 못 올라갔을까요? 맞아요 결국에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꼭대기에서 호랑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조용해 이 바보야. 다른 애들이 듣겠어. 우리는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하는 곳에 있단말이야. 여기가 바로 거기야.”
저기 좀 봐 저기에도 기둥이 또 있어. 사방이 온통 기둥이야.”

호랑애벌레는 화가 났어요. ‘그동안 고생해서 올라온 기둥이 수 많은 기둥 중에 하나라니…’ 호랑애벌레는 탑이 되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갔지만 결국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던 거예요.

호랑애벌레는 어떻게 됐을까요? 호랑애벌레는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준 노랑애벌레가 나비로 변한 모습을 발견하고 기둥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죠. 결국 노랑나비의 도움으로 호랑애벌레는 번대기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리고 나비가 되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책에서 노랑 애벌레와 번데기에 들어가는 늙은 애벌레가 대화를 나누는데, 거기서 나비가 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어요.

나비는 미래의 애벌레 니 모습이란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지. 나비는 꽃에서 꿀만 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준단다. 나비가 없으면 꽃들도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지게 돼!!” 나비는 꽃들에게 희망을 날라다주는 존재였던 겁니다.

 

5.

다른 이들을 섬기고 다른 이들의 종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높은 곳에 있으면 솔직히 좋은 것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 하며 비교하는 경향이 있죠. 다른 사람과 똑같아 지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나도 안 하면 자꾸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하죠. 다른 사람보다 좋은 물건을 쇼핑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구요.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못 가진 것을 내가 갖고 있으면 내가 더 특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인생은 정말 어리석은 인생이랍니다. 비교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사세요. 다른 사람이 좀 앞서가더라도 그냥 보내주세요. 사람들마다 다 인생의 속도가 다른 거예요. 책을 좋아하게 태어난 친구가 있고, 책은 싫지만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게 태어난 친구도 있어요. 사람들은 다 다르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인생의 참 의미와 행복은 다른 이들과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손잡을 때 얻게 되죠. 우리의 도움을 받은 이들의 웃음을 보며 우리는 큰 보람을 얻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답니다.

 

호랑애벌레는 나비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죠. 애벌레는 번데기로 들어가 죽어야만 새롭게 태어남을 알았어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결코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목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죠. 비교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고 꼴찌가 되어도 행복한 법을 알게 된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꼴찌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행복해 하셨어요. 왜냐면 이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참 자유를 얻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하는 삶을 살라고 부탁하신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꽃이 될 수 있어요.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러주고 손 잡아줄 때 그 사람은 꽃이 된답니다. 여러분은 그 꽃들의 삶에 의미를 실어 날라주는 나비로 부름 받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앞서 가려고만 하죠. 우리가 애벌레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비처럼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준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26-28)."

 

Scripture: Matthews 20:20-28

Sermon title: <Hope for the flowers>

translated by Min-Jun Hur

Do you have a goal in life? Let me ask our children here. Do you have goals in life? What kind of person do you want to be? Let’s make it simple. All of you are studying so hard. Why are you studying? Why do you read books? Many people study to get into a good university. So why do we have to go to a good university? Do you need to go to a good college to get a good job? So what's the point of having a good job? People say when you have a good job, you are more likely to make a lot of money. So what's the point of making a lot of money? To buy whatever I want?

You may say, “I want to ride a nice car. When I have a lot of money, I can buy a nice house and anything I want.” So, can you say that your goal in life is to be number one and to make millions of dollars? Of course, many good things will happen to you if you study well and be number one.

Most of all, your parents will be proud of you. Once I was walking around with a Stanford University hoodie that my friend gifted me. Someone came up to me and said, “Your parents must be proud of you.”

Now let me ask our parents here. Do you have goals for your children? Who do you want your kids to be? Many parents wish similar things for their children. “I want my child to be at the top. We want our children to grow up and become influential in the world.” We want our children to influence others by achieving high social status and accumulating wealth.

Adults in the crowd, have you found a meaning and purpose in life? Surviving the competition to reach a higher position may not be that meaningful, but we certainly do not want to lose the competition either.

Zebedee's wife had two sons, James and John. She wanted her sons to become great men and hold the highest positions. But her sons didn't go to a good college. Instead, they were fishermen at the Sea of Galilee. When she heard that Jesus was going into Jerusalem after three years of ministry in Galilee, she thought that finally Jesus was going to become a king. She became very excited and decided to go to Jesus and ask, “When you become the king, could you let James and John have the next two highest positions?” This was an outright foul. The other ten disciples got furious. They started to swear and fight with each other.

Jesus intervenes here and decides to tell his disciples something important, since the disciples did not seem to understand the purpose of Jesus’ going to Jerusalem. What do you think is His purpose in entering Jerusalem? I will give you two choices.
1) To be number one and to sit in the highest place.
2) To be the last out of all people and become a servant of others.

Choice number 2 is the correct answer. This was also the purpose and meaning of Jesus' entire life. This was why Jesus came to this earth.

I will ask the parents here. If the purpose of your child's life is to fall behind others and become a servant to others, how would you feel? Jesus says, “Whoever wants to be a great man (Mega) among you must be a helper (diaconos). If anyone wants to be number one (protos) among you, he must be a servant (dulos).” Will you feel great if your children become helpers and servants of others? Deep down we might feel like it is our loss. Still we prefer our children be the head rather than the tail.

We humans get our energy from finding a meaning. Nothing makes people more depressed than doing meaningless work. Let’s say someone gives you a shovel and tells you to dig a puddle. How would you feel if that same person tells you to fill the puddle up again after you dig about two feet? Are you going to lose your temper? You might be disheartened, since digging and filling it again do not seem to make any sense!

Let’s say you study really hard and go to a good college and get a good job. But if you do not find the purpose of your life, wouldn’t that be a miserable life? In contrast, if you realize the meaning of life, your life will be more valuable than anyone’s. 

So, when do we find purpose in our lives? We are made to find this when we help and serve others. When we do things for ourselves, there may be joy, but it is difficult to feel fulfilled and satisfied. Man is a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Since God is relational, we are created to find the meaning of life when we connect with other people. 

To our youngest crowd, your moms went through tough times when giving birth to you. They went through even tougher times when they were raising you. Although you didn’t follow the directions, your moms were happy raising you. They felt rewarded and found their lives’ meanings as they helped and served you. The same goes for your lives. When we help and serve others, we find our purpose in life. 

Let me tell you a story.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tiger caterpillar who was eating the leaves and living happily. One day, the caterpillar thought, “maybe life is not all about eating and growing.” Life was too boring. So he went down under the tree. And he found a strange column. It was wriggling. Looking closely, he saw that the column was a pile of caterpillars and everyone was trying to climb to the top. But the top was obscured by clouds. He did not see anything up there, but since all the other caterpillars were climbing it, he decided to climb it also. But that was not as easy as he thought. He had to step on other caterpillars to climb. It is either he steps on others or he would be stepped on. The caterpillars were not friends. They were just threats and obstacles to each other. 

This story is from the book called "Hope for the flowers." Do you think this tiger caterpillar climbed up to the top? Yes, he finally made it. But what was at the top? There was nothing. At the top, the caterpillar heard the other caterpillars talking.
“There is nothing here.”
“Quiet, you idiot. The other kids will listen. We're where they want to be. We are here.”
“Look over there, there’s another pillar over there. There are pillars all over the place.”
Listening to this, the tiger caterpillar got upset. He got ahead of others, but in the end, he didn't find any meaning. However, he found that his friend, the yellow caterpillar, who cared for and loved him, transformed into a butterfly. He decided to go down the pole. Eventually, with the help of the yellow butterfly, he became a cocoon. And as a butterfly, he discovered the meaning of life. 

This is how the yellow caterpillar described what becoming a butterfly is.
“Butterflies fly with their beautiful wings, connecting the earth and the sky. Butterflies drink the nectar from flowers and carry seeds of love from flower to flower. Without butterflies, the flowers will soon disappear from this world!” Butterflies were the ones that brought hope to the flowers.

We realize our meaning of life when we serve others. The word “servant” may make some people uncomfortable. When you're ahead of others, honestly, there seem to be a lot of good things that come with that status. We tend to compare ourselves to others and feel like we are falling behind if we do not do the things others do. At the same time, we want to be different from others in some ways. We want to have something better or go to a better university. We want to look more special by having what other people do not have. 

However, comparing our lives to others’ is foolish. Don't compare, live your life. If someone else is a little ahead of you, just let it go. Everyone's pace of life is different. There is someone who loves books, and there is someone who hates books but is born to love sports. There is no need to compare because everyone is different.

The true meaning and happiness of life cannot be obtained by comparing ourselves with others. Rather, we get this when we connect with and hold hands with others. Seeing the laughter of those who have been helped by us makes us feel truly rewarded.

As the tiger caterpillar was reborn as a butterfly, he realized the meaning of his life anew.
He had to go into a pupa and die, in order to be reborn. We also need to believe in Jesus Christ and die with Jesus. Otherwise, we can never be born again into a new person. If we do not die with Jesus and do not live with Jesus, we will lead our lives in the same way as the rest of the world does. When we are born again as children of God, we will gain different perspectives. We will be able to live freely without comparing ourselves to others. We will also learn how to be happy even at the bottom. While carrying the cross, Jesus was happy since he knew many people would find true freedom through the cross. He asks us to live a life that sets others free.

Everyone in the world can be a flower. When we approach someone, call his name and hold his hand, he becomes a flower. All of us are called to be butterflies. We are called to bring meanings to the lives of the flowers. Those who do not know Jesus yet do not know where they are going, and they only try to get ahead and trample other people. If we as butterflies connect their lives with God, they will be able to find purpose and meaning in their lives just like we do. We will close with verses Matthews 20:26-28.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가복음 1:1-8      

제목: Way maker

 

1.

151710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 앞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을 붙입니다. 논쟁이라는 뜻의 “Disputatio”라는 이 문서는 기독교 역사에 가장 강력하고도 폭발적인 저항 운동이된 종교개혁을 촉발시킵니다. 루터는 무엇 때문에 ‘95개조 반박문으로 불리는 ‘Disputatio’를 써야만 했을까요? 그는 이 문서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했나요? 반박문의 주요 내용은 면벌부(免罰符)’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면벌부란 말 그대로 벌을 면하게 해주는 부적이었습니다. 당시 카톨릭 교인들은 연옥(煉獄, Purgatory)을 믿었습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있는 곳으로 믿어졌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헌금을 통해 죽은 자들의 연옥에 있는 시기를 줄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기 보다 먼저 죽은 이를 위해 헌금함에 동전을 넣으면, 그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연혹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라고 믿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 면벌부가 사제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들 중에는 자신의 빚을 면벌부 판매로 메꾸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성당을 짓는다는 명분 하에 교황의 주도로 면벌부가 판매되기도 했죠. 마틴 루터는 이러한 면벌부 판매가 성경에 반대되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 없이 따라가는 길이 아닌 정반대의 바른 길을 가고자 저항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이 저항운동은 쯔빙글리(Ulich Zwingli), 쟝 깔뱅(Jean Cavin)같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퍼져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큰 개혁의 뜻을 세웠습니다. 그 구호는 사제들의 사리사욕에 의해 왜곡된 기독교가 아닌 성경의 원래의 뜻과 목적을 따르는 참 기독교로 돌아가기 원하는 간절한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물 근원(根源)을 향하여또는 물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가진 “Ad Fontes(back to the sources)라는 라틴 말은 종교개혁자들이 만들 새로운 길의 지향점을 알려주었죠. 이것이 종교냐?라는 강한 의구심에서 시작된 거짓 종교에 대한 반발심은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Protestant’는 그들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을 정확히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했죠.  지향점이 다른 삶 말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가는 자들이라는 뜻이잖아요. 종교개혁의 뜻을 기리는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개혁자들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지향점을 재 조정해 보고자 합니다.

 

2.

지난 10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날입니다. 소설가 김훈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빚진 마음으로 소설 하얼빈을 올 여름에 출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안중근 의사의 삶을 추적해오며 자료를 모았고 그의 삶을 하얼빈이라는 소설을 통해 조명했습니다. 저도 몇 주 전에 드디어 소설 하얼빈을 손에 넣었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며 저는 이런 질문을 계속 되내었습니다. “내가 만약 안중근이었다면과연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 “안중근이 자신의 신념을 실행해 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순국했습니다. 그가 죽을 당시 셋째는 아빠 얼굴도 못 본 갓난 아이였습니다. 제가 만약 안중근이었다면 처자식을 버리고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의 가문은 천주교 신앙을 가진 황해도 해주의 권세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는 가문의 권세를 입고 그냥 편하게 살아도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험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슬하에는 큰 딸 밑에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막내 아들이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 혼자서 러시아 연해주로 독립운동을 위해 떠납니다. 그는 마치 물 맷돌 다섯개를 들고 골리앗 앞으로 달려간 다윗처럼, 권총에 실탄 일곱 알을 채워 들고 하얼빈 역으로 향합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토 한 사람의 광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내 몰리고 불행해졌다고 믿었습니다. 이토를 없애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총알 일곱 발 중 여섯 발을 쐈고 그 중 세발이 이토의 급소를 관통합니다. 황해도의 시골청년이 쏘아 올린 이 혁명적인 시도는 큰 파장을 일으키며 독립 운동에 불을 지핍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천주교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안중근 사건과 선을 긋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책임자였던 프랑스 신부 뮈텔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정죄합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고향 성당의 빌렘 신부가 여순 감옥에 가서 그의 고해성사를 행하고자 요청했을 때도 뮈텔 신부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같은 프랑스인이었던 빌렘 신부는 뮈텔의 뜻을 저버리고 개인적으로 안중근을 찾아 가 그의 고해성사를 행했습니다. 안중근이 죽기 3일전의 일이었죠. 천주교는 1993년이 될 때까지 안중근의 의로운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938월이 되어서야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고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며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안중근의 행위는 한 명을 죽인 살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화를 해친 원흉을 없앤 의로운 행위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안중근이 스스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마음을 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부의 어떤 지시도 없이 스스로 계획하여 실행에 옮겼다는 거죠. 그의 마음 속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도 좋다는 강한 의지였습니다.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그의 가문이 겪게 될 어떤 핍박도 그를 꺽지는 못했던 겁니다. 마틴 루터 한 사람이 불지핀 개혁의 불이 전 유럽으로 번져갔듯, 안중근의 의로운 행동은 이후의 많은 독립 운동의 불씨가 됩니다. 시골뜨기였고 포수에 불과했던 한 사람의 결심과 행동은 그렇게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게 만들었죠.

 

3.

마가복음도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소개하며 그가 만든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갈 그 길이 될 것이라고 마가복음은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걸어갈 길의 방향과 그의 길의 방향이 일치했다는 겁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제사장 가문인 레위지파였습니다. 그 또한 제사장으로 앞 날이 보장된 삶이었습니다. 그가 제사장이 되었다면 사람들의 존경도 받고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그는 출생의 비밀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백발에 그를 낳았습니다. 그를 잉태할 당시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예언을 받았죠. 그 예언을 간단히 말하면 그가 메시아가 올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예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천사는 일러줬죠(1:15-18). 그는 평범한 제사장의 삶은 못 살 운명이었던 겁니다. 성인이 되자 그는 예루살렘의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을 만들기 위해 유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존경받는 자리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죠.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의 올 길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길을 닦는 Way maker였던 겁니다.

 

아마도 그의 어린 시절부터 책상머리에는 이사야서 403절 말씀이 붙여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세례자 요한의 비전과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똑바르고 곧게 만드는 것이죠. 세례자 요한은 마틴 루터처럼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선구자 역할을 요한이 했습니다. 요한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길이 만들어 졌으니 그렇습니다. 루터 또한 중세와 근대를 가른 혁명적 인물이었죠. 안중근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은 평화의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요한과 루터 그리고 안중근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바꿔 놓은 혁명가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혁명은 사람들이 붐비는 광장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텅비고 황량한 들녘에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외진 곳이 광야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광야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분리되고 단절된 공간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의 외침은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라.” 그런데 그의 단순한 외침에 도대체 무슨 힘이 있었길래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많이 몰려든 것일까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권위를 느끼고 그에게로 와서 침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가문 마저 초라한 광야의 예언자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항상 신비롭습니다. 도대체 세례자 요한의 이런 권위는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성전을 중심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무리들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특권을 박차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모든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샘 근원을 찾아 광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인도하심을 받은 삶을 기억하며 그도 광야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광야에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하는지 안 하는지 그는 직접 실험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 광야에서 그는 하나님의 강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선배였던 엘리야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인도하심을 받은 적이 있었죠. 그는 엘리야의 심장을 가진 거친 혁명가였습니다.

 

4.

그렇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회개하고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으라.” 주님이 오실 길을 만드는 도구와 연장은 회개와 회개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간단한 이 요구는 우리 전 존재를 흔들어 놓는 매우 강력한 요구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무거운 요구입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혁명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혁명(革命)의 한자는 가죽 혁()에 목숨 명()자입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혁명과 같다고 한 이유는 목숨을 내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부를 벗겨 가죽을 만들어 새사람이 되고, 목숨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혁명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회개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Metanoia)’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목표, 삶의 타겟, 삶의 과녁을 완전히 다르게 설정하는 삶입니다. 그냥 적당히 교회 발만 딛어 놓고 모양만 신자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껍대기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알맹이를 취하는 삶입니다. 나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나의 욕망을 새롭게 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가는 삶의 방식과 반대의 방향으로 protest하며 가야할 지도 모릅니다. 굶어 죽더라도 삶의 근원이 되는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찌 적당히 믿어서 될 일입니까? 완전히 나의 가죽을 벗겨서 새사람을 만들고 온전히 뜯어 고치는 혁명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회개 후에 새롭게 태어난 의식으로 세례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삶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가 걸어간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거기에 길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광야에서 참된 삶의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길이 되어 많은 이들을 진리이신 예수께로 안내했습니다.

 

5.

세례 요한의 혁명은 광야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를 강타하였습니다. 요한이 요구한 회개의 삶은 누가복음 3장에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였다면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삶의 변화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잉여의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장에 2년 넘게 입지 않고 있는 고가의 옷, 그리고 여러분의 냉동실에 반 년 넘게 먹지 않고 있는 음식물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이웃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에게 잉여의 급여가 있습니까? 혹시 그것은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아닐까요? 여러분의 삶에 이웃과의 나눔과 공유가 없다면 여러분의 회개는 껍대기에 불과합니다. 다시 회개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셔야 합니다.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한은 요구합니다. 너희 직업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뺏어내지 말라고 합니다. 높아진 지위로 이웃들의 존엄성을 짓밟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갑질하지 말라는 것이죠. 모두가 동등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바로 요한이 걷고자 했던 길이었습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그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자주 말하지만 제가 이해하는 이웃 사랑은 나를 통해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귀함과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음식과 옷 그리고 돈을 나누는 것이 별것 아닐 지 모르지만 받는 그 사람은 그 섬김을 통해 존귀함을 느낍니다. 이런 나눔과 베풂의 삶의 방식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나야 할 종교 개혁과 진정한 혁명은 우리의 삶의 태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은 자연스레 이웃을 지향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함께 걸어가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 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따라가는 Rival Gospel이 아니라 참 복음을 따른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을 향한 Rival story가 아닌 예수님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십시오. 오로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SPC 평택 공장의 사고는 이 시대 라이벌 복음의 단면입니다. SPC는 직원들의 팔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여러 번 발생했는데도 기계 점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20대 비계약직 직원이 빵 소스 배합작업 중 앞치마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며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사건 현장의 기계를 흰 천으로 가린 채 공장을 재가동했다고 합니다. 동료 직원의 생명과 존귀함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이윤만을 위해 돌아가는 기계인듯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라이벌 복음입니다. 돈과 이윤을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도 짓밟을 수 있다는 무서운 악마적인 발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돼 버린 소비주의 자본사회의 민낯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샘 근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성경 전체를 요약한 우리의 샘 근원입니다. 이웃을 사람답게 대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야 말로 소비시대의 거짓 복음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혁명은 매우 작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개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조정하고 지향점을 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의 삶과 말씀이 진리라면 그의 삶의 방식에 나를 던지는 것이 마땅한 삶 아닐까요? 엘리야의 심정으로 세례자 요한은 지금도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맘몬)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18:21).”

