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풀러신학교 목회학 박사 과정 중 신약성서해석이라는 과목의 과제로 본문 해석의 툴을 통해 어떻게 설교의 요지를 이끄는지 이해하는 목적으로 진행되었고, 본 연구는 본인이 직접 작성하였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설교준비안
-김경헌-
1) 내용 준비
a) 본문 관찰 내용들 (발견한 내용들을 최대한 기록합니다)
i) “마치(호모이아)”로 본문을 시작하면서 본문이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대한 비유임을 나타낸다.
ii) 19장 30절과 20장 16절은 같은 문장이 “처음(프로토이)”과 “마지막(에스카토이)”이 도치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사적인 도치로 이해되며 수미상관(inclusio)으로 처음 절과 마지막 절을 비슷한 문구를 두어 문학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프로토이)와 꼴찌(에스카토이)의 반전 또는 뒤집어짐’을 이런 도치를 통해 문학적인 효과를 극대화 했다고 보여진다. 어순이 뒤집히듯 천국에서는 언제든 순서는 뒤집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iii) 아침 일찍 온자들(프로토이)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주목된다. 처음 온자들에 대한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비한다면 저자의 의도는 먼저 온 자들에 더 촛점을 맞춰 말하려고 한 것이다. 비유이기에(이와 같다-호모이아) ‘먼저 온 자(프로토이)’는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들을 나타내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본문에 해석에 있어 핵심적인 과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코텍스트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iv) 본문의 앞 장을 먼저 살펴보면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18장 1-5절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지에 관한 주제와 10절에서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본문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와 꼴찌, 그리고 큰 자와 작은 자라는 비슷한 맥락이다. 이어지는 19장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나 유다 땅에 이르심을 나타내면서 바리새인들의 방해가 시작됨을 19장 3절에서 기술한다. 먼저 된자, 그리고 큰 자로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을 맞아 들일 것에 있어 하나님 나라를 다시 언급하심으로 바리새인들과 어린이들을 비교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둘 수 있다.
본문의 뒷 부분에서는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을 언급하면서 세베대의 어머니의 등장과 하늘에서 첫째(프로토이)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언급하신다. 이는 앞에서 등장한 프로토이(첫째, 먼저 된자)라는 모티브를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앞 뒷장에서는 주요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과, 큰 자와 작은 자의 대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대조가 여러 번 등장 함을 알 수 있다.
신분의 상승이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는 것, 또는 먼저 된 자들이 뒤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나타내기 위해 본문 주변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이란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v)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19장 16절부터 등장하는 부자 청년은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돌아갔다. 자신의 신분과 조건 그리고 행실로 하늘 나라에 들어 간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의 비유를 통해 지금까지의 조건과 선택이 아무 소용 없고 뒤집어 질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바리새인들 그리고 나아가 유대민족 전체가 선민 의식으로 하늘 나라에 가장 먼저 도달한 것처럼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뒤집고 계신다. 계급 상으로, 지위상으로, 권력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앞섰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던 ‘프로토이’들에게 도저히 예수의 주장이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다.
vi) 본문의 중요한 모티브는 포도원 주인의 “계산법”이다. 이 계산법은 세상의 계산법이 아니다. 많이 일한 사람은 많이 받고, 먼저 온 사람이 더 많이 받는 세상의 계산법이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토이’들이 투덜거릴 수 밖에 없다.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나중 온 사람들은 아고라에서 빈둥빈둥(아르고스)거리던 사람이다. 심지어 그들은 먼저 온 자들보다 더 쉽게 일했고(시원한 시간대) 더 적게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가져 갔다. 주인은 먼저 온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졌지만 빈둥빈둥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다.
vii) 이 계산법에 중요하게 사용된 모티브는 ‘쉼포네오(합의하다, 동의하다)’이다. 합의한 대로 준다는 것이 주인의 계산법이다. 여기서 ‘언약’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과 일꾼들의 관계는 언약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도 언약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먼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 왜냐면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고 하나님은 언약 불이행시 합의했던 바 대로 그들을 나중으로 밀어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언약관계로 계산하면 주인의 계산법을 이해할 수 있다.
viii) 콘텍스트 상으로 살펴볼 것은 본문이 포도밭 주인의 은덕과 자선 행위를 기술함으로 당시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부유층들이 하류층에게 베풀었던 시혜적인 행동을 부각시키고 있다. 후하다, 선하다는 뜻의 ‘아가또스’를 사용한 것이 바로 이런 문화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용직 노동자들의 투덜거림은 호혜성의 원칙에 벗어난 행동