 

그 작은 혁명과 작은 개혁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례 요한과 함께, 좁고 낮지만 바른 길을 향해 걸어가 보지 않으시렵니까? 내 옆의 이웃들에게 손 내밀고 함께 나누고 베푸는 그런 삶의 방식으로 함께 걸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산다고 세상이 변하겠어?’ 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 주변 만이라도 밝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틴 루터나 안중근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행동의 변화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그 길은 더 또렷해 지고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작은 삶의 변화가 길이 되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이야 말로 way maker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의 지향점의 변화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이뤄내야할 작은 종교개혁일 것입니다.

 

Text: Mark 1:1-8

Title: Way maker

translated by Wi Chun-il 

1.

On October 31, 1517, Martin Luther affixed the "95 Theses" in Latin on the door of the Wittenberg Cathedral. The document, “Disputatio,” which means “dispute,” sparks the “Reformation,” which became the most powerful and explosive resistance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Why did Luther have to write Disputatio, which is called 95 Theses? What was he trying to argue with this document? The main content of the rebuttal was against the Plenary indulgence (免罰符). The word indulgences was literally an amulet to avoid punishment. At that time, Catholics believed in Purgatory. Purgatory was believed to be somewhere between heaven and hell. It was believed that the giving of the living could reduce the time of the dead in purgatory. It was believed that if someone puts a coin in the treasury for somebody who died before, the soul of the dead will be transferred from purgatory to heaven with the sound of the coin falling. The problem, however, was that this pardon became a means of making money for the priests. Many of the priests tried to pay off their debts with the sale of indulgences. In addition, under the pretext of building St. Peter's Basilica, indulgences were sold at the initiative of the Pope. Martin Luther resisted through the ‘95 Theses’ that this sale of indulgences was wrong, contrary to the Bible. He resisted to follow the right path, the opposite of the path that everyone at the time followed without thinking.

 

Martin Luther's resistance movement spread throughout Europe through Reformers such as Ulich Zwingli and Jean Cavin. The Reformers set the will of great reform, “Let's go back to the Bible.” The slogan contained the earnest desire to return to true Christianity that follows the original will and purpose of the Bible, rather than Christianity distorted by the self-interest of the priests. The Latin word “Ad Fontes (back to the sources),” which means “toward the water source” or “let’s return to the water source,” indicated the direction of the new path the Reformers were going to make. The resentment against false religion, which began with a strong doubt, ‘Is this religion?’ ignite the Reformation. At that time, the Reformers risked their lives to carry out their will. ‘Protestant’ was a sarcastic term for them, but it was also an accurate description of their way of life. It means that their life had a different direction from others. Protestant means those who go in the opposite direction against the direction of the world. How do you live on the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which commemorates the will of the Reformation, to live up to the will of the reformers? We would like to re-adjust the direction of our lives through the stories of these two people.

 

2.

October 26th is the day that Ahn Jung-geun killed Ito Hirobumi at Harbin Station. Novelist Kim Hoon published his novel “Harbin” this summer with a heart in debt to Ahn Jung-geun. He has been tracking the life of Ahn Jung-geun for many years, collecting data, and illuminating his life through a novel called 'Harbin'. A few weeks ago, I finally got a book ‘Harbin’ and read it right away. As I read the novel, I kept asking these questions. “If I were Ahn Jung-geun… Would I have been able to do that?”, “What was the power that Ahn Jung-geun had to carry out his beliefs?” He passed away at the age of thirty-two. At the time of his death, his third child was an infant who had never even seen his father's face. If I had been Ahn Jung-geun, I would not have been able to make such a decision by abandoning his wife and children.

 

Ahn Jung-geun was a Catholic believer. He was a man of faith in Christ. His family was a powerful family in Haeju, Hwanghae-do, with Catholic beliefs. He was able to live comfortably under the authority of his family. But he dared to choose the rough road. He had two sons under his eldest daughter. He goes on his own to the Russian Primorsky Territory to fight for independence when his youngest son is in the womb of his wife. Like David running to Goliath with five water millstones, he heads to Harbin Station with seven bullets in his pistol. Ahn Jung-geun understood that it was God's will to kill Ito. He believed that one man's madness drove many people to death and made them unhappy. He was convinced that getting rid of Ito was the way to peace in the East. According to his belief, he fired six of his seven bullets, three of which pierced Ito's vital points. This revolutionary attempt, launched by a rural youth in Hwanghae Province, caused a great stir and ignited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Catholic Church, which baptized Ahn Jung-geun, draws a line with the incident by Ahn Jung-geun for political reasons. The French priest Mutel, who was in charge of Catholicism in Joseon (Korea) at the time, condemned Ahn Jung-geun as a murderer. Even when priest Willem of the hometown church who baptized Ahn Jung-geun requested to go to Yeosun Jail to perform the sacrament of confession, priest Mutel did not allow it. Priest Willem, who was also a Frenchman, abandoned Mutel's will and personally went to Ahn Jung-geun to pefrom the sacrament of his confession. It was three days before Ahn Jung-geun died. The Catholic Church did not recognize Ahn Jung-geun's righteous deeds until 1993. It wasn't until August 1993 that Cardinal Kim Su-hwan said, "His action was an act in the process of carrying out the war of independence in the face of Japanese imperial aggression, and it is self-defense and deserves to be viewed as a righteous action" admitting it was an effort for greater peace. Ahn Jung-geun's act was not recognized as a murder that killed one person, but as a righteous one that removed the culprit that harmed the peace of many people.

 

What surprised me while reading the novel was that Ahn Jung-geun decided to shoot Ito Hirobumi himself. That is, it was planned and carried out on its own without any direction from the superior. A fire was burning in his heart. He had a strong will to sacrifice his life for the sake of peace in the East. None of the persecutions that his wife, children, and his family would endure could not stop him. Just as the fire of reform ignited by Martin Luther spread throughout Europe, Ahn Jung-geun's righteous action becomes the sparks of many subsequent independence movements. The determination and action of one man, just a country man and a catcher, became a way, and many people followed it.

 

3.

The Gospel of Mark also introduces a humble man and guides the path he made. The Gospel of Mark introduces that the path he walked will be the path that Jesus Christ will follow. This means that the direction of the path Jesus was walking in coincided with the direction of his path. Both his father and mother were of the tribe of Levi, a priestly family. He also had a life with a guaranteed future as a priest. If he had become a priest, he would have been respected by the people and would have been able to live well. But he was the one with the secret of birth. His parents gave birth to him at old age. When she conceived him, he received a prophecy from an angel of God. Simply put, the prophecy was that he would prepare the way for the Messiah to come. The angel told me that preparing the way would convert many people (Luke 1:15-18). He was not doomed to live the life of an ordinary priest. Upon reaching his adulthood, he left his home in Jerusalem and went into the wilderness of Judea to make his way. He refused to take a seat of respect. And he did not really care about eating well and living well. His only concern was to do God's will. God's will for him was to prepare the way of the Messiah. He was a way maker paving a new path.

 

Perhaps from his childhood, the words of Isaiah 40:3 were attached to the head of his desk.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John the Baptist’s vision and mission were clear. It is to prepare the way for the Messiah and to make his way straight. John the Baptist, like Martin Luther, marked an era. John played the role of a forerunner between the Old and New Testaments. It is because the way for Jesus to come was made through John's activity. Luther was also a revolutionary figure that separated the medieval and modern times. Through Ahn Jung-geun's righteous actions, Koreans were able to dream of a world of peace again. John, Luther, and Ahn Jung-geun were revolutionaries who changed the times in that sense.

 

John the Baptist's revolution did not begin in a crowded square. He was but a cry in the wilderness. The wilderness is a remote place, isolated from everything, in an empty and desolate field. As I said before, the wilderness is a separate and isolated space where no one can help. But what in the world was John the Baptist doing there? His cry was simple. “Repent. And be baptized.” But what was the power behind his simple cry that so many people flocked to him? Isn't it amazing? He is but a cry in the wilderness, yet many are listening to him. People felt the authority of his words, and they came to him and began to be baptized. Even the Herod family who ruled Palestine could not ignore the voice of a poor prophet in the wilderness. I always find this part mysterious. Where did John the Baptist's authority come from?

 

John the Baptist was wary of the Pharisees and priests who were enjoying privileges centered on the temple. He left the priestly privilege and went into the wilderness. He wanted to return to the Word to live by the Word, and cut himself off from all he relied on. Rather, he went into the wilderness to find the source of the spring. He, too, chose to live in the wilderness, remembering the life in which their ancestors experienced God's presence and were led in the wilderness. In the wilderness, where he could depend on nothing, he wanted to test whether God's word really works or not. In that wilderness he received strong guidance from God. Elijah, who was his predecessor, also had God's powerful guidance in the wilderness. He was a tough revolutionary with the heart of Elijah.

 

4.

Then, should we also go into the wilderness like John the Baptist? John the Baptist says: “Repent and bring forth fruit befitting repentance.” The tools that made the way for the Lord to come were repentance and the fruits of repentance. However, this simple request is a heavy demand that is not easy because it is a very powerful request that shakes our entire existence. Because repenting and bearing the fruits of repentance is like a revolution. The Chinese characters for revolution (革命) mean leather () and life (). The reason I said that repenting and bearing the fruits of repentance is like a revolution is because it is something you risk your life for. Wouldn't it be a revolution to peel off skin to make leather, to become a new person, and to be born anew?

 

Becoming Christians begins with repentance. To be a disciple of Christ is to choose a way of life tha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way you used to live. The Greek word for repentance is “Metanoia”, which means to completely change the direction of your life. It is a life that sets a life goal, and a life target completely differently. It is not just a life of living as a believer only by the appearance of the church, just in moderation. It is a life of throwing off the shell completely and taking the kernel. It is not using God for my own desires, but a life that renews my desires for God. You may have to protest in the opposite direction to the way of life that everyone in the world follows. Even if you die of starvation, you struggle to return to the Word that is the source of your life. How can you believe this in moderation? It is impossible without a revolution that completely peels off my skin to create a new person and completely revive it. Therefore, after repentance, baptism was performed as a new born ordinance.

 

John the Baptist knew this. His own life was so feeble, but he knew that if people gathered to follow in the footsteps he had walked, a path would be made there. That is why John walked and walked the path of true life in the wilderness. His way of life became a way, leading many to the Truth, Jesus.

 

5.

John the Baptist's revolution began in the wilderness and struck all Judea. The life of repentance that John demanded is specifically introduced in Luke 3. It was to bear the fruit of life. If you repent, you must change your life. However, it should be noted that the change in life had to be concretely revealed in the attitude toward neighbors. Whoever has two sets of underwear should give it to the one who doesn't have it, and whoever has surplus food should share it with his neighbor. Have you ever wondered if expensive clothes that you haven't worn in your closet for over two years and food that you haven't eaten in your freezer for over half a year aren't yours, but your neighbor's? Do you have a surplus salary? Could it be that it is a gift from God to share with our neighbors? Without sharing and sharing with your neighbors in your life, your repentance is just a shell. You must repent again and bear fruit worthy of repentance. John demands to tax collectors and soldiers; Don't use your job to take more from others. Don't trample on the dignity of your neighbors with your elevated status. In other words, don't be rude. The way of life where everyone lived as equal neighbors was the path that John wanted to walk.

 

It was a way of life that respected others and reminded us of the preciousness of his life. As I say often, loving neighbor that I understand is “to make the other person realize their dignity and preciousness as a human being through me.” It may not be a big deal for me to share my food, clothes, and money, but the recipient feels honored through his service. This way of life of sharing and giving is the way of life of Christians, different from the world. This way of life is the path Jesus walked.

 

The Reformation and real revolution that must take place in this age must occur in our attitudes in life. A life oriented toward God naturally leads to a life oriented toward neighbors. Because Jesus wants his followers to walk together on the path to love their neighbors. This is not the Rival Gospel that all the people of the world follow, but the life that follows the true Gospel. It is a life that follows the story of Jesus, not the Rival story of success that the world seeks.

 

Look at what is happening in the world right now. The accident at the SPC Pyeongtaek factory, which does not care about the safety of workers only to make a profit, is a cross-section of the rival gospel of this age. SPC did not inspect the machine despite several accidents in which employees' arms were caught in the machine. As a result, a non-contract worker in her 20s died when her apron got sucked into the machine while mixing bread sauce. But the next day, it is said that they restarted the factory with the machine at the scene of the incident covered with a white cloth. He offered condolences by giving various kinds of bread to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deceased, which gave them misery. Beloved One Heart Church congregation, this is the rival gospel that is dominating the world. It is a terrifying and demonic idea that even human dignity can be trampled on for profit. This is the bare face of a consumerist capitalist society where profit has become an idol.

 

The source of the spring that the Bible speaks of is this;  “Love God 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is is our fountain source, which summarizes the entire Bible. An attitude of life that treats and respects neighbors like human beings is a way of life that goes against the false gospel of the age of consumption. A revolution must start with something very small and mundane. Reform begins with reorienting our lives and adjusting our direction. If the life and words of Jesus are the truth, wouldn't it be the right life to throw me into his way of life? With the heart of Elijah, John the Baptist still calls us today. “How long are you going to sit on the fence? If God is the real God, follow him; if it’s Baal (Mammon), follow him. Make up your minds! (1 Kings 18:21). We invite you to that small revolution and small reform. With Jesus and John the Baptist, why don't you walk towards the narrow and low but upright path? Why don't we walk together in such a way of life of reaching out, sharing and giving to the neighbors next to me? Instead of thinking, ‘Will the world change if I live like that?’, how about making a bright and warm world just around you? You don't have to be as grandiose as Martin Luther or Ahn Jung-geun. A small change in your actions will make a difference. And the path will become clearer and clearer for those who want to follow it. We believe that small changes in our lives together with our neighbors will become the way and make this world beautiful. You are a way maker if you are living like that, aren’t you?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218-24

제목: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1.     무촌 사이

우리는 부부사이를 보통 무촌이라 하죠.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일촌입니다. 그런데 다른 핏줄에서 태어난 한 여자와 한 남자를 우리는 무촌이라 부르며 가장 가까운 사이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것이 비생물학적인 외부자와의 삶을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인 관계(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떠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조금은 무모한 결정과 모험이 바로 이 결혼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대신에 여러분 부부의 이름을 넣어서 읽는다면 여러분의 느낌은 어떨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23절을 저희 부부의 이름을 넣어 읽는다면 이렇게 되겠죠. 그때에 김경헌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천지은!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닭살 돋죠? 어떤 분은 하지마~ 정신 나갔어? 제발 그러지마~”라고 남편에게 헤드락을 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쩌다 낳아 주신 부모를 버리고 낯설었던 남자 또는 여자와 함께 살고 계십니까? 배우자와의 만남과 삶을 통해 어떤 의미들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아직 싱글이시라면 나의 반쪽을 찾아가는 건 잘하는 일이며 의미있는 일일까요?

 

여자와 남자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또는 여자와 남자가 둘이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데도 어떻게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그 의미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결혼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일단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담은 인류의 원형적 존재라는 겁니다. 아담은 인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원형(archetype)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경험은 우리 모든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맞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것을 보고 기뻐하셨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창조시에 사람(아담)을 만드시고는 좋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죠. 그런데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은 하나님 눈에 좋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원형이기에 우리들의 존재는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다른 이들과 연결될 때 우리의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9월 첫주 부임 설교 때 말씀드렸었죠. 우리의 참 인간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구요.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만드신 표현을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구절에서 주어로 1인칭 복수를 쓰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복수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만드신 표현에서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복수로 사용된 걸까요? 창세기를 쓸 당시에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게 없었지만 우리는 삼위일체를 통해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과 땅을 만들 시작때에 이미 존재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혼돈과 공허 위를 운행하고 계시기도 하셨죠(2). 인간을 만들 때 우리들의 형상으로 만들자고 한 것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삼위일체란 참으로 신비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세 위격(位格, persons)이 한 본질(essence, substance)을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어도 어렵고 쉽게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헬라어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고(inter-penetration) 내재(inter-dwelling)하면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삼위일체는 공동체적인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위해 활동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위해 활동하시는 공동체성을 띈다는 것이죠.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방식입니다. 성자는 성령을 통해 성부를 위해 일하십니다.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는 성령을 통해 성자를 섬기십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서로를 위하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존재방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방식을 그대로 인간에게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자체가 공동체적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또한 관계적이며 공동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그 뜻은 창조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관계적인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또한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모습, 즉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바로 모든 관계가 평화롭게 회복된 나라일 겁니다.

 

인간은 만들어질 때부터 공동체적인 DNA가 존재 깊은 곳 안에 심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여야 하는 이유는 참 인간됨을 공동체를 통해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적인 존재이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또한 공동체적인 존재 방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관계적인 존재(relational being)라는 겁니다. 이 관계적인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삶이 부부의 삶이구요. 그래서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 걸쳐 남녀의 창조와 그들의 관계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3.     아담의 반쪽으로 하와를 만들다.

오늘 읽은 창세기 2장은 아담을 통해 여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외과의사분들도 여기 계시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외과적 수술 과정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은 아담의 존재를 통해 여자를 만들어 내시죠. 잠든 사이라 말하는데 마치 마취상태를 연상케 합니다. 저도 큰 수술을 한 번 받았을 때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마취약 들어갑니다라고 말하고 바로 정신이 나가더라구요. “김경헌 씨 일어나세요.”하기에 깨어났는데 6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구요. 아담도 잠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여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얼마나 놀라고 흥분됐을까요?

 

여기서 사용된 갈빗대라는 히브리 단어 첼라(צְלָעֹת)는 해부학적인 용어로 성경에서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첼라는 성전과 관련된 단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언약궤의 양쪽 면에 달려 있는 손잡이, 성전의 북쪽 측면과 남쪽 측면 등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대칭적인 것의 한 쪽면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쓰인 겁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갈빗대의 반쪽면을 취한 거죠. 그러니까 아담의 반쪽 면을 취하셨다는 거죠. 갈비뼈는 우리 몸에서 가장 대칭적인 뼈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쪽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죠.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가 아니라 아담의 반쪽면을 취하시고 떼어낸 부분에는 새로운 살로 메꿔 놓으신 겁니다.

 

그러기에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볼 때 이런 고백을 하죠.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군요(새번역).”라구요. 이 해석을 뒷받침 해주는 단어 하나가 더 있는데 18절에 돕는 배필로 번역되는 네게드(נֶ֫גֶד)’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반대편(opposite side)이라는 뜻입니다. 배필이라는 말보다 반쪽의 다른 면이 원어에 가까운 뜻입니다. 말그대로 남자는 여자의 반쪽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누가 더 낫고,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따질 수 없다는 겁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건 여자를 어떤 재료로 만들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의 대칭적인 동등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되는 것이 몸을 섞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발견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의 관계를 통해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신비를 깨닫는 것이죠.

 

이 창세기가 기록될 당시의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시대에는 혁명적인 선포입니다. 오히려 여성을 통해 남성의 존재가 의미를 갖고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혁명이 바로 성경의 첫 부분부터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창조가 진행될 수록 더 완벽하고 고등적인 피조물들이 만들어지죠. 남자가 만들어지고 여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남자분들은 기분 나쁠 지 모르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더 완벽하고 고등적인 존재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지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복잡하고 세밀합니다. 여자들은 출산이라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남자 아이 셋을 키우는 것보다 여자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여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훨씬 감정 소모가 심합니다. 제 아내는 이것을 결혼 전부터 알았던 것인지 저의 소원과는 상관 없이 남자 아이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행히도 남자 아이 셋을 가진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아내 말 잘 들으라고 그러시나 봅니다. 저도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내의 의견이 거의 옳다는 겁니다. 아내 앞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내 주장을 꺽지 못하지만, 돌아서면 그래 아내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인정하긴 싫다.” 라고 혼자 생각하곤 합니다.

 

4.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왜냐면 관계적인 분이신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거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함께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구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배우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배워가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안에서 인생의 참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구요.

 

관계란 갈비뼈가 양쪽으로 동등하게 나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등한 존재들이 동등한 위치와 가치에서 출발하지 않고 온전한 관계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부부는 동등합니다. 어는 누구도 다른 누구에 비해 존귀한 이가 없고 월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다른 이를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까지 말씀하시죠. 부부관계는 물론이요 모든 관계는 이러한 상호 동등성에서 건강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 시키기 위해 우리와 동등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고 고통을 몸소 경험하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겸손해질 때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간과 동등해지지 않고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화해한다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exchange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동등한 자격에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와 죽음을 교환하신 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고린도후서 519절에서는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하셨던 대수술을 십자가에서 다시 행하셨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찌르셔서 물과 피를 쏟아 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의 구멍난 갈빗대 사이로 흐르는 물과 피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도 사랑하시는 인간과 그들의 세상과 화해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반쪽이셨던 독생자 예수를 그렇게 희생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잃어버렸던 그분의 또 다른 반쪽인 우리를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태초에 무너졌던 인간과의 관계는 아름답게 다시 회복되어진 것이죠.

 

5.     일상의 관계망들 안에 열매 맺는 삶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 우리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질을 우리와 공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만큼의 존귀함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존귀함은 나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고 어울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상호존중과 동등함의 태도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 직장, 학교, 동아리, 동네 등등 얽히고 섥혀 있는 관계의 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관계망을 이웃이라 부릅니다. 이 관계망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들 안에서 상호존중과 화해가 이뤄진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가정의 관계들 안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길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의 관계망들 안에 아름다운 화해와 샬롬의 열매들이 맺히길 축복합니다.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관계망 속에 있는 이가 나를 통해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리고 여러분의 이웃들이 꽃피우고 열매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Sermon scripture: Genesis 2:18-24

Title: In the beginning there were relationships. / translated by  Deacon Ji Yun Kang

 

1. no degree of kinship

In Korea we usually refer to a married couple as “muchon” meaning the closest degree of kinship. Siblings born to one parent are considered the first degree of kinship. However, a woman and a man born of different bloodlines are called Muchon, and we live as the closest member of a family. If you think about it, marriage means leaving one's biological relationship (parent-child relationship) in order to live with a non-biological outsider. In that respect, it seems that this marriage is rather a risky decision and quite an adventure.

 

How would you feel if you put your husband and wife's names in the text we read today instead of Adam and Eve? So, if we read verse 23 with my name and my wife’s name, it would be like this. At that time, Kyung-Hun Kim said: “You just showed up, you Chun Ji-Eun! The bone is my bone, the flesh is my flesh”. Yes, sounds cheesy, right? Some of the wives might say "Oh stop! Now that’s awkward!” and might want to keep her husband from going any further. Did you leave your parents who gave birth to you to live with a man or a woman whom you did not know before? What meanings are you discovering through meeting and living with your spouse? If you're still single, do you think it will be good and meaningful to find your half?

 

Women and men are clearly different. But the Bible says that a man and a woman, or a woman and a man, become one and become one flesh. As separate beings, how can they become one body, and what does that mean? And what does it mean to take Adam's rib and make Eve? And what does this mean for us living in the present? We would like to examine the meaning of our marriage, family, and church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Adam and Eve in Genesis 2.

 

2.Man made in the image of God

First of all, we must point out that Adam is the archetypal being of mankind. Adam is the archetype that represents and symbolizes man. So Adam's experience can be the existential experience for all of us. That it was not good for Adam to be alone was not in line with God's principle of creation. When God saw what he had made, he was pleased and said it was good. He made man (Adam) at the time of creation and said twice that it was good. But it was not good in God's eyes for Adam to be alone. Since Adam is the archetype representing mankind, our existence is more meaningful when we are together than when we are alone. Actually, our existence is complete when we are connected with others. I spoke about this the first week of September during my inauguration sermon. Our true humanity is completed through our relationships with others.

 

God made man in his own image. However, Genesis 1:26 uniquely describes the expression God made in His image.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hi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beast of the field that dwells upon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beast that creeps on the earth”. I would like to note the use of the first person plural as the subject in this verse. 'We' is clearly plural. In the expression that God made in His own image, God is expressed in plural. Why is God used in the plural? At the time of the writing of Genesis, there was no such thing as the doctrine of the Trinity, but we can interpret this verse through the Trinity. The Gospel of John tells us that Jesus, who was the Word in the beginning, already existed when God the Father began to create the heavens and the earth. Also, the Spirit of God was operating over chaos and emptiness (verse 2). When we created human beings, Jesus and the Holy Spirit were included in what we asked to make in our image.

The Trinity is indeed a mysterious doctrine. God revealed by Jesus Christ means that three persons share one essence (substance). It is also a doctrine tha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raditionally, the Greek expression ‘Perichoresis’ is used to describe the existence of the Triune God. This means that they exist by inter-penetration and inter-dwelling with each other. Simply put, the Trinity is a word that represents a communal way of being. In other words,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exist for each other. It means that they do not work for themselves, but rather have a sense of community that works for each other. This is the way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exist. The Son works for the Father through the Holy Spirit. The Holy Spirit reveals the Father through the Son. The Father serves the Son through the Holy Spirit. It's hard to understand, but God exists for each other. This is the most characteristic way of being God. However, when creating human beings, the Triune God implanted their way of being in humans as they are. This means that God itself is communal, and that human beings who resemble God's image are also relational and communal. This is a very important part. What is the title of today's sermon?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It means that the good and beautiful aspects of creation are relational. It was a good thing in God's eyes to see humans having a relationship with God and also with each other. That was the original form of creation. Therefore, the image of the kingdom of heaven, that is, the image of the kingdom of God, is a kingdom in which all relationships are peacefully restored.

 

From the moment humans were created, a communal DNA was planted deep within their being. That is why a person can discover his own meaning when he is in a community. The reason the church should be a community is that true humanity can be achieved through the community. Since God Himself is a communal being,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also be in a communal way of existence. If the church loses its sense of community, it is no longer a church. The important point is this.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means that we are relational beings. The life of a married couple is the most fundamental form of this relationship. That is why the first two chapters of Genesis portray the nature of the creation of men and women and their relationship.

3. Eve is created from the halves of Adam.

Genesis chapter 2, which we read today, describes the process by which the woman was created through Adam. We have surgeons in our congregation, and it seems that some kind of surgical procedure was performed on Adam by God. While Adam was asleep, God created a woman from Adam. Bible says while asleep, and it reminds me of anesthesia. I too have the experience of lying on an operating table when I had a major operation. The nurse said, "We are now injecting anesthesia" and I fell to sleep right away. When I woke up to the sound of the nurse calling me, “Mr.Kim Kyung-heon, wake up,” six hours had already passed. Adam closed his eyes for a moment, and then opened his eyes to see a woman approaching him. We can only imagine how surprised and excited Adam might have been.

 

The Hebrew word for rib as used here, chela (צְלָעֹת), is an anatomical term never used in the Bible. Chela is often used as a word related to the temple. For example, it was used to refer to the handles on both sides of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north and south sides of the temple. This word is used to refer to one side of a symmetrical thing. So He didn't just take one of Adam's ribs but half of Adam's rib. So He took the half of Adam. The ribs have the most symmetrical bone structure in our body. God did not take one of Adam's ribs, but took the half of a rib from Adam and filled the removed part with new flesh.

 

That is why Adam confesses this when he sees Eve for the first time. “The bones are my bones, and the flesh is my flesh” (New Translation). There is one more word that supports this interpretation, 'neged' (נֶ֫גֶד), which is translated as “helpful matchmaker” in verse 18. This word means the opposite side. ‘The other side of the other half’ means closer to the original language than the word ‘matched’. Literally, a man is made from the half of a woman. It doesn't matter who is better and who has the upper hand. Making a woman out of ribs is not about what material the woman is made of. It emphasizes the symmetrical equality of men and women. Being a man and woman means more than mixing bodies. It really is half and half meeting and becoming one. As a couple, we must discover this mystery. It is about realizing that there is magic in finding one’s true self through relationships.

 

In the world at the time this book of Genesis was written, women were msuperiorerely an accessory to men. But the Bible says that women are equal to men. This is a revolutionary proclamation in ancient times. It is through women that the existence of men has meaning and that they realize the true purpose and meaning of life. A revolution that cannot be found in any other religion is happening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of the Bible.

 

As creation progresses, more perfect and superior being are created. It is significant that men are made and then women are made. Men may feel offended, but in my view, women are more complete and superior than men, because women were created later. That is why women are much more complex and detailed than men. It is women who have the function of giving birth. That's why it's much harder to raise three girls than it is to raise three boys. In my view, raising girls is much more emotionally exhausting. Whether my wife knew this before her marriage or not, she desperately wanted to have a son, despite my wishes. So, unfortunately, I became a father of three boys. That’s why conventional wisdom is saying, listen to your wives. What I also experience existentially is that my wife's opinion is almost always right. In front of my wife, I can't admit that because of my pride, but when I turn around, I say, "Yeah, I think my wife is right. But I don't want to admit it to myself."

 

4.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Humans are relational beings. Because it resembles God, who is a relational being. God says that from Genesis chapter1, he will make men and women and discover the true meaning of life in each other's relationships. And Genesis chapter 2 tells us that their very existence itself is dependent on each other. We are made to love one another. That is why we find the true meaning of life in a relationship of love. We basically learn love and practice love through our relationships with our spouses. That’s how you discover the true meaning of life in it.

 

Relationships are like ribs divided equally on both sides. A perfect relationship cannot be achieved without equal beings starting from equal positions and values. Married couples are equal. No one is more noble and superior than the other. Rather, Jesus goes so far as to say, "Think of others as better than yourselves”. All relationships including married couples can develop into healthy relationships from this mutual equivalence.

 

Look at Jesus Christ. He came wearing a human body equal to ours to reconcile us with God. He had been through all the tribulations that humans go through and experienced the pain himself. A remarkable history of salvation occurred when Jesus gave up equality with God and became humble as an equal to man. This is because the problem of human sin could not be solved without being equal to humans. In Romans 5:10, it is said that we have reconciled with God because of the death of God's son. The original meaning of the word reconciliation here is exchange. Reconciliation is an equal exchange between Jesus’ righteousness and our sin and death. And furthermore, Corinthians 5:19 entrusted us with a position of reconciliation. God did the major surgery on Adam again on the cross. He put Jesus Christ to sleep on the cross and stabbed him in the ribs to pour out water and blood. This was a tremendous love of God.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was born through the water and blood flowing through the hollow ribs of Jesus.

So he sacrificed Jesus, who was half of God, to make peace with the people he loved so much and their world. And God recovered us, the other half of him that had been lost. The relationship with humans that collapsed at the beginning was beautifully restored at the cross.

 

5. Life that bears fruit in everyday relationships

In the beginning there was a relationship. God's greatest joy is to have fellowship with us, who are in His image. In a way, God shared with us the unique nature of his existence. The fact that we are born in the image of God means that we are just as worthy as God. We must know that the worthiness does not apply only to us but to everyone we meet and hang out with. This attitude of mutual respect and equality is what makes our relationships beautiful.

 

You're all living in a network. I live in a network of intertwined relationships, such as home, work, school, clubs, neighborhood, etc. This network is called a neighbor. What is the way to achieve God's kingdom and God's will in this relational network? If mutual respect and reconciliation are achieved within all the relationships we have, what can it possibly be other than the kingdom of God? I wish you all the best in your family's relationships. I give you blessings so that you will have a beautiful reconciliation and the fruits of Shalom in your daily network. Loving your neighbors is not far-fetched. When someone within your relationship network feels their self-worth through you, that’s neighborly love. I hope and pray that through you, your spouse and your neighbors will blossom and bear fruit.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가복음 1045

제목: 행복한 왕자

나레이터: 예수님

 

1.     들어가기

예수님: 안녕하세요. 별명은 행복한 왕자랍니다. 제 별명이 왜 행복한 왕자냐구요? 궁금하시죠? 먼저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책을 읽어보신 적 있나요? 읽어 본 사람 손 한 번 들어볼래요? 많은 친구들이 행복한 왕자를 이미 알고 있군요. 그래도 잘 모르는 친구들을 위해 먼저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왜 제가 행복한 왕자인지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고 나서 제가 진짜 누구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알아 맞춘 친구에게 선물을 드릴게요 

 

2.     행복한 왕자 이야기

옛날 유럽의 어느 도시의 높은 곳에 행복한 왕자라는 동상이 세워졌어요. 행복한 왕자는 얇은 금박으로 씌워져 있었고 두 눈에는 싸파이어가 박혀 있었어요. 겨울이 되어가자 제비들은 따뜻한 남쪽 이집트로 이동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지요. 그러나 한 마리 제비는 날씬한 갈대아가씨와 사랑에 빠져서 혼자서 늦게 이집트로 날아가야 했어요. 제비는 잠시 쉬어가기 위해 행복한 왕자의 발아래 내려 앉았어요. 그 때 제비의 머리 위에 물 방울이 뚝 떨어졌죠 

제비: 아니 날씨가 이렇게 맑은데 빗방울이지?

제비는 하늘 위를 쳐다보았어요. 물방울이 하고 떨어졌어요. 그건 왕자가 흘린 눈물이었어요.

제비: 아니 왕자님 눈물을 흘리세요? 

왕자: 안녕 제비야. 나는 행복한 왕자란다. 나는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거란다. 내가 살아서 화려한 궁전에 때는 몰랐는데 이곳에 있은 후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어.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란다. 제비야 도와줄 있겠니?

제비: 행복한 왕자도 눈물을 흘리는군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왕자: 나의 칼에 박힌 루비를 떼어서 아래 아파서 누워 있는 아이의 집에 가져다 있겠니? 열이 나고 아픈데도 먹을 것도 없고 약도 없는 아이를 위해 루비를 가져다 주렴.

제비: 네 알겠어요 왕자님

 

제비는 왕자의 칼에 박힌 루비를 떼어다 아픈 아이에게 가져다 주었어요.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에서 날개짓을 하며 아이의 열을 식혀 주었답니다. 날씨는 추웠지만 제비의 몸은 한결 따뜻해졌어요.

제비: 왕자님 이제 저는 남쪽 나라로 가봐야겠어요.

왕자: 제비야 하룻밤만 여기서 자고 나의 부탁을 들어다오.

제비: 부탁이 뭔대요 왕자님? 근데 좀 추워지네요.

왕자: 아래 작가가 되고 싶은 청년이 먹을 것이 없어서 글을 쓰고 있구나. 나의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빼서 청년에게 가져다 있겠니?

제비: 알겠어요

제비는 왕자의 눈에서 사파이어를 빼다가 작가가 되고 싶은 청년에게 가져다 주었어요.

하룻밤을 자고 제비는 왕자에게 작별인사를 했어요.

제비: 왕자님 저는 이제 정말 가야해요.

왕자: 제비야 이번에 정말 마지막이야. 아래 성냥팔이 소녀가 보이지? 성냥을 물에 빠뜨려서 성냥을 없게 되었단다. 아마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소녀는 아빠에게 매를 맞게 될거야. 나머지 눈에 있는 사파이어를 소녀에게 가져다 있겠니?

제비: 왕자님 그건 안되요. 그럼 왕자님은 볼 수가 없잖아요.

왕자: 괜찮아 제비야. 어서 가져다 주렴.

제비: 아네정말 그래도 되는지 모르지만해볼게요.

소녀에게 사파이어를 가져다 주자, 소녀는 매우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그것을 제비도 행복해졌어요.

남쪽 나라로 가야하는 제비는 왕자님이 불쌍해지기 시작했지요. 제비는 남쪽 나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왕자님을 지키기로 했답니다. 이제 없는 왕자를 위해 제비는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왕자에게 이야기 주었어요. 그럴 마다 왕자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금박을 떼어다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제비에게 부탁을 했죠.

점점 왕자의 몸에서 금박이 없어지자 왕자는 초라하게 변해갔고 더이상 나눌 금박이 없어지게 되었죠 .

날도 점점 추워져서 제비의 몸도 얼어가기 시작했지요.

제비는 마지막 인사로 왕자의 입에 키스를 하고 왕자의 아래 잠들어 죽었답니다.

제비가 죽자 왕자의 가슴에 납으로 심장이 반쪽으로 갈라졌지요.

도시의 사람들은 초라하게 변한 왕자의 동상을 불에 태우고, 죽은 제비의 시체는 묻어주었답니다. 그런데 동상이 없어졌지만 왕자의 갈라진 심장만은 그대로 남아있었죠.

하늘에서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땅아래서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천사들은 하나님께 왕자의 심장과 제비의 죽은 시체를 가져다 주었지요. 하나님은 제비와 왕자의 심장을 보고 매우 만족했답니다.

 

3.     행복한 왕자II - 예수님

나레이터: 여러분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 재밌었나요? 왕자와 제비가 행복해 보이나요 불행해 보이나요? 이 이야기에서 왕자는 언제 가장 행복해 했나요? 왕자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 가장 행복해 했어요. 자 그럼 저의 이야기를 해 볼까해요. 여러분은 제가 누구인지 알아 맞춰야 하는 숙제가 있는 것 잊지 않으셨죠?

저의 아버지는 왕이세요. 그럼 저는 왕자겠지요? 저의 아버지가 하루는 저를 불렀어요.  

아버지: 아들아 니가 왕자인건 알지만 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니?

아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라면 뭐든 다 들어드릴게요.

아버지: 아들아 나는 세상을 창조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고 매우 기뻐했지.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을 만든 나를 버리고 다른 우상들을 섬겼단다. 그래서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 나는 이 세상을 구하길 원한다. 마귀에게 빼앗겨 버린 나의 나라를 다시 되돌려 와야겠어. 그리고 마귀에게 고통을 당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야해. 니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니? 

아들: 아버지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되죠? 

아버지: 아들아 니가 나와 똑같은 하나님이지만, 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단다. 그리고 인간이 되어 그들과 똑같이 시험을 당해야 해. 그리고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야 한단다. 할 수 있겠니?

아들: 아버지 제가 죽어서 인간들을 구원하고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아름답게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 아들아 니가그렇게 해준다니 나는 너무 행복하구나.

아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너무 행복해요.

자 여기까지 듣고 제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나요? 네 맞아요. 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랍니다. 저는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고, 제 아버지가 만든 인간을 너무 사랑했죠.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원래 모습대로 아름답게 되돌려 놓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이 되었고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다 포기했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어요. 저의 희생때문에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여러분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랍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이웃들을 위해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처럼, 행복한 왕자처럼 그리고 제비처럼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모두 행복한 왕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함께 기도해요.

사랑의 예수님 감사해요. 저를 위해 주님의 가장 귀한 생명을 주셔서 고마워요. 예수님은 살이 찢기고 피가 다 쏟아져 없어지기까지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어요. 감사해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과 나누는 아름다운 어린이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et's pray together.

Thank you Jesus for your love. Thank you for giving your most precious life for me. Through your torn flesh and shed blood, you gave your precious life away for us. Thank you. Help us to become like you Jesus who shares the precious things with the poor and needy neighbors. In Jesus name I pray, Amen.

 

Text: Mark 10:45

Title: Happy Prince

Narrator: Jesus 

translated by Myung Ha Kim

1.     Introduction

Jesus: Hello. My nickname is Happy Prince. Why is my nickname the Happy Prince? Are you curious? Have you ever read a fairy tale book called “The Happy Prince?” Raise your hand if you have! Many of you already know the Happy Prince. For those of you who are still unfamiliar, let me tell you the story of the happy prince. After the story, I will explain why I am the happy prince. Then you guys can guess who I really am. I'll give a gift to the one who guesses correctly.

 

2.     Story of the Happy Prince

Once upon a time, a statue called the “Happy Prince” was built on a high place in a European city. The happy prince was covered with thin gold leaf and had sapphires in his eyes. As winter approached, the swallows left the city to migrate to warmer southern Egypt. But one swallow fell behind and had to fly alone to Egypt. The swallow sat down at the feet of the happy prince to rest for a while. Then a drop of water fell on the swallow's head.

 

Swallow: The weather is so nice, where did this raindrop come from?

 

The swallow looked up at the sky. At that time, the water dropped again. It was the tear drops of the happy prince.

 

Swallow: Dear prince, why are you crying?

 

Prince: Hello Swallow. I am the happy prince. I am crying because I am very sad. I didn't know it when I was alive and living in my beautiful palace, but since I’ve been here, I’ve seen so many poor people. So that's why I'm crying Swallow, can you help me?

 

Swallow: Even the happy prince cries tears. What can I do to help?

 

Prince: Could you take the ruby from my sword and bring it to the house of the sick child down there? The child is sick and has fever but does not have any food to eat or medicine to take. Please, take my ruby to the child.

 

Swallow: Yes, I understand, Prince.

 

The swallow took the ruby from the prince's sword and gave it to the sick child. Flapping the wings over the child’s head, the swallow cooled downed the child’s fever. The weather was getting cold, but the swallow's heart felt warmer.

 

Swallow: Prince, now I have to go to the southern country.

 

Prince: Swallow, please sleep here for one more night and do me favor.

 

Swallow: What is your request, Prince? Because it's getting a little cold.

 

Prince: Yes, the young man who wants to become a writer down there is unable to write because he has nothing to eat. Can you take the sapphire out of my eye and bring it to the young man?

 

Swallow: Yes, I can.

 

The swallow took a sapphire from the prince's eye and gave it to the young man who wanted to become a writer.

 

The swallow slept one more night and said goodbye to the prince.

 

Swallow: Prince, I really have to go now.

 

Prince: Swallow, this is really the last time. See the little girl with the matches down there? She can’t sell those matches because they got dropped into water. If the girl goes home empty handed, her father will get mad at her. Can you bring that girl my last sapphire in the other eye?

 

Swallow: Prince, you can't do that. Then you cannot see.

 

Prince: It's okay, swallow. Come on and take it to her.

 

Swallow: Oh... I don't know if this is okay, but I will listen to you.

 

When the swallow brought her sapphire to the girl, she was very happy and went home full of joy. Seeing that, the swallow also became happy.

 

The swallow had to go down to the southern country, but it began to feel sorry for the prince. So, the swallow gave up on going down to the southern coutry and decided to stay and protect the prince. The prince could not see any more, so the swallow told the prince about all the things going on down there. Everytime the prince heard about the poor, he asked the swallow to take a piece of the gold leaf on him and give it away to the poor.

 

As the gold leaf gradually disappeared from the prince's body, the prince became shabby and worn out. Eventually, there was no more gold leaf to share.

 

It was getting colder and colder, and the swallow's body began to freeze.

 

The swallow kissed the prince as the final goodbye and fell asleep at his feet.

 

When the swallow died, the heart of lead in the prince's chest split in half.

 

Soon, the towns people burned down the shabby old statue of the happy prince and buried the body of the dead swallow. However, even though the statue was burned down, the prince's broken heart remained.

 

In heaven, God commanded the angels to bring the two most beautiful things on earth. The angels brought to God the heart of the prince and the dead body of the swallow. When God saw the heart of the prince and the body of the swallow, he was very satisfied.

 

3.     Happy Prince II- Jesus Christ

 

Narrator: Did you enjoy the story of the Happy Prince? Do the prince and swallow look happy or unhappy? When was the prince happiest in this story? The prince was happiest when he gave the things that were most precious to him to the poor and needy. Now, let me tell you my story. You didn’t forget that you have to guess who I am right?

 

My father is a king. I am his son, so that makes me a prince. My father called me one day.

 

Father: Son, I know you are a prince, but can you do me a favor?

 

Son: Of course, father, I will do anything you ask.

 

Father: Son, I created the world. And I was very happy to make people. But people left me, their creator, and served other idols. So, the world has become a mess. I want to save this world. I must bring back my kingdom that was taken by the devil and rescue the humans who are suffering from the devil. To do this, I need your help.

 

Son: Father, what can I do?

 

Father: Son, you are the same God as me, but you must be a human as well. As a human, you will be tested just like them and suffer. Also, to solve the problem of sin which the humans cannot solve themselves, you must be nailed to the cross and die for their sins. Do you think you can do this?

 

Son: Father, if I must die to save humans and restore this broken and messy world back to your beautiful world, I will.

 

Father: Son, I am so happy that you would do that.

 

Son: Father, what are you talking about? I am so happy to listen to you!

 

So, can you guess who I am now? yes that's right. I am Jesus, the Son of God. I loved my father and the mankind he made so much. My father loved the messy world, so he wanted to bring it back to its original beauty. So, I came down to this earth, became a human, and gave up my most precious life. But I was so happy and satisfied in doing that. Because I knew that because of my sacrifice, the mankind would have a new life and this world would be more beautiful. Do you know when you are the happiest? It's when we share what is ours with others. I am happiest when I share my most precious things with my neighbors. I hope you all become happy like Jesus, like the happy prince, and like the swallow, sharing what you have with others. I hope you all become happy princes and princesses.

 

Let's pray together.

 

Thank you Jesus for your love. Thank you for giving your most precious life for me. Through your torn flesh and shed blood, you gave your precious life away for us. Thank you. Help us to become like you Jesus who shares the precious things with the poor and needy neighbors. In Jesus name I pray, Amen.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215-17

제목: 예배의 실패, 소명의 실패

 

1.

일이 원래 목적대로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꼬였다는 표현을 합니다. 실타래가 뒤엉켜 꼬여있는 것을 상상한 표현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문제를 해결하고 원래 목적대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일컬어 실마리를 찾는다.’ 라고 하죠. 실마리란감겨 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 머리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세상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고민해 왔습니다.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아마도 여러분은 이곳에 와 계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성경이 우리의 시작과 끝을 알려줄 수 있는 책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성경의 맨 처음 단어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맨 처음 책인 창세기의 맨 처음 단어는 처음에(in the beginning)”라고 시작합니다. 히브리 말로 베레쉿(Bereshit)이 그 말입니다. (be)는 때와 장소 앞에 쓰이는 전치사이구요. 레쉬트는 머리 또는 시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첫 말이 실마리로 시작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창세기 1장은 이 세상의 시작 또는 실마리를 말해 줍니다. 이 세상을 시작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선했다는 거죠. 우리가 시작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결의 열쇠가 시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좋았던 그 세상의로의 회복이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 좋다고 말씀하신 창조의 원래 모습은 우리가 다시 돌아가기를 꿈꾸는 궁극적인 지향점(telos)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redeem)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나 구출(rescue)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회복(recovery)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헝클어진 세상, 그러니까 혼돈(Chaos) 상태의 세상에 실마리를 찾아 질서를 부여하신 사건입니다. 창조는 무질서를 질서 있게 만든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이 새로 지은 하우스를 분양 받았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짐이 들어가지 않고 사람이 들어가지 않은 하우스는 그냥 주택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새로 지은 하우스에서 삶을 시작하려고 이삿짐을 일단 막 집어 넣습니다. 새 주택인데 이삿짐박스와 물건들이 이곳 저곳 어지럽게 널려 있겠죠. 주택을 분양 받은 사람은 그 짐을 다 정리할 때까지 쉴 수 없습니다. 짐이 제 자리를 찾은 상태를 질서가 잡힌 상태라 할 수 있겠죠? 이 때 주택이 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주인은 쉴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그곳은 거처(Dwelling place)이자 안식처(Resting place)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런 거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John H. Walton,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 김광남역, 새물결플러스, 81).

하나님은 땅을 만드시고 우주를 만드신 후 그 곳에 사람을 두시고 쉬셨습니다. 모든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혼돈을 잠재우시고 쉬신 것이죠.

 

2.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 질서를 잡아 놓으신 세계 중심에 에덴 동산을 두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신 것은 사람이 만든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서 였겠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나요?

창세기 127-28절을 보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에이전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질서를 잡아 놓은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대리자(agent)가 되는 것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거죠. 하나님이 주택을 만드시고 그곳을 안식하고 거주하는 집으로 바꾸신 후 그제서야 안식하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믿고 쉬실 수 있었던 거죠. 인간이 하나님의 에이전트로 질서있게 다스릴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온 우주적인 창조를 묘사했다면 창세기 2장에서는 이제 포커스 인, 또는 줌 인하여 아담과 에덴에 집중합니다. 인류가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 에덴에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왜 에덴을 만드셨고 인간은 어떻게 에덴에서 망가지게 될까요? 첫 사람 아담이 에덴에서 무엇을 했는지 먼저 살펴야겠죠? 창세기 28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에덴에 두셨다고 합니다. 15절 말씀은 8절을 보충하며 인간이 에덴에서 해야 할 일을 설명합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15) 여기서  맡아서, 돌보았다는 이 두 동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동사로 아바드가 맡아서로 번역되었고, 샤마르가 돌보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아바드는 원래 일하다(work), 봉사하다(serve), 예배하다(worship), 경작하다(till the ground)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샤마르는 watch over, Keep, protect, take care of 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HALOT 히브리어 사전, 773쪽과 1582).  그런데 이 두 단어 공통적으로 제사장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쓰이는 단어라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을 지키고 관리하며 성전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예배할 때 이 단어들이 쓰이는 겁니다.

뭘 말하는 겁니까? 에덴을 우주의 중심인 성전으로 보고 아담을 그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자 청지기로으로 이해하자는 겁니다. 에덴을 우주의 중심이자 성전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많습니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도 성전으로부터 강이 흐러가는데 에덴도 강들이 흘러나오고 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3.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이었던 에덴은 도대체 무엇때문에 망가지게 된 걸까요?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있었던 두 나무의 의미를 이해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에덴 중앙에 있던 두 나무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죠. 이 나무를  실제 나무로 생각해도 무방하구요. 이건 진짜 있었던 어떤 나무라기보다 신학적인 뜻이 담겨있는 어떤 상징일거야 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중요한 건 나무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에 관한 것들입니다(위의 책 235).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죠. 그리고 생명은 그분에 의해 주어지고 그 분안에서 발견되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 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하면서 동산의 중앙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인 선과 악을 분별하는 나무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세상에 질서를 잡으셨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질서를 분별하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얘기해주죠(잠언 17).

쉬운 말로 해서 선악을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거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인간과 인간이 머무는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선악을 안다는 의미는 인생의 질서를 부여하고 드라이브해갈 지혜를 갖는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도권과 지혜를 스스로 갖기로 마음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더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상태로 전락해 버린 것이죠.

에덴의 중심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놓여 있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합니다. 우리 인류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서 다른 신을 예배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버릴 때 실타래는 완전히 꼬여 버리게 된 겁니다.

 

4.

톰 라이트는 인간이 만들어낸 이 엉클어진 실타래를 가리켜 소명의 실패(abandoning of vocation)”라고 말합니다(N.T. Wright, “혁명이 시작된 날”, 비아토르, 120).

무슨 소명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소명을 주었습니까. 오직 창조주 한 분만을 예배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에덴이라는 성소 안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리마인드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창조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보며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소명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소명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통치의 위임에 대한 부르심이 인간 소명의 두가지 핵심 내용이었던 거죠. 예배와 다스림의 이 두 소명에 대한 실패가 결국 아담의 실패이자 인간의 실패였습니다.

죄란 바로 예배의 실패와 소명의 실패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기로 했습니다. 생명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이죠. 이제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세상의 중심에서 밀어내 버렸습니다. 오히려 악의 세력에게 세상의 주도권을 내어줘 버리죠.

창조세계를 다스릴 책임과 권위를 부여 받은 인간이 자신의 소명을 거꾸로 뒤집어서 창조 세계 내에 있는 힘과 권세들을 숭배하고 충성을 바쳤습니다. 이것을 우상 숭배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양도한 권세와 책임을 양도 받은 악의 세력들은 인간의 소명을 파기해버리고 이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사용한 달콤한 것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돈, 권력, 섹스같은 것들이었죠.

 

5.

여러분 오늘부터 죄에 대한 생각을 고쳐 가지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도덕률(moral code)을 어긴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이것 하지 마라, 이것 해라는 도덕률을 어긴 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인 죄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있지만 그 이상입니다.  인간의 윤리적인 죄 때문에 분노하시며 화를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달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너무나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나타내는 그리스말 하마르티아(hamartia)’표적을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벗어난 상태를 하마르티아, 즉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실패(우상숭배)와 소명의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영광이 엉뚱한 다른 신을 향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야 할 인간이 악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다스릴 권세를 줘버린 것이 소명의 실패이구요.

 

제가 농장을 가꾸는 농부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제가 저희 아들들에게 이 농장을 잘 가꾸라는 명령을 하고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소명을 따르지 않고 깡패를 집에 불러들입니다. 그 깡패에게 집 열쇠도 맡기고 깡패가 하자는대로 다합니다. 그 깡패는 농장의 주도권을 가지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름다웠던 아버지의 농장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농장에 돌아온 저는 원래의 아름다웠던 농장으로 회복시키길 원할 겁니다. 깡패로부터 다시 주도권을 가져와야 하고 질서없이 헝클어진 곳을 원래대로 다 돌려 놓아야겠죠.

 

예수님은 인간이 헝클어 놓은 세상을 창조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악의 세력에게 넘겨준 세상의 주도권을 되돌려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구요. 하나님은 아담 이후에 헝클어진 세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실 때에도 이 두가지를 염두에 두십니다. 예배의 회복과 소명의 회복이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만을 예배하죠. 인간의 실패는 예배의 실패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까? 우리는 아담때부터 시작된 이 예배의 실패를 철저히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가 결국 이 세상을 헝클어 놓은 시작이 되었음을 알기에 우리는 참된 예배의 대상에게 예배 드리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주권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리춸(예식)을 이곳에서 주일마다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인생의 주권을 진짜 주인께 온전히 돌려드리는 주기적인 실천을 하는 것이죠. 훌륭한 극작가이신 하나님은 아름다운 각본을 쓰시고 우리가 연기해야 할 멋진 배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쓰신 각본을 찢어버리고 자기만의 줄거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그게 멋져 보였지만 실상은 엉망진창인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몇이 있냐고 물어볼 때 남편이라는 단어는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인생에 주인이 여러 명이니 니 인생이 엉클어지고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구나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물어보신 겁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요한복음 4:23).” 이 말씀은 단순이 예배가 중요하다는 뜻 이상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질서를 잡는 방법은 참되고 유일한 예배의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도권을 바른 대상에게 드려야 한다는 뜻인 것이죠.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따라갔던 악한 권세들에게서 인간을 돌이키게 하고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서 세상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도록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곧 창조세계의 찬양을 참 하나님이신 창조주께 돌려드리고 창조주의 지혜롭고 사랑 넘치는 청지기직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인간이 이 소명에서 실패하면서 세상은 헝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실마리로 돌아가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실마리로 회복되어지는 꿈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위에 임하는 것이구요. 제가 노트북 하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예 부팅이 안됩니다. 그럴 땐 시동디스크를 연결해 주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의 주도권을 드리지 못할 때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시작이 무엇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릴 때 우리 삶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우리 인생이 무질서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예배의 실패이자 소명의 실패인 것을 기억십시오.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뜻을 이해하고 그분을 온전히 예배하십시오. 하나님 아닌 다른 주인들을 모두 폐기시키십시오. 그럴 때에만 우리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Text: Genesis 2:15-17
Title: Failure of Worship, Failure of Vocation

translated by Wi Chungil

1.
When things don't go as well as they were originally intended, we say we're 'twisted'. It seems like an expression of imagining the threads being convoluted and twisted. So solving a problem in something and making it work out of its original purpose is called "finding a Silmari." A “Silmari” (clue) means "the first head of a wound or tangled thread." People have been thinking about where the world comes from and where it is going,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world. Perhaps you are here to think about the meaning of your life and to find a Silmari (clue) to it. Because we believe that the Bible is a book that can tell us our beginning and our end.

What is the very first word in the Bible that we believe to be the Word of God? The very first word in Genesis, the very first book of the Bible, begins with "in the beginning." In Hebrew, Bereshit is the word. The “Be” is a preposition used before the time and place. “Resht” is a word that means head or beginning. So wouldn't it be reasonable to say that the first words of the Bible begin with a "Silmari (clue)"? Genesis 1 tells us the beginning or clue of this world. God is the one who started this world. God made and liked this world. The world that God created was good. The reason we need to know the beginning is because the key to the solution of all our problems lies in the beginning. The restoration of the world to the way that God made and was good can be said to be salvation. In that sense, the original picture of creation in which God created the whole world and said it was good to see can be the ultimate goal (telos) to which we dream of going back. So, in the Bible, redeem does not mean escape or rescue from this world, but recovery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God's creation is an event in which He found clues and gave order to a world that was in a state of chaos. Creation meant to make disorder orderly. Imagine that you bought a new house. A house where no luggage goes in and no people enter is just called a house. Now, you start putting the stuff in to start life in the newly built house.

1

It's a new house, and the things are all over the place. The person who bought the house cannot rest until the stuffs have been cleared. The state in which the stuff is put in place can be called in order, right? At this point, the house is turned into a home. Only then can the owner rest. Only then can it become a dwelling place and a resting place. It would be reasonable to think that this is the case with God's creation (John H. Walton, The Lost World of Adam and Eve, Kwangnam Kim Translation, New Wave Plus, p81). After God made the earth, created the universe, put man there and rested. He gave order to all things, calmed the chaos, and rested.

2.
In Genesis 2 we see that God placed the Garden of Eden in the center of the world in order. He placed man in the Garden of Eden in order to carry out the purpose for which man was created. So for what purpose did God make man?
Genesis 1:27-28 makes clear the purpose of the creation of man. Man in the image of God has become God's agent over the world with the image of God. That is to say, it is the purpose of the creation of man to be an agent who governs the world that God has arranged in order according to God's will. I told the story of God making a house, turning it into a home where He rested and resided, and then rested. In a way, God believed in man and rested. This is because He expected man to rule in an orderly manner as God's agent.

If Genesis 1 described the whole cosmic creation, Genesis 2 now focuses on Adam and Eden by focus in, or by Zoom in. Genesis 2:8 tells us that God placed a man in Eden. Why did He create Eden and what should humans do in it? Verse 15 supplements verse 8 and explains what man should do in Eden.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 (verse 15) Notice these two verbs here: 'to work and take care of.' The Hebrew verb was translated as "to work" by Abad and Shamar as "to take care of." “Abad” originally meant work, serve, worship, and till the ground. “Shamar” has a variety of meanings: watch over, keep, protect, and take care of (Hebrew Dictionary of HALOT, pages 773 and 1582). It should be noted, however, that these two words are common to the

2

priest when carrying out his or her duties. These words are used when they guard and administer the temple, perform their service duties in the temple, and worship in the temple.
What is it talking about? It means Eden as the center of the universe, the temple, and understand Adam as the priest and steward who administers the temple. God wanted to manifest His presence in the temple and to show through man the will of His creation of this world.

3.
But why did Eden, such a beautiful temple of God, be ruined?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the two trees in the center of the Garden of Eden can solve this problem. The two trees in the center of Eden are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It's safe to think of this tree as a real tree. It's also safe to assume that this is a symbol with a theological meaning rather than some real tree. Because the shape of the trees is not the key. The important thing is that the trees are about God being present in the world. It's also about what we can create in our relationship with God (p. 235 of the book above).

God is the source of life. And life is given by Him and found in Him. The tree of life stood in the center of the garden, symbolizing God. What is the tree that distinguishes between good and evil, which is the other tree? God has ordered and governed the world. The ability to discern that order is wisdom. The Bible is clear that our relationship with Go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and wisdom (Proverbs 1:7).

In simple words, the only person who can know good and evil is God. It is God who gives order to the universe and rules over man and the world in which he dwells. Knowing good and evil would mean having the wisdom to give your life order and drive it. But, the fact that man has eaten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means that he has decided to take the initiative and wisdom of his own life. They have fallen into a state where they no longer need God.

3

It is significant that in the center of Eden lay the tree of life, which symbolized God,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Because the problems of our humanity begin from here. When man crosses the place of this God, worships other gods, and becomes the master of himself, the thread is completely twisted.

4.
Tom Wright refers to this man-made tangled thread as "the failure of vocation" (N.T. Wright, "The Day the Revolution Began," Jihe Lee Translation, Viator, 120).
What vocation is it referred to? What calling has God given to man? He has given us a call to worship only the One Creator. In the sanctuary of Eden, Adam was to worship God.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wisdom that led to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were to remind them of God. Seeing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good and evil, man had to realize that there is a God who gives life and gives order to creation, and his purpose and calling. So the call to worship God and the delegation of authority to rule the world in the image of God were the two core contents of the human calling. The failure of these two vocations, worship and governance, was ultimately Adam's failure and man's failure.
Sin is the failure of worship and the failure of calling.

Man chose to serve creation instead of the Creator. They chose death instead of life. Now that they thought they could discern between good and evil, they pushed God out of the center of the world. Rather, they give the initiative of the world to the forces of evil.

Man, given the responsibility and authority to govern creation, has reversed his calling and worshipped and paid allegiance to the powers within creation. This is called idolatry. The forces of evil, which have been handed over the powers and responsibilities that man has ceded, have done their best to destroy man’s calling and turn this world into hell. The sweet things they used to get their hands on the world were things like money, power, and sex that were very familiar to us.

4

5.
From today, please correct the idea of sin. The Bible speaks of sin as more than a violation of the moral code. Jesus did not die on the cross just because we violated the moral code; don't do this or do this. Of course, there are some things that Jesus took up the cross because of moral sin, but it's more than that. To think that Jesus was sacrificed on the cross to appease God who is angry and unable to control his anger because of man's ethical sins is to diminish Jesus' sacrifice too much. The Greek word hamartia, which means sin, means "to deviate from the mark." The Bible says that man's deviation from God's call is Hamartia, or sin. It is a failure of worship (idolatry) and a failure of calling. It is idolatry that the glory to be given to God is directed at another god who is wrong. It is a failure of the calling that man, who is to rule the whole world in an orderly manner on behalf of God and to manifest the image of God, has given the forces of evil the power to govern himself.

Imagine that I am a farmer who grows a farm. I ordered my sons to take good care of this farm and left for a while. My sons do not follow their father's call and call the thugs into their homes. They leave the keys to the house to the thugs and do what the thugs tells them to do. The thugs take the initiative of the farm and turn it into a mess. My father's beautiful farm was a mess. When I return to the farm, I will want to restore it to the original beautiful farm. I have to take the initiative back from the thugs and put all the unorderly tangles back to the way they were.

Jesus came to earth to restore the world that man had torn apart to the original form of creation. Jesus came to this earth to return God who is the object of worship to his original place and to take back the initiative of the world that man had handed over to the forces of evil. He took up the cross for this. God also has these two things in mind when He called Abraham to restore the world that was torn apart after Adam and when He called the nation of Israel, the descendants of Abraham. It is the restoration of worship and the restoration of calling. So wherever Abraham, Isaac, and Jacob go, they build altars to worship God alone. Because human failure was a failure of worship.

5

Why do we worship here every Sunday? Because we are thoroughly aware of the failure of this worship that began with Adam. Knowing that idolatry has finally become the beginning of the mess of the world, we worship the true object of worship. The “li chu” (ceremony) of giving all our sovereignty back to God is performed here every Sunday. In doing so, we have a periodic practice of fully returning the sovereignty of our lives to our true master. God, a great playwright, wrote a beautiful screenplay and entrusted us with a wonderful role to play. But we've torn apart God's scripts and created our own plots. We saw it as a wonderful place, but in reality it turned into a messy world.

In John 4, when Jesus asks a Samaritan woman how many husbands she has, the word husband means "master." Jesus asked it with the intention saying, "There are many masters in your life, and your life is bound to be tangled and chaotic." "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the Spirit and in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John 4:23)." This is more than highlighting just importance of worship. The way to fix the disorder in our lives is to find the true and unique object of worship. It means that we must give the initiative of our lives to the right one. It tells the Samaritan woman that Jesus came to this earth to turn man away from the evil powers that man considered himself wise and followed him.

Mankind is called to be the likeness of God, to govern the world so that the goodness of God may be manifested. In other words, we are called to return the praise of creation to the Creator, the true God, and to reflect to the world the wise and loving stewardship of the Creator. As man failed in this calling, the world began to become tangled. Returning to this clue, we have to start over. The dream of being restored by this clue is the coming of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upon this earth. I was given a laptop. But it won't boot at all. In that case, I will need to connect the startup disk so that I can go back to the beginning. The same is true of our lives. Every problem in our lives is because we have not met God, the true Master. When we fail to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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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the initiative of our lives, our lives begin to get tangled. When we forget what our beginnings are and the purpose for which He called us, our lives become a mess. Remember that the biggest reason our lives become chaotic is the failure of worship and the failure of our calling. Give the initiative of your life to God even now. Understand the will of God to call you and worship Him fully. Destroy all masters other than God. Only then can we restore the true meaning and purpose of our lives.

Posted by speramus

본문 : 시편 113:1-3 / 삼상 30:17-25

제목 : 한 식구(食口) “one family”

 

1.

좋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는데 추석들 잘 보내셨나요? 저는 미국에 온지 3년 정도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추석이 되면 고향집도 생각나고, 송편도 먹고 싶고 가족들이 많이 보고싶더라구요. 같이 한 밥상에 둘러 먹고 슬픔과 기쁨을 나누었던 식구들이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더 보고싶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교회 공동체가 있어서 우리에게는 이역만리 타향살이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를 사교단체라 하지 않고 가족과 같은 공동체라합니다. 여러 모로 교회는 가족 공동체를 닮았기 때문이죠.

시편 133편은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 형제가 하나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공동체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오늘은 133편의 타이틀인 “다윗의 시”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33편은 다윗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삶의 스토리와 경험 안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라고 고백했을까요? 사무엘상 30장의 스토리를 통해 시편 133편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언약 공동체로 세우셨죠. 언약 공동체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복을 받는 대신 하나님의 복을 모든 민족에게 흘러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으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델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 부르심을 너무나 잘 이해했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목동으로 들에 있을 때부터 그를 주목했고 왕으로 미리 기름부으셨습니다. 그는 사울을 대신해서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해야 할 지 꿈궜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과 소망과 정 반대로 사울에 의해 광야로 내 몰려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 때 부터 오히려 하나님은 도망자 다윗에게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끌어 보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들을 떠돌아다니며 공동체를 이끌면서 하나님이 주인 되는 나라를 실험합니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아둘람 동굴에 피신해 있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이 나옵니다. 

“1   다윗은 거기에서 떠나, 아둘람 굴 속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형들과 온 집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다.

2   그들뿐만이 아니라,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삼무엘상22:1-2)

 

자기 자신도 쫓겨 다니는 도망자인데 사백여 명의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다윗의 부담감은 엄청났을 겁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빚 때문에 파산을 당한 사람들, 억울한 재판을 받아서 원망이 가득한 사람들,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아 왕따가 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죠. 여러분 이런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해 적대적이고 공격적입니다. 남을 자꾸 찌릅니다. 이런 거친 사람들을 이끌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또한 400명의 식솔들의 배를 채우는 일도 만만찮았겠죠.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인 사무엘상 30장에는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병사들만 600명이 나오는 것 보니 그 사이에 다윗의 공동체는 몇 배로 사람이 늘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공동체가 매력적이었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들을 데리고 사울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윗은 아예 성읍을 하나 잡아서 정착을 하기로 마음 먹죠.  

 

5   다윗이 아기스에게 간청하였다. "임금님이 나를 좋게 보신다면, 지방 성읍들 가운데서 하나를 나에게 주셔서, 내가 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이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함께,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

6   그러자 아기스는 그 날 당장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래서 시글락이 이 날까지 유다 왕들의 소유가 되었다. (사무엘상 27장 5-6절)

 

다윗은 블레셋 땅인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에게 성읍을 하나 달라고 부탁을 하죠. 블레셋이 어떤 민족입니까? 다윗에 의해 죽은 골리앗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에 찾아 들어간 다윗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기스 왕은 다윗과 그의 수백명의 식솔들을 받아 줍니다. 이렇게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던 다윗 공동체는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하지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서 다윗의 입장이 난처하게 됩니다.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블레셋을 도와 동족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지 블레셋의 장군들은 다윗이 원수인데 그를 데리고 전쟁에 나갈 수 없다고 아기스 왕을 압박합니다. 결국 다윗의 군대는 툇자를 맞고 시글락성으로 사흘길을 달려 돌아왔습니다.

 

3. 

오늘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윗과 600명의 군인들이 시글락 성에 돌아온 후부터 입니다. 블레셋과 다른 민족인 아말렉이라는 민족이 이스라엘 남부 지역을 약탈하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군인들이 북쪽에 참전해 있는 틈을 타서 시글락성을 공격합니다. 성을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까지 모두 포로로 잡아 끌고 가버렸습니다. 다윗이 돌아와서 불타 없어진 시글락 성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목놓아 함께 울었는데 더 이상 울 힘이 없이 지칠 때까지 울었다고 말해 줍니다. 삼상 30장 6절은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6절- “군인들이 저마다 아들딸들을 잃고 마음이 아파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할 정도였으니,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솔직히 다윗이 뭔 잘못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속죄양(scapegoat)을 찾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 곤경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겨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하나님은 아말렉군대를 쫓아가라고 하십니다. 다윗의 공동체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은 철저히 그의 공동체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그들의 가족들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셨기 때문이죠. 다윗은 이틀 동안 아말렉 군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족들과 전리품들을 가지고 시글락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말렉을 뒤쫓기 위해 600명의 군인들이 함께 갔었는데 그들은 이미 먼 길을 이동해 온 상태였고 또 이동하여 싸우려니 낙오자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200명의 군인들이 낙오해 버립니다. 도저히 못 가겠으니 당신들이 가서 우리 대신 싸우고 오라고 합니다. 다윗의 군대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죽더라도 함께 죽자라는 기세로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힘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200명은 브솔 시냇가에서 나머지 400명의 군인들이 싸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쉬고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족들을 구하여 돌아오는 것을 브솔시내의 낙오자들은 볼 수 있었죠. 그들은 너무나 기뻐하며 다윗과 동료 군인들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돌아온 400명들의 눈에 200명의 낙오자들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밉상이죠. 자기네들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틀 동안 싸우고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웃으면서 달려오는 그들이 꼴 보기 싫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그들과 달리 지도자 다윗은 낙오자들에게 따뜻하게 문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전리품까지 그들과 동등하게 나누자고 합니다.

 

출전했던 400명의 군인들 중에 악하고 야비한 사람 몇이 다윗을 따로 부릅니다. “대장님 저 사람들 한 게 하나도 없는데 설마 저 인간들에게 전리품들을 나눠줄 생각이십니까?”,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신 거죠? 그냥 아내와 자식들만 데려가게 하고 저희들이 싸워서 얻어온 전리품은 저런 인간들에게 주시면 안됩니다. 아시겠어요?”라고 했겠죠. 이것보다 더 우락부락 달려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여기서 그의 나라에서 세워질 놀라운 원칙을 세웁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나누며 누리자는 법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도 전리품도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선물로 준 것을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 되겠나? 전쟁에 나간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한다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여야 하는 거야.”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에서는 이것은 중요한 법률 규정이 되어 내려왔습니다. 다윗 왕국은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통치 아래 평등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꿈이었습니다. 

 

4.

다윗은 그가 다스릴 나라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길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가치들이 드러나는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나눔과 받아들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다윗이 말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뜬구름 잡는 허황된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받아들임과 나눔을 통해 언약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사회의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였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용납과 나눔은 하나되는 방법이자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사건만 보더라도 다윗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란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죠. 다윗은 전쟁의 승리도 전리품도 모두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받은 것을 나누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죠. 다윗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받아들임과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과 나눔을 통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다윗은 체험했고 즐거워했습니다. 

 

받아들임을 생각할 때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이신 김응교 시인께서 ‘깍두기’에 대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옛날 동네에서 편을 갈라 놀이를 하면 자기와 실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아이들이 홀수 숫자일 때 편을 가르고 나면 꼭 한 명이 남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아이는 그 중에 가장 실력이 떨어진 친구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도 매번 깍두기였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를 “깍두기”라고 해서 더 못하는 팀에서 데려갑니다. 김응교 시인께서 하시는 말이 이 깍두기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나누지만 패배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깍두기, 니가 못해서 우리가 졌다고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각박한 세상이 되어버렸고 깍두기를 “왕따”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릅니다. 세상에서 왕따로 살아가는 인생들이 교회에서라도 깍두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호의(favor)가 교회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본적인 공기는 받아들임과 나눔이어야 합니다. 

 

5.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를 ’식구’로 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족은 씨족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같은 성씨를 갖고 한 피 받아 살아가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식구는 조금 더 넓은 개념입니다. 식구를 한자로 쓰면 밥식(食)에 입구(口)자를 씁니다. 함께 밥상을 나누는 사이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말의 Community와 성찬 떡과 포도 뜻하는 Communion은 거의 비슷한 단어이죠. 성찬을 함께 떼는 사이,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눠 먹는 사이를 우리는 Community라 부릅니다. 한 밥상 아래 모인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 먹는 사이이기 때문에 한 형제이자 한 식구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드립니다. 주기도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가 아니죠. ‘우리’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 아래 자녀된 공동체입니다. 아버지가 같으니 자연스레 우리는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어릴 적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희 가족은 12식구가 상 두개에 나눠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고 있다보면 꼭 동네 어떤 어르신이 놀러 오십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식사하셨어요?”, “얼른 오셔서 밥 한 술 뜨세요”라고 말하며 어떤 이든 밥상으로 초대하곤 하셨습니다. 그를 손님이 아니라 식구로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둥그런 밥상에 앉아 있노라면 어떤 이도 식구가 되어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차려 주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찬을 나누는 밥상 공동체입니다. 여기 오는 누구든 환영 받아야 합니다. 여기 오는 누구든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 존중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지 한 달이 됐든 몇 년이 됐든 모두가 한 식구이긴 매 한가지 입니다. 다하나 교회에 새로 온 목사인 저는 여러분의 형제인가요? 이 교회에 나온지 한 두 달 또는 1년이 채 안된 새 가족들은 여러분의 형제이자 자매인가요? 

 

다윗의 광야 공동체처럼 우리 모두는 광야같은 세상 속 한 가운데서 공동체로 모입니다. 광야란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독한 곳을 말합니다. 광야란 끈 떨어진 연처럼 외로운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광야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한 식구로 모이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공동체를 광야에서부터 실험하고 실천하였듯이 우리도 먼 미래에 이뤄질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 위에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먼저 은혜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도록 나눔과 받아들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6.

여러분에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에서 만나는 형제 자매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의미입니까? 한 피 받아 한 몸이룬 형제이고 성찬을 함께 나누는 한 식구인가? 그가 만약 나에게 형제와 자매이자 한 식구라면 그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닌가요? 왜 그렇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이 너무 이상해서 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약해서 그럴까요?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뀐 후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시나요? 혹시 나에게 은혜가 부족해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숨쉬고 움직이고 지금 이곳에 있는 것 자체도 은혜입니다. 저의 큰 아들은 기도하라고 하면 꼭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살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 모두 오래 오래 살게 해주세요.” 너무 웃기잖습니까? 이녀석 6살에 아빠가 암수술을 받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험을 하고 나서 이 아이에게 생명이란 매우 실존적인 문제가 되어버린겁니다. 그에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죽음 앞에 서본 사람은 이 살아 있음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것인지 알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옆에 있는 형제 때문에 내가 혼자가 아니란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있음으로 나는 하나님을 더듬어 알아가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있음으로 나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잖아요. 매주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한 가족으로, 한 식구로 이곳에 모여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리터지를 반복할 겁니다. 매주 만남을 통해 한 식구가 되도록 시도해 보는 겁니다. 목장 모임도 그런 의미에서 반복적인 리터지가 되어야 합니다. 정기적인 목장 모임은 우리에게 한 식구로 형성되어 가도록 돕는 리터지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에서 우리로 살아가는 리터지 속으로 우리를 집어 넣는 거죠.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받아들임과 용납 그리고 나눔의 실천은 은혜 받은 자가 마땅히 취해야할 삶의 태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나눔과 용납이 교회의 공기가 되어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오면 숨통이 트이고 살아갈 맛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하나교회가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Scripture: Psalm 113:1-3 / 1 Samuel 30:17-25
Title: One Family

번역: 박지한 군

1.
May the grace and peace of our good Father God be with you all. Have you been at peace over
the past week? Did you have a good Chuseok? There is a saying, “No more, no less, just like
Chuseok.” It's only been about 3 years since I've been to the US, so on Chuseok, I think of my
hometown. I want to eat Korean rice cake, and I miss my family a lot. I miss seeing my family
members, eating around the same table and sharing sorrow and joy on holidays like Chuseok.

Still, there is a church community, so we receive great comfort from living abroad. The church is
not a social organization, but a family-like community. Because in many ways the church
resembles a family community.
As I said last week in Psalm 133, a community in which brothers and sisters are united is a
community that God is pleased with and wants. Today, we would like t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re is a passage called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the title of the 133th volume.
Psalm 133 is the story of David's life. In what life story and experience did David confess, “How
good and beautiful it is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in unity”? Let's dive into the story of David.

2.
God wanted to establish the kingdom of God on this earth through a community, not just one
person. So, he made a covenant with the nation of Israel and established them as a covenant
community. Covenant community means a nation that has made a covenant with God. God
promised blessings to Israel, and Israel promised to send God's blessings to all nations in

exchange for receiving those blessings. As a covenant people, Israel had to show the world a
beautiful model of the community.

David was a leader who understood this calling all too well. He has loved God since he was a
shepherd tending sheep in the empty fields. God paid attention to David from the time he was
in the field as a shepherd and anointed him as king. He dreamed of how to rule Israel in God's
name when he ascended to the throne in Saul's place. However, contrary to his dreams and
hopes, he is driven into the wilderness by his son-in-law and is driven away as a fugitive.
God trains the fugitive David to lead the community in the wilderness. He wanders through the
wilderness of Israel, leading a community, experimenting with the kingdom of God. In 1 Samuel
22, there is a scene where people flock to David, who is taking refuge in the cave of Adullam.
“David left Gath and escaped to the cave of Adullam. When his brothers and his father’s
household heard about it, they went down to him there.

2 All those who were in distress or in
debt or discontented gathered around him, and he became their commander. About four
hundred men were with him.” (1 Samuel 22:1-2)

David himself was a fugitive, and the burden of taking care of four hundred people must have
been enormous. And the people who came to him were not all normal people. They were
people who had gone bankrupt because of debt, people who were full of resentment because
of unfair trials, and people who had been discriminated against and bullied by people flocked to
David. People who have such scars and pain are generally hostile and aggressive towards
others. They continually hurt others. It would not have been an easy task to lead these rough
people and create a community.

Also, it must have been difficult to fill the stomachs of 400 people. In 1 Samuel 30, a story a few
years later, there are 600 soldiers who can go out for battle, meaning that the number of
people in David’s community grew significantly. This wouldn’t have happened unless the
community seemed very appealing. It must not have been easy for David to take them and live
as a fugitive from Saul. So David decides to find a town and settle down.

5 Then David said to Achish,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let a place be assigned to me in
one of the country towns, that I may live there. Why should your servant live in the royal city
with you?”
6 So on that day Achish gave him Ziklag, and it has belonged to the kings of Judah ever since.

David flees to King Achish of Gath, the land of the Philistines. Then he asks King Achish to give
him a city. But who are the Philistines? Their warrior, Goliath, was killed by David. So we can
see how urgent David's situation was when he went to the Philistines, who were Israel’s
enemies.

But strangely, King Achish accepts David and his hundreds of people, so the Davidic community
settle down and live there. However, as a war breaks out between the Philistines and Israel,
David's position becomes complicated. David volunteers to help the Philistines in war against
their fellow Israelites in order to survive. It was only then that the Philistine generals came to
their senses and pressured King Achish, saying that David cannot go to war. In the end, David's
army returned after three days' journey, back to Ziklag.

3.
Today's main story begins after David and the 600 soldiers returned to Ziklag. The Amalekites,
another group of people, were looting and roaming the southern part of Israel. They attack the
city of Ziklag, taking advantage of David and his soldiers still returning from the north. They
broke into the castle and set fire to it, and captured women, children, and even the elderly.
How did David feel when he saw the burned down city of Ziklag? The Bible tells us that David
and his men wept together and wept until they had no more strength to weep. 1 Samuel 30:6
says that David's men rushed to kill him, blaming him for the deaths.

6 "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because the men were talking of stoning him; each one was
bitter in spirit because of his sons and daughters.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But did David really do anything wrong? Still, people tend to seek out a scapegoat. David
overcomes this predicament by relying on God. David asks God what to do, and God tells him to
follow the Amalekites. As a God-centered community, the Davidic community follows David
into battle, and they defeat the Amalekites in two days and return to Ziklag with all their family
and loot. Not a single person was hurt because God protected them, and they found out that
the more they depended on God, the more he provided and protected for their community.

But before this victory, there was an incident. 600 soldiers pursued the Amalek, but only 400
went into battle. 200 were left behind as they had already come a long way and were
exhausted. They said to the others to go and fight for us, as we can’t travel any more. Here we
see the level of David’s army. Even if they rushed in with a “if we die, we die together”
mentality, their odds of victory are slim. Leaving 200 soldiers behind weakens their chances

even more. Regardless, 200 men rested by the brook of Besor, waiting for the other 400
soldiers to return from the battle. After two days, David defeated all the Amalekites, rescued
his family, and returned to the resting soldiers at the brook of Besor, who were overjoyed and
welcome David and his soldiers.

But what did the 200 resting soldiers look like in the eyes of the 400 who returned from
fighting? They despised them. They had risked their lives to fight the last two days, coming back
exhausted only to see the resting soldiers running to them and laughing. However, unlike them,
their leader David warmly greeted those who have fallen behind, even declaring to share the
loot equally with them.

Of the 400 men who fought, some wicked and mean men called David aside. “Leader, these
people haven’t done anything, you aren’t possibly planning on sharing our loot with them? Just
let them take their wives and children, and don't give them the loot we got from our fights,”
the men probably said. David establishes here a marvelous principle that will be established in
his kingdom. It was a law for everyone to share and enjoy. David makes this confession. “The
victories and spoils of war are the gifts the Lord has given us. The share of those who went to
war and the share of those who remained and protected things; it should be the same.
Everyone must share it equally.” In Israel after David, this has been an important legal
regulation. The kingdom of David had a different calling from the rest of the world. It was a
dream for all to enjoy equality and live in peace under the Lord's rule.

4.
David hoped that the kingdom he would rule would be a kingdom governed by God's statutes
and ordinances. He knew that where God's disposition and values are revered, God's rule is
there. Where there is sharing and acceptance, God’s kingdom will come.

What kind of church can we imagine through David's story of community? David's "life in which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was not a dream that was floating around. He actually created a
covenant community through acceptance and sharing. He accepted those who were driven into
the corners of Jewish society as brothers, and practiced a life of sharing with them. Acceptance
and sharing were the way to become one and the way to love.

Looking at today's events, David was a man who knew what grace was. We know all too well
that grace is something that even those who don’t deserve, receive. David acknowledged that
both the victory and the spoils of war were God's free grace. Because he received it for free, he
did not hesitate to share. David practiced acceptance and sharing based on the grace of God
that he received. And through that acceptance and sharing, David experienced and rejoiced
how great the joy was of having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When I think of acceptance, the words of Poet Kim Eung-gyo,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at
Sookmyung Women's University, come to mind. When we were young, we split up sides to play
a game, with children with similar skills playing rock, paper, scissors. When there are an odd
number of children after splitting the sides, there is always one left. The last child left was the
least skilled of them all. When I was young, I was always the kkakdugi (the odd one out). The
“Kakdugi” would go on the worse team. Poet Kim Eung-kyo says that this kkakdugi shares the

joy of victory, but does not take responsibility for defeat. It means that even if we lost, you can
never blame the Kkadugi. However, the world we live in has become a harsh, and we’ve
changed the name of kkakdugi to “being bullied”. We need to create a warm community so
that people who live with bullying in the world can live as a kkakdugi at church. We should
strive to ensure that the grace and favor we have received flows to all who come to church.
The atmosphere of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be accepting and sharing.

5.
In that sense, I like to call the church a “family”. Kin is a word that emphasizes the meaning of
living with the same surname and blood. However, family is a slightly broader concept. If you
write “family (sik-ku)” in Chinese characters, it spells “meal (sik)” and “mouth (ku).” It means
sharing a meal together. The words “community” and “communion” are almost identical. The
time we partake in communion, sharing the body of Christ together, is called Community. We
are people brought together by one meal. All of us gathered in the church are brothers and
sisters. We pray the Lord’s Prayer. The first verse begins like this: “Our Father in heaven.” Not
my father, He is called ‘our father’. We are a community of children under one father. Since we
have the same father, we are naturally brothers and sisters.

It reminds me of when I was young, sitting around a round table and eating. As a family of 12,
we all shared a meal on two tables. While eating, an old man from the neighborhood always
stops by. Then my mother would say, “Have you eaten?” and “Come and eat,” inviting anyone
else that stopped by. She thought of them as a family member, not a guest. Anyone who sat at
the round table became a member of the family.

The church is a “table community” where we share communion, prepared by God. Anyone who
comes here should be welcome. Anyone who comes here should be respected as a brother or
sister. Whether it's been a month or a few years since joining the church, we are all a part of
the same family. As a new pastor to Dahana Church, am I your brother? Are the new members
of this church, whether it’s been less than a month or almost a year, your brothers and sisters?

Like David's community in the wilderness, we all gather as a community in the middle of a
wilderness world . The wilderness is a lonely place where no one can help. The wilderness is a
lonely life like a kite that has fallen off a string. We are gathering as one family in the middle of
such a wilderness world. Just as David experimented and practiced his community in the
wilderness before he ascended to the throne, we are also building the kingdom of God on this
earth through the church in anticipation of the kingdom of God to be established in the distant
future. First, as those who received grace, we are practicing sharing and accepting so that God's
love and grace can flow through us to others.

However, sharing and accepting is not so easy. For it is essential to deny oneself in order to
accept the other. It is not easy for strong people to accept others. The Chinese character for “I
(我)” is a combination of “hand (手)” and sword (戈). The character “I” looks like and represents
an image of a hand holding a sword, protecting oneself. A strong ego refers to the standard one

has, in other words, a person with strong self-righteousness. The Pharisees were so self-
righteous that it was difficult for them to accept others. On the contrary, Jesus accepted

everyone without imposing his standards on them. When people to Jesus, they felt accepted
and at ease.

If we are to accept others, we must not impose our standards on others. I owe 10,000 talents. I
have been forgiven of all that debt, and I am a person who has received grace. That is why I can
tolerate and accept a brother who owes me only 1 denarius.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must be loved equally by all under grace. Any sinner or any kind of person who comes here
should be accepted and welcomed. Everyone is a brother and sister here, regardless of his
status, background, or merit. Jesus Christ embraced everyone, despite being mocked as a friend
of sinners and tax collectors. He was also nicknamed a drunkard and still tried to accept
everyone. Wherever Jesus was, a table community was formed. He created a miracle from 2
fish and 5 breads, feeding thousands of people on an empty field, and even after he died on the
cross, he went to Galilee to prepare breakfast for his disciples. Jesus accepted anyone as a
member of the family and wanted to share with everyone.

We hope that Dahana Church will become a friend to many lonely people in Rochester as a
family that shares the body of Jesus. We hope that we will be filled with the grace that God
pours out, and that grace will flow through us and flow to those who need love. Like David's
community, where many people came to enjoy a rest in the wilderness, I hope that Dahana
Church will become a community of love and sharing.

Posted by speramus

본문: 시편 133편 1-3절

제목: 우리는 다 하나

 

1.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이 다하나교회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6월 둘째 주에 이곳에 와서 인사 드리고 거의 3개월만에 여러분 앞에 섭니다. 저와 저희 가정과 그리고 다하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놀랍고 세밀함을 믿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아름다운 교회의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저희 가정은 이곳까지 기쁘게 건너왔습니다.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왔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성전을 향해 순례길을 떠나듯 그런 마음으로 순례길을 잘 마치고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동안 익숙했던 목사님을 떠나보내고 낯설고 익숙치 않은 저와 함께 교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처럼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즐기며 출발선상에 서 있는 듯 합니다. 과연 우리 앞에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우리는 어떤 모습의 교회로 나아가게 될까요? 

본문 시편 133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우리 앞에 펼쳐질 이야기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여러분의 성경에 시편 133편 맨 앞에 제목이 붙어 있죠.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구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는 시편은 120편부터 134편까지 총 15편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명절이 되면 각자 흩어졌던 곳에서부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성전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오르막 길에 접어듭니다. 왜냐면 예루살렘은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면서 어렴풋이 보이는 성전을 바라보며 유대인들은 시편의 이 노래들을 부르며 고된 순례길을 달랬습니다. 이 노래들은 그들의 힘든 순례길을 위로해 주기도 했고 자신들이 이 여행을 하는 목적들을 상기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필그림들의 노래였던 겁니다.

시편 133편은 그런 노래들 중에 하나였죠. 그러니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성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유대 공동체를 묶어주는 노래였습니다. 다른 말로 이런 노래들을 부르며 자신들을 공동체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콜링을 확인고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봅니다. 본문은 세 절로 된 짧은 시입니다. 그 첫 시작을 “보라, Behold”라는 짧은 감탄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 치면 “얼씨구나, 지화자” 이런 추임새 같은 겁니다. 뒤에 있는 내용이 얼마나 좋은지를 강조하는 거죠.

1절-“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공동체가 하나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고 행복한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Unity, 연합은 좋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좋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 말은 ‘토브(Tov)’이구요 아름답다는 ‘나임(naim)’입니다. 토브는 창세기 1장에 많이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고 할 때 토브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나임이란 말은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형제들이 함께 거주하고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1절에서 명확하게 제시해 줍니다.

 

2절과 3절은 연합의 결과물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줍니다. 2가지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연합과 연대의 결과물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상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2절은 아론 자손들이 제사장으로서 위임식을 받을 때를 상상해야 합니다. 제사장을 위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내려 가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3절의 초반부에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헐몬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높은 산입니다. 이 헐몬에서 눈이 녹아 물이 되어 남쪽으로 흘러 갈릴리 호수로 들어가고 메마른 땅을 적십니다. 제가 직접 헐몬산 밑에 계곡을 가보니 정말 물이 힘있게 흘러 내려오고 있더라구요. 살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라 상상하시는게 맞을 것 같아요. 그만큼 연합과 하나됨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2절 3절 둘 다 위로부터 좋은 것들이 아래로 내려 온다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좋은 것들이 아래로 흘러 내려, 아래에 있는 이들도 풍성하게 좋은 것들을 같이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3절의 후반부에서는 그들이 하나되어 누리는 축복의 본질이 영생이라고 말해줍니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히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유니티의 열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과 복의 궁극적인 모습이 하나됨이요 연합이라는 겁니다. 형제가 연합하는 것은 그냥 좋고 행복한 정도를 넘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궁극적인 목적이자 비전이라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형제가 함께 거하고 연합하는 삶의 방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3. 

이 시편 133편은 우리가 매 주일 이곳 성전에 모일 때마다 기억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 있다 주일에 한 번 이곳에 모이면서 우리가 순례자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 모였고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서 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명절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향한 순례길에 이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부르심을 반복해서 기억했을 겁니다. 우리는 제사장 나라다. 우리들의 유니티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영생의 복이 흘러갈 것이다. 다하나교회 교우들 또한 이 성전에 모일 때마다 이 부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 포인트에서 교회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여러 조직과 구분되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다른 조직에는 없는데 교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부르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유니티, 하나됨, 연합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교회는 정말 이상한 곳입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죽도록 일하고도 아직 무슨 힘이 남았는지 교회로 모여듭니다. 그리고 교회에만 오면 사람들이 생기가 솟아 오릅니다. 죽을 맛이었던 사람들도 이곳에만 오면 살맛을 되찾아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이요 형제 자매들의 사랑을 몸소 맛보니 인생이 살맛 나게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후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시기에 심히 좋다는 표현이 본문 1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거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고자 하는 창조의 원래 모습이 바로 형제가 함께 연합하고 사랑하여 만들어지는 공동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부르심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장 34-35절)”

 

4.

그냥 혼자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되나? 이 사람 저사람 연결되어 유난 떨 필요 있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연결되야 하고 연합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란 본디 서로 의지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서로 의지하라고 여자를 만드셨잖아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자의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서로 기대는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길은 인간됨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서로 서로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뒷통수를 보실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의 뒷모습이 어떤 지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있으신가요? 여기 안과 의사 선생님도 계시지만 왜 사람의 눈이 앞에만 달려있는 줄 아십니까? 눈이 앞뒤에 달린 존재를 그리스 신화에서는 야누스라고 부르죠. 사람이 야누스가 아닌 이유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대단히 철학적인 아젠다입니다. 나는 나를 완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들은 봅니다. 누군가의 말에 경청할 때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들과 손 잡을 때 우리의 존재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연합되어질 때 온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인간됨을 확인하고 참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형제 자매들의 연합의 장입니다.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장소인 것이죠. 형제 자매와의 연합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들고자 하셨던 세상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서 미리 맛보게 해주는 독특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형제 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여 하나되는 것입니다. 

‘다하나(one heart)’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잘 지은 것 같습니다. ‘다 하나’ 그 이름 안에 천국이 녹아 있습니다. 우리 다하나 교회는 적어도 이 로체스터 안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만큼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하고, unity를 만들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야만 우리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를 통해 만들어진 사랑의 결과물들이 우리 이웃들에게 폭포수처럼 흘러가게 되는 겁니다. 

 

5. 

예부터 어르신들은 ‘내리 사랑’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내려 간다는 것입니다. 전자(electricity)의 값이 높은 데서부터 낮은 데로 흐르듯,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사랑도 많은 곳에서부터 적은 곳으로 흐릅니다. 마치 제사장에게 부은 기름이 그의 머리를 타고 수염을 타고 그의 옷깃을 젹서 흘러 내려 가듯, 사랑은 풍성한 사람들에게서 부족한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헐몬산 위의 눈이 봄 햇살에 녹아 메마른 땅을 적시며 흘러 내리듯, 우리들의 사랑도 메마르고 상처 받은 이들의 갈라진 마음을 채우며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다 하나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 중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는 진리는 물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물은 어떻습니까?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립니다. 물은 가로 막는 장애물이 있으면 부러뜨리는 대신 감싸 안으며 돌아서 부드럽게 흘러갑니다. 물은 파인 구멍이나 갈라진 곳을 채워 메꾸면서 흘러내려 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바로 이 물과 같습니다. 세상의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물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내리 사랑인 것이죠. 

 

교회는 아둘람 굴에 모인 다윗의 공동체처럼 찢기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온전한 사람들은 교회 오기 쉽지 않습니다. 아쉬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 사랑은 물론이고 형제 자매들의 사랑의 돌봄으로 채워지는 것을 맛보는 것이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은 물처럼 흘러 서로의 상한 마음을 적시고, 갈라지고 찢겨진 마음을 메꿉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 사랑은 흘러가고 내리 사랑의 선순환은 계속 되어집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배움과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 입니다.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목사님 오셔서 성경공부 좀 하면 내 신앙이 성장하고 변화되겠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로 사람이 변한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교회 때문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이 사람을 세웁니다. 사랑이 우리를 완전하게 합니다.

 

6.

제리 멕과이어라는 영화를 보신 적 있나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 봐도 감동입니다. 스포츠 에이전트인 제리가 우여곡절 끝에 대박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고 꿈꿔왔던 성공을 이뤘는데 그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걸 느꼈습니다. 그는 곧장 사이가 이미 멀어져서 서먹해진 여자친구에게 달려 가죠. 그리고 과부 모임에 섞여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두고 제리가 하는 대사입니다. “우리 회사가 오늘 엄청난 계약을 만들어 냈고 대박 쳤어. But it wasn’t complete… we live in cynical world, cynical world. … I love you. You complete me.” 

 

여러분 우리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무슨 대단한 프로젝트를 이뤄내고, 엄청난 성경지식을 배우고, 교인들로 가득차서 성장한 교회를 꿈꾸고 있나요? 제리의 고백처럼 우리가 그런 것들을 모두 이뤄내고 성취한다해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허전할 겁니다. 왜냐면 우리 가슴 한 켠에는 사랑으로만 채워질 공간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슬비처럼 작지만 꾸준히 내리는 성도 간의 사랑이 우리를 채워줄 것이고 우리를 변화시킬 겁니다. 다하나교회의 방향성을 오늘 말씀 가운데 찾는다면 다 하나되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제 막 이곳에 건너 오신 분도 계시고, 미국에 20년 또는 30년 넘게 살아 오신 분도 계십니다. 많이 배운 분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공화당 지지자도 계시고 민주당 지지자도 계십니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그 사람이 없이 나의 존재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하는 참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 더 견고히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를 통해 만들어진 선하고 기름진 것들이 우리들의 이웃들 가운데로 흘러가게 됩니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어요 라는 생각을 잊지 마시고 옆에 있는 형제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다하나교회의 형제 자매들이 만들어갈 아름다운 하나됨의 이야기를 우리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 놀라운 일들이 앞으로 우리 교회를 통해 이뤄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ext: Psalm 133:1-3
Title: We are all One

번역: 김명하 형제

1.
May the grace and peace of God the Father be with all of the members of Dahana
Church. I came here in the second week of June to say hello and now I stand in
front of you after almost 3 months. I believe that God's plan for me, my family, and
Dahana Church is amazing and detailed. My family and I moved over here looking
forward to beautiful stories of the church that we will create together in the future.
We crossed over the mountains and waters to get here. There was an anticipation of
what awaited in the new place, but it also made me nervous.

It may seem a little unfamiliar and awkward for all of you too as you had to send
away the pastor you were accustomed to and be with a new pastor you have little
to no experience with. It feels like you and I are at the starting line of a journey,
simultaneously feeling the tension and excitement like travelers traveling to a place
they have never been to. With excitement, I want to ask you, what kind of stories
will unfold before us? and what kind of church will we move progress to?

Through today’s message of Psalm 133, I believe we can get a hint of what God’s
guidance may be for us.

2.
If you look into your Bible, there is a title at the beginning of Psalm 133 which is “A
psalm of David, Songs of Ascents.”

There are a total of 15 Psalms, from Psalms 120 to 134, entitled “Songs of Ascents.”
During the great festival, the Jews gathered from their scattered places in Jerusalem,
where the temple was located. The pilgrims heading for the temple go uphill as they
get closer to Jerusalem. Jerusalem, located around the Judean wilderness, was
located in a high mountain area. As they climbed toward the distant Jerusalem,

2
looking at the looming temple, the Jews sang these Psalms and continued their
arduous pilgrimage. These songs comforted them on their arduous pilgrimage and
also reminded them of the purpose of their journey.

Psalm 133 was one of those songs. So, ‘Songs of Ascents’ were songs that united
the Jewish community as they should be surrounding the temple. In other words,
they sang these songs to confirm the will and calling of God who called them as a
community and did not lose their identity.

Let's take a closer look at the text. The text is a short poem in three verses. It begins
with a short exclamation of “Behold”. In our language, it's like interjections that
instigate high spirits which are called, “Chuimsae” in Korea.

Verse 1 -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Here, brothers do not mean just men, think of it as a community. It expresses how
beautiful and happy it is to see a community living together as one.

Unity is a good and beautiful thing.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good’ is ‘Tov’
and ‘Naim’ is ‘Pleasant’. Tov appears a lot in Genesis 1, and the word Tov is used
when God created the world and said: “it was good”. The word Naim is an
expression of joy and happiness. Verse 1 makes it clear that it is a very happy life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and live as a community.

Verses 2 and 3 express the result of unity. Two direct analogies make you imagine
how amazing the fruits of unity and solidarity can be.

Verse 2 imagines the time when the descendants of Aaron received the ordination
ceremony as priests. Oil is anointed on the head when delegating priests. It makes
you imagine the oil flowing from the hair to the beard and down the collar.

3
At the beginning of verse 3, a name of place appears, Hermon, which is a high
mountain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Israel. From Hermon the snow melts and
becomes water, flowing southward into the Sea of Galilee and watering the parched
land. When I went directly to the valley below Mount Hermon, the water was
flowing down strong. It was not flowing like a gentle river, but more like a powerful
waterfall. Likewise, coming together in unity has power.

We can see that verses 2 and 3 both portray the image of good things flowing
down from above to below. It means that good things come from above so that
those below also enjoy abundantly good things.

The second half of verse 3 tells us that the essence of the blessing the people enjoy
in unity is eternal life. Eternal life literally signifies eternal life. A life with abundant
blessings eternally is a fruit of Unity. In other words, the ultimate form of salvation
and blessing that God wants to give is coming together in unity. It should be noted
that the unity of brothers and sisters is not just good and joyful, but also represent
the ultimate purpose and vision of the kingdom of God. The way of living together
in unity is none other than the way of life of the people of God.

3.
Psalm 133 is a message we must remember every week when we gather here in the
temple. We remember that we are pilgrims as we gather here once a week from our
respective places of life. We come together for a special purpose, and we come
together for a special calling. The Israelites must have remembered their calling over
and over again, singing this song on their pilgrimage to the temple in Jerusalem
every year on the feast day. We are a kingdom of priests. Through our Unity, the
blessing of eternal life will flow to all peoples of the world. The members of the
Dahana Church must also remember this calling whenever they gather in this
temple.

4
I find the essence of the church at this point. What distinguishes the church from
other organizations in the world? What is the unique calling that exists only in the
Church, which is not found in any other organization in the world? It is unity. In
other words, it is love. The church is a really strange place. After working to “death”
all week, people gather to church despite fatigue and tiredness. And people become
high-spirited when they come to church. Even those who experienced the "taste of
death", get a "taste of life" when they come here. Why? Because you taste the love.
When you taste God's love as well as the love of your brothers and sisters, your life
will change for the better.

After creating the heavens and the earth, God finally created man and said that it
was very good to see. A human being created in his image could not have looked
any better. However, the expression “very good in his eyes” is repeated in verse 1 of
the text.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live together in unity!” The
original form of creation that God wants to restore is a community where brothers
are united in love as one. The ultimate call the Church must pursue is the call to
love one another.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John 13:34-35)”

4.
Now someone may think, "Pastor!! Can't we just live a quiet life of faith alone? After
all, in life don’t I come and go alone? At church, I worry about other people
approaching, and sometimes it annoys me.” So then, why do we need to connect
and unite with others? This is because human beings are made to be dependent on
each other by nature. Humans cannot stand alone. It was not good in God's sight
for Adam to be alone, so he made Eve, a woman as a companion. As you all know,
the Chinese character 人 is a figure of two people leaning against each other. God
created people to lean on each other. The way we are restored to the image of God
is to restore our original form of humanity, which is interconnectedness.

5
Can any of you see the back of your head? Is there anyone who can see what their
back looks like with their own eyes? There's an ophthalmologist here too, but do
you know why the human eyes only rest in front? A creature with front and back
eyes is called Janus in Greek mythology. The reason people are not Janus is that
they need other people. It is a very philosophical agenda that a person cannot see
behind himself. I think I know myself perfectly, but no one knows him or herself
perfectly. Others see what I cannot see. When I listen to someone, I confirm my
existence. So, our existence is complete when we listen to others and when they call
our names and hold hands with them. God made all humans that way. People enjoy
full happiness when they are connected and united with others. It is to confirm my
humanity through others and to be completed as a true human being.

In that sense, the church is the arena of unity of brothers and sisters. It is a place
where we restore our true humanity. Through unity, we can create the image of the
kingdom of God that God wants to achieve on this earth. The church is
distinguished from other institutions of the world in the way that it is a community
that provides a foretaste of the coming kingdom of God here on earth. The church
must show the appearance of the kingdom of heaven. The aspect of the kingdom of
God that David speaks of through today's text is that brothers and sisters love each
other and unite to become one.

I don't know who came up with the name 'one heart', but it really is a well-made
name. Heaven is melted in the name of ‘one heart’. We, Dahana Church, should be
able to show the image of heaven, at least to the Koreans living here in Rochester.
To do that, we must become one, and create unity and love. Only then will many
people enjoy the blessing of eternal life through us. The results of the love created
through us will flow like a waterfall to our neighbors.

Since the old times, the elderly have spoken a lot about ‘downward love’. The
characteristic of love is that it goes down. Just as electricity flows from high to low,
and water flows from high to low, love flows from many places to less. Just as oil

6
poured on a priest flow down his head, down his beard, and down his collars, love
flows from the rich to the poor. Just as the snow on Mount Hermon melts in the
spring sunlight and flows down to wet the parched land, our love will flow to fill the
broken hearts of those who are dry and wounded. There is no other secret to being
'one-hearted’. The only way to unity is love. Love is natural, not forced.

There is a saying in Lao-tzu's Tao Te Ching (Book of morals), 'Sangseonyaksu
(上善若水)'. It means, "the highest good is like water". In other words, the truth,
which can be called the best good in the world, has the same characteristics as
water. What is water like? Water flows from high places to low places. If there is an
obstacle in the way, the water will smoothly flow and wrap around it instead of
breaking through it. Water fills holes and cracks as it flows down. The characteristic
of God's love is like this water. God's love, the greatest good in the world, is like
water and synonymous with ‘downward love’.

The church is full of people who come with torn and broken hearts like David's
community gathered in the cave of Adullam. It is not easy for “perfect” people to
come to church. Many people come to church with a lot of regrets. By coming to
church, you not only taste God's love for you, but also the loving care of brothers
and sisters. When we love each other, love flows like water, watering each other's
broken hearts and filling the cracks in them. And It does not stop there. The love
proceeds to flow to surrounding people, the community, and society, and the
virtuous cycle of love continues.

What do you think can change a person? Can learning and knowledge change us?
Not at all. Love changes us. 1 Corinthians 8 verse 1. “But knowledge puffs up while
love builds up.” 1 Corinthians 13:2.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7
By going to bible studies with the new pastor and increasing my knowledge, will my
faith grow and change? Not at all. If people change through Bible studies, the
current Korean society would have undergone tremendous changes because of the
church. Love changes people. Love builds people. Love makes us perfect.

6.
Have you seen the movie, Jerry Maguire? The final scene of the movie is always
touching. Sports agent Jerry wins a jackpot contract after many twists and turns. He
had achieved the success he had hoped for and dreamed of, but he felt a void in his
heart. He immediately runs to his girlfriend, who has already become distant from
him. And this is Jerry's line for his girlfriend, who is mourning at the widow's
meeting. “Our company made a huge deal today and it was a hit. But it wasn’t
complete... we live in cynical world, cynical world. ... I love you. You complete me.”

Dear Dahana Church, when you think about the future of our church, what do you
think of it? Achieving and accomplishing great goals for church? Learning in the
depth of biblical knowledge? Being filled with people and expanding the size of the
church? Like Jerry's confession, even if we achieve all those things, our hearts will
still be empty. This is because God has created a space in our hearts that will be
filled only with love. The love of God that flows like water and the love between the
members of the congregation, which is small but steady like the drizzle, will fill us
and change us. If we can find the direction of Dahana Church in today's Word, it is a
community in unity. Our church brings together people from different backgrounds,
different personalities, and different talents. Some of you have just come to this
place from Korea, while others have lived in the US for over 20 or 30 years. Some
people have studied a lot and some have not. There are Republicans and there are
Democrats. We are so different from each other, but we all need each other. My
existence cannot be complete without that person around me. Our church should be
a community of true God that values each other, holds each other's hands, and
comforts each other. When we all become one, the kingdom of God will be more
firmly established on this earth. When we become one, the good and rich things

8
made through us flow into our neighbors. May God bless you and remind you that
we are here because of those next to us. Don’t be hesitant to walk together in love,
holding the hand of the brother next to you. God bless you.

- Translated by Myungha Kim -

Posted by speramus

<창조절 설교>

본문: 시편 8:1-9

제목: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I believe in God; creator of heaven and earth.

1.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다하나교회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 길 빕니다. 요즘 따라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교회 들어오다 보면 단풍 나무가 벌써 빨갛게 변했습니다. 도로 주변의 밭들도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밤공기는 가을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런 계절과 자연의 변화를 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해와 달이 뜨고 지고, 계절이 변하는 걸 보며 누군가 이 세상을 정확하게 운행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으세요? 지난 여름 저희 가족이 로체스터로 이사해 오는 길에 만난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양한 자연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엘로스톤이나 요세미티 같은 국립공원에 가면 입이 딱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자연을 성경과 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종학,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29) 일반적으로 성경은 특별 계시로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를 계시해 주는 책이라 하죠. 그런데 성경 외에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또 다른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연이라는 책입니다. 자연은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주와 지구 그리고 지구위에 존재하는 생물의 세계를 포함한 창조세계 속에 담겨 있습니다.(위의 책, 30) 자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체계적인 틀을 만들고 법칙을 만들어 자연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중에도 과학자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여러분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적용해 주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목사가 특별계시인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자이신 여러분은 일반은총인 자연 현상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시는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성경은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위대하신 분임을 모두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20절 말씀입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자연 속에 하나님이 밝히 드러나 있대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자연속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거죠.

 

2.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자연과 그 자연 안에 있는 생명체들을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느끼시나요? 기독교 신앙은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사도 신경의 기본 프레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고,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의 구원과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 보여줌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소절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없이 우리의 신앙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그것을 다스리시고 유지시키고 계시며 창조의 행위를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 땅 뿐만 아니라 저 하늘과 온 우주를 포함한 것입니다. 먼저 이 땅을 보십시오. 땅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먹거리들의 대부분을 하나님이 만드신 땅이 생산해 냅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학교에 있는 시간 보다 논 밭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땅을 저주했습니다. 땅이 만들어내는 그 모든 푸성귀들과 곡식들 때문에 저는 놀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이들어 땅을 생각하니 창조주의 위대한 창조능력을 이 땅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디 땅뿐입니까? 하늘은 더 놀랍과 광대합니다. 우주는 얼마나 클까요?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광속 우주선이 있다고 전제해 봅니다. 광속 우주선을 타고 태양까지 10분이면 도착합니다. 광속으로 태양계를 벗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반나절입니다. 그런데 제트 여객기를 타고 태양까지 19, 태양계를 벗어나는데 천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태양계만 하더라도 어머어마한 크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죠? 광속 우주선을 타고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 걸리는 시간은 4년입니다. 우리 눈에는 밤 하늘의 별들이 빼곡하게 몰려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별들 사이의 공간(interstellar)은 광속으로도 수십년이 걸리는 거리로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 별들이 모여 은하를 이루죠.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같은 경우는 지구에서 260만 광년이 떨어져 있고 4천억개의 별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별들의 집합인 은하가 한 두개가 아니라는 거죠. 그냥 쉽게 말해서 우주는 큽니다. 어마 어마하게 큽니다. 그런데 그 큰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얼마나 큰 분이실까요?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포함한 창조의 위대함을 알아야 그리스도의 겸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주보다 크시고,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자의 크기로 마리아의 몸 속에 들어가 사람이 되신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겸손이자 신비입니다. 

 

3.

오늘 본문인 시편 8편의 저자인 다윗도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신비로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가락으로 직접 만드신 하늘과 그 하늘 위에 있는 달과 별들을 보며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땅과 땅 위의 모든 짐승과 생명체들을 대신 다스리게 하신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주보다 광대하신 하나님이 지구상의 작은 생명체들의 먹고 자는 문제까지 돌보는 세밀한 분이라고 시편 104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광대한 분이 너무나 세밀하게 피조물들을 하나하나 돌본다는 것이 창조주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존재들이 선하고 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에는 사람은 물론이요 온갖 종류의 생명체도 포함합니다. 본문 4절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고백합니다.이어서 5절은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6절 말씀입니다.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존재(image bearer)이기에 매우 존귀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가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직장 동료, 또는 교회 형제 자매일 수도 있겠죠. 나의 PI일 수도 있구요.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이웃들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4.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이 자연 속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미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뜻도 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는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애지중지 아끼고 조심조심 절제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지구는 큰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지구는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지구 곳곳은 폭염과 강추위로 몸살을 앓아 오고 있습니다. 올 여름 한국의 수도 서울은 폭우로 물폭탄을 맞아 강남이 물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서부는 매년 산불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켈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 주는 사람이 아닌 자연이 만든 불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후 위기에서 생긴 문제들이지요. 무엇보다 2년 반 전에 전세계를 공포가운데로 몰아 넣었던 코로나 사태는 인간이 생태계를 함부로 사용한 결과물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려고 절제하지 않고 자연을 함부로 이용한 결과 입니다. 인간들이 생태계를 돌보지 않고 생명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자 이제 자연은 재해와 질병으로 인간을 역습해 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같은 현상을 바라보며 신음하는 대자연의 울부짖음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더 슬로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빠른 리듬의 삶을 포기하고 불편한 삶을 선택할 때 피조세계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이 그림은 올해 창조절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입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Listen to the voice of creation”. 제발 피조물들의 소리를 들으라고 적혀 있습니다. 성경에서 떨기나무는 소외 당한 이들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을 상징하곤 합니다. 물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떨기나무는 볼품이 없습니다. 목질이 거의 없고 덤불로 되어진 버려진 나무죠. 물기가 거의 없기에 동물들이 먹을 수도 없고 그늘을 만들지도 못하는 쓸모 없는 나무가 떨기 나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불에 타고 있는 떨기나무를 보죠. 신기하게 떨기나무는 불에 타 없어 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불이 붙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7-9절 말씀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떨기나무는 버려진 백성들을 상징하고, 그 위에 타오르는 불은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시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울부짖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은 그들 위에 타오르시며 그들을 자유케하고 빛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르짖음 뿐만 아니라 피조물들의 탄식도 들으십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식물들과 대자연의 탄식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다. “. 인간과 대자연의 신음소리를 듣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인간이 초래한 기후 위기가 만들어 낸 화재는 산림과 가옥들을 태우며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떨기 나무 위에 만드신 불은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빛나게 했습니다. 불타오르는 떨기나무가 종살이 하며 버려진 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창조절에 우리가 기억해야할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는 피조세계를 유지하시고 보호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간절한 움직임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이 땅위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탄식을 외면하지 않으신 것처럼 피조물들의 부르짖음도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창조의 주님으로 믿고 받드는 창조의 절기에 우리는 피조물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유케 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지구의 생명들을 아끼고 보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서 우리에게 이 땅을 맡기시며 다스리라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앞장서 저탄소 운동에 동참해야 하고 자원을 아끼는 데 동참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 서부의 교회들을 방문하며 문화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마다 식당에서 성도들에게 밥을 퍼주는데 일회용 스티로폴 그릇을 사용하더군요. 그 모든 스티로폴이 땅에 묻히면 썩지도 않을텐데 저는 걱정이 됐습니다. 미국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도 일반쓰레기로 같이 버려집니다. 재활용은 뭉뚱그려서 대충 버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이 지구가 아름다운 주님의 별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 지구를 잘 보전하고 가꿔야 합니다. 지난 주 텀블러 사용하자고 말씀하니까 우리 여성 교우들 위주로 텀블러와 머그컵 사용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남성분들도 다같이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의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옆에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주변의 풀 한 포기라도 귀하게 여기고 아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가 노래했던 것처럼 , 태양은 우리 형님이요 달은 우리의 누님이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인 대지가 만들어 내는 온갖 생명들과 함께 어우러져 창조주를 노래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조심 조심 대하고 아껴줄 때 하나님의 창조는 이 땅위에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절을 기념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마땅한 신앙의 태도일 것입니다.

 

Sept 18 One Heart Church Sermon - translated by Melody Lee.

Scripture: Psalms 8:1-9
Sermon Title: I believe in God; creator of heaven and earth.

1.
May the grace and peace of our good Lord be with us all at One Heart Church. I sense the change in seasons a lot these days. I noticed on my way to the church that the maple trees have already turned red. The fields around the road are also turning golden. The cool night air in the morning and evening makes you feel that autumn has arrived. What do you think of as you experience these changes in seasons and nature? Watching the sun and the moon rise and set, and the seasons change, don't you feel that someone is leading the world with precision? This summer our family took a road trip as we moved to Rochester. Along the way we experienced how beautiful nature is, and it was an opportunity to meet God deeply in a variety of natural environments. When I go to a national park like Yellowstone or Yosemite, I am in awe at how beautiful it is. It is really difficult not to feel the presence of God in such great nature. Because God reveals Himself through nature.

Some have even said that nature is a book where you can see God's revelation along with the Bible. (Jonghak Woo, The Challenge of the Age of Science and the Response of Christianity, p. 29) In general, the Bible is a book that reveals how salvation is accomplished through Jesus Christ. However, besides the Bible, there is another book in which God revealed Himself, and that is the book Nature. Nature is not written in writing, but appears in the creation world, including the universe, the earth, and the world of living things that exist on the earth. (Jonghak Woo, The Challenge of the Age of Science and the Response of Christianity, p. 30) To understand natural phenomena, we create a systematic framework and make laws to understand nature. The effort to explain is what we call science. There are many scientists among us. I believe you are basically the ones who explain and apply the common grace of God to us. If a pastor is a person who testifies of God by interpreting the Bible, which is a special revelation, then you, as scientists, are great people who reveal the existence of God by interpreting natural phenomena that are common grace.

The Bible says that everyone, even non-scientists, can know that God lives and is great in this great nature. This is Romans 1:19-20.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God’s invisible qualities—his eternal power and divine nature—have been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from what has been made, so that people are without excuse.”

According to these words, God is clearly revealed in nature. It is rather strange that God's power and divinity cannot be found in nature.

2.
What do you think? Do you feel God the Creator when you look at nature and the living things in it? Christian faith begins with belief in the Holy Trinity. Today, we confessed our faith in the Apostles' Creed. The basic frame of the Apostles' Creed is faith in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We believe in God the Father as our Creator God, and we believe in God's Son, Jesus Christ as our Savior. And we believe that the Holy Spirit reveals the salvation of the Son Jesus and the reign of God the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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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es the first verse of the Apostles' Creed begin?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Our faith begins with belief in God the Creator.

We believe that Almighty God is the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Without this, we cannot begin our faith. God created everything in this world. He created all things for good. He still rules and sustains it, and He does not stop the act of creation. This is where our faith begins. God's creation includes not only this earth, but that heaven and the whole universe. The planet Earth is huge, but how big is that universe? And how big is the God who rules the universe?

Suppose we have a spacecraft traveling at the speed of light. It takes 10 minutes to reach the sun in a spaceship traveling at the speed of light. It takes half a day to leave the solar system at the speed of light. However, it is said that it would take a thousand years to get out of the solar system in an airplane. You can guess that the solar system alone is huge, right? The time it takes to travel from the Sun to the nearest star in a spacecraft at the speed of light is 4 years. To our eyes, the night sky is full of stars. But the interstellar space between the stars is a distance that would take decades even at the speed of light. These stars come together to form galaxies. The nearest galaxy to our galaxy, the Andromeda Galaxy, is 2.6 million light-years from Earth and is made up of 400 billion stars. But it's not just one or two galaxies that are a collection of these gigantic stars. Simply put, the universe is big. It's insanely big. But how big is the God who creates and rules this vast universe? To believe in a Creator is to acknowledge the magnification and greatness of God. Only when we know the greatness of creation that includes the whole universe can we know how great the humility of Christ is. It is such a remarkable humility and mystery that Jesus Christ, who is bigger than the universe and is God, entered the body of Mary in the size of an invisible sperm and became a human being.

3.
David, the author of Psalm 8, today’s scripture, looked at nature and was amazed. “I cannot help but marvel at the heavens that the Lord’s fingers have made, and the moon and stars above them, “he says. David believes that God is the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he is amazed at the fact that God has made man rule over this earth and all the beasts and living things on it. He feels God while looking at the Bible as well as nature. Psalm 104 describes God, who is vaster than the universe, as the meticulous One who takes care of even the problems of eating and sleeping of the little creatures on Earth. It is the amazing mystery of the Creator that such a vast One cares for each creature with so much detail.

To believe in God as the Creator is to acknowledge that all beings created by God are good and precious. This is very important. Beings created by God include not only humans, but also all kinds of living things. In verse 4 of the text, he confesses, “what is man that thou art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thou dost care for him?” In verse 5, “Yet thou hast made him little less than God, and dost crown him with glory and honor.” Those who believe in God the Creator realize that all human beings are worthy. Because all human beings are made in the image of God. This is Genesis 1:26-27.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the cattle,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s upon the earth.’ So God created man in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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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Human beings are very precious because they are image bearers of God.

Believing in God as Creator means acknowledging the worth of not only your own existence, but the existence of others. It could be a work colleague I really hate, or a church brother or sister. It could be my PI. There is a will that God wants to accomplish through that person as well. When we believe in God as our Creator, we believe that God lives in all our neighbors around us. This is the reason why no one in the world should be treated badly.

4.
Furthermore, to believe in God as the Creator means to believe that all things in this nature were created with God's special purpose and will. Not just humans, but even the microorganisms in this world should be treated with care. If we confess that all things in the world are made good by God the Creator, we cannot treat anything in the world without care.

If we do not cherish the living beings on this planet and live with care and restraint, the earth will be in a grave crisis. The planet is already in the midst of a serious climate crisis. All parts of the world are suffering from intense heat and severe cold. This summer, Seoul, the capital of Korea, was hit by a water bomb due to heavy rain, and Gangnam became a sea of water. The American West suffers from wildfires every year. California, Oregon and Washington are suffering from fires created by nature, not man. All of these are problems caused by the climate crisis. Above all, the COVID-19 pandemic that put the world in a panic two and a half years ago is the result of human abuse of ecosystems. It is the result of human beings using nature without restraint to satisfy their greed and desires. As humans do not take care of the ecosystem and do not value life, nature is now counter attacking humans with calamity (disaster) and disease. We need to hear the cry of Mother Nature, who groans while looking at a phenomenon like COVID-19. We must learn to live in harmony with creation. And you have to live a slower life. When you give up the fast rhythm of life and choose an uncomfortable life, you can live in harmony with the created world.

5.
This drawing is to commemorate Creation Day this year. The bush is on fire. And on it is written “Listen to the voice of creation”. Please listen to the creatures. In the Bible, the bush often symbolizes the marginalized and the suffering. A bush that has to survive in a wilderness where there is no water is no good. It's an abandoned tree with little woody parts. A bush is a useless tree that animals cannot eat or use as shade because it has little water. But when Moses came to Horeb while tending sheep in the wilderness of Midian, he saw a bush burning with fire. Miraculously, the bush did not burn out, but continued to glow and shine. And God speaks to Moses. This is Exodus 3:7-9. “I have clearly seen the suffering of my people in Egypt, and I have heard the cry of anguish because of oppression. Therefore I know clearly their suffering.

The bush symbolizes the abandoned Israelites, and the fire burning on it symbolizes the Holy Spirit suffering with them. God hears the cry of those who cry on this earth. And the fire of the Holy Spirit burns upon them, setting them free to shine. God hears not only the cry of man, but also the groaning of creation. God hear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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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aning of animals and plants and Mother Nature in every corner of the globe. Albert Schweitzer, known as a saint of Africa, once said: “The God we believe in hears the groans from the earth as a prayer, “Thy kingdom come.” He is a God who hears and responds to the groans of humans and Mother Nature.

The fires created by the man-made climate crisis have become catastrophic, burning forests and homes. But the fire God made on the bush made it shine without burning it. Although the burning bush is the people of Israel who seem to have been abandoned and enslaved, the unquenchable bush we must remember on the Day of Creation is also the earnest hope of the Holy Spirit, who maintains and protects the created world. The Holy Spirit will not turn away from the cry of creation just as he does not turn away from the groanings of those who cry on this earth. Especially in the feast of creation, when we believe and obey God as the Lord of creation, we must listen to the cry of creation. And you have to follow God's will to set them free.

The church has a duty to protect and preserve the lives of this earth by obeying the will of God the Creator. That is also the will of God who entrusted us with this land and commanded us to rule it in Genesis 1. The church should take the lead and join a low-carbon movement and conserve resources. I was in culture shock when I visited churches in the western United States. Disposable Styrofoam bowls were used to distribute food to the members in the cafeteria of each church. If all the styrofoam were buried in the ground, they wouldn't rot, so I was worried. In the United States, food waste is also disposed of as general waste. Recycling is roughly thrown away. A church that has God the Creator as its master should not do that. We must value life and strive to make this earth a beautiful star of the Lord. We need to preserve and nurture this earth so that people can meet God in nature. Last week, when I came to church, I told them to bring a tumbler and use it, so I heard that female church members discussed transitioning to using tumblers and mugs. I hope we can all join in.

When we remember that the people around us are God's creations and that God's image is in them, we can't help but value the people next to us. This is because God is the God who answers our groanings and unfolds God's will through us. Furthermore, we must not forget the will of God the Creator, who wants His glory to be revealed through all creation. Therefore, we must cherish even a single leaf of grass around us. We should live with gratitude. As St. Francis of Assisi sang, I wish the sun to be our brother and the moon to be our sister. I hope to dream of a beautiful world in which the mother earth sings the Creator in harmony with all life forms. When we take care of all living things around us, God's creation will shine even more on this earth. This must be our proper attitude of faith to commemorate the Day of Creation and serve God the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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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eramus
설교문2022. 2. 20. 09:52

설교 작성자 : 김경헌 목사, 2022년 2월 19일

본문 : 출애굽기 2장 15-22절 (새번역)

15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c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c 모세의 장인은 민 10:29 및 삿 1:16과 4:11에서는 호밥이고, 출 2:21에서는 르우엘이고, 출 18장에서는 이드로이다)
22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d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d 히, '게르')

 

1. 들어가기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2022년이 시작 된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갑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푸르른 봄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봄이 되면 이런 영어 한 소절이 자연스레 튀어 나옵니다.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 그렇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리고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이제 곧 따뜻한 희망의 봄볕이 비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엉망진창이 되고 망가진 이 세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가 죄에 빠진 이후 줄기차게 실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으로 하나님의 복과 샬롬을 누리게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그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렇지만 주도면밀하게 만들어 오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주 연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봄볕에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돋아나는 연하디 연한 푸른 새싹처럼 아주 연약한 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를 써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죠. 어린 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2장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여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주 멋지게 이뤄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남성들 위주의 사회 가운데 많은 차별과 아픔을 견뎌 왔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일꾼으로 쓰임 받아 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역설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라는 책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은 차별의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 책에 백인남성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미국 사회 내에서의 특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사회 가운데 많은 특권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차별을 받는 유색인종이나 여성들의 자리에 서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누리고 살아갑니다. 현금의 사회에서도 이런데 기원전을 살아갔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처우란 상상 이상으로 낮고 박했을 겁니다. 출애굽기 서막과도 같은 1-2장에 보면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의 활약상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2. 십브라와 부아

모세 이야기로 들어가 보실까요? 모세는 출생에서부터 두 할머니의 보호 가운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 준 할머니는 십브라와 부아라는 할머니였습니다. 이 여성들의 용기와 깡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신 적있습니까???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히브리인들의 번성함에 큰 위기를 느낀 파라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죠.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여자들의 출산을 돕던 산파 둘이 있었으니 십브라아 부아라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당시 신이면서 사람이었던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 놓으신 자비와 정의를 산파들은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출애굽의 계획은 일단 성공적으로 한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3. 요게벳과 미리암

하나님은 어떻게든 모세라는 인물을 잘 성장시켜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대면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라오라는 인물의 삶을 누구보다 이해해야 할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그분의 구원 플랜을 진행시킵니다. 바로 모세라는 어린이를 적의 심장부에 심어 넣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위해 쓰임 받았던 여인들이 바로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그의 어머니 요게벳이었습니다. 요게벳은 3개월간 심혈을 다해가며 자기에게 맡긴 핏덩이를 잘 양육했습니다. 더 이상 그 품에 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함으로 파피루스 상자에 아이를 실어 강으로 떠내 보냅니다. 요게벳의 명령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동생이 실린 갈대 상자를 따라갑니다. 미리암의 마음 속에 있는 측은지심이 발동된 것으로 보입니다. 젖살이 오를대로 올라 너무나 귀여운 3개월 된 남동생을 그렇게 그냥 보낼 수 없어 강가를 서성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미리암이 상상이 되시나요?

 

4. 파라오의 딸

자 모세가 3개월이 될 때까지 살아남게 되는데 성경은 여성들의 활약상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파라오의 딸의 등장 때문입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유행가도 있는데 파라오의 딸이 갑자기 모세가 떠내려 가고 있는 나일강으로 멱감으러 나옵니다. ~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외면하신다고 생각 되어지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클라이막스를 기다리셨다가 구원의 손길을 우리 삶에 뻗치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이처럼 극적이게 우리 삶에 다가오기도 하지만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쨌든 이 절박한 타이밍에 파라오의 딸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역전시켜 버립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투 아웃 3점 뒤진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2-3 풀카운트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이 터진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 그러니까 이집트 공주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여러분은 상상해 보셔야 합니다. 이집트 공주는 파피루스 상자에 담긴 아기를 보고 이 아기가 히브리 남자 아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 아기는 이집트 남자 아이와 달리 할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모르는 이집트 여자는 없었으니까요. 그 순간에 극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모세가 응애 응애심하게 울고 있었을 겁니다. 아기가 울고 있는데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을 정상적인 여인이 있을까요? 여자들 안에는 남자들보다 훨씬 풍성한 감정적인 유전자가 내재돼 있습니다. 이 아이가 히브리 남자아이지만 이 아이는 내가 길어내야 해.”라는 결연한 의지가 공주 안에서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리암의 용기가 필요했는데 미리암은 너무나 훌륭하게 모세를 어머니 품으로 다시 되돌려 놓게 하지요. 앳된 소녀의 용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젖을 뗄 때까지 합법적으로 어머니 품에서 다시 양육 될 수 있었죠. 문제는 젖을 뗀 이후부터입니다. 왜냐면 이제 모세라는 어린 히브리 남자아이가 파라오 앞에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다시 한 번 파라오의 딸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파라오는 극악무도한 캐릭터였습니다. 자비란 일도 없는 인물이었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잔인한 폭군이었습니다.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버리라고 명령한 인정사정 없는 그런 인물이었는데 그 파라오를 설득시킨 건 바로 그의 딸이었습니다. 얘나 지금이나 딸의 애교를 당해 낼 아빠는 없나 봅니다. 저는 아들만 셋 있어서 딸의 애교가 무엇인지 평생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라오의 딸의 노력으로 모세는 적의 심장인 파라오의 궁전에서 40세까지 합법적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라는 한 리더를 만들어내기 위해 헌신한 여인들의 믿음과 용기를 보십시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장에는 한 명의 여인이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십보라입니다.

 

5. 십보라

모세는 동족을 살해한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들통이 나서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망명을 갔죠.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실패감과 절망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겁니다. 거의 재기 불능의 나락까지 떨어져 있는 모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물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7명의 미디안 여인이 양떼에게 물을 주기 위해 우물가로 왔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 그 여인들을 훼방하며 양떼에게 물을 못 먹이게 하며 쫓아내버리죠. 이것을 지켜보던 모세가 그 여인들을 도와 그 목자들을 쫓아버리고 여인들의 양무리들에게 물 먹이는 것을 도와줍니다.

 

여인들의 아버지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자기 딸들을 도와준 이집트 남자를 자기 사위로 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던 딸 십보라를 그에게 주었죠. 모세는 새롭게 정착하게 된 미디안 땅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음에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아들을 낳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구나.”라는 뜻으로 게르솜이라는 이름을 지었을리 만무하죠? 아들을 낳고 적잖이 위로를 받았던 것이죠. 그만큼 십보라는 모세에게 큰 위로가 된 여인이었습니다.

 

6. 여성성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

성경의 출애굽기 네러티브는 너무나 중요한 서사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출애굽기의 서사는 반복해서 기억되고 기념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출애굽기는 구원의 모티브가 되어 성경 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인 들의 절기 속에서도 매년 출애굽의 모티브들은 반복되어 기념되곤 하였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삼대 절기가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기념되는 절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출애굽의 역사인데 그 중요한 출애굽의 구원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연약한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됩니다.

다양한 나잇대와 다양한 신분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여인들이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에 70프로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입니다.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교회는 유지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역사는 남자들이 만들어가지만 그 남자들은 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뤄가는 주인공들이신 여성분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행하시는 가사들이 전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그러한 사소한 가사 노동이 없다면 가정이 유지되겠습니까? 여러분의 헌신이 없이 어떻게 아이들이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이름 없고 값없이 행했던 봉사로 교회 또한 이만큼 성장하였고 풍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키워낸 아이 가운데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이 일꾼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 만큼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일꾼을 길러 내시어 그분의 나라의 구원계획을 진행해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 일에 여성분들이 매우 요긴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핵인싸입니다. 핵인싸는 매우 중요한 중심 인물이라는 요새 젊은이들의 용어입니다.

 

7. 라스콜랴노프를 끌어 안아 버리는 쏘냐

 

여러분 구원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공감하고 측은히 여기는 여성성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기 전반부 1-2장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여성들이 이끌어 가는 것을 통해 애키우고 아이를 돌보고 사랑해 주는 여성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이 일류를 구원할만큼 중요한 일임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지요.

 

도스토에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을 보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가운데 느껴지는 빈부격차에 고뇌하는 청년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돈에 노예가 된 노파 정도는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에 살해하였는데 현장에 노파의 조카가 있었고 함께 그 조카까지 얼떨결에 살해하게 되죠. 라스콜니코프는 이후 심한 죄책감과 불안에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 라스콜니코프의 해결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했던 죄책감의 난제를 소냐라는 매춘부가 풀어주게 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제어능력이 없는 기폭제를 설치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연약한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소냐’라는 생계형 매춘부는라스콜니코프‘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기폭제를 용감히 끌어안아 버립니다. 놀랍게도 남자 주인공은 소냐의 품에서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해지죠.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도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나서 그를 향하여 날아올 정죄의 화살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냐는 그 모든 발작을 스펀지처럼 다 빨아드려 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의 발작은 잠잠해졌을 뿐 아니라 안식까지 누리게 되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구원은 여성성의 용서와 용납에서 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인공의 발작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의해 그것이 용납되어짐으로 구원은 외부로부터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이 시대에 필요한 힘은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의 남성적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성은 이 세상을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망치고 헝클어 놓았습니다.

이 남성적 엔트로피에 의해 헝클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성이 필요합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말랑한 관용 속에 구원의 진주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엄한 아버지의 이미지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여성적인 이미지의 어머니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런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매님 여러분을 특별히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말 없는 섬김과 헌신을 우리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여러분들 처럼 부드럽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 오고 계시는 섬김과 사랑을 포기하지 마시고 줄기차게 이어 가십시오. 여러분의 그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힘차게 전진해 갈 것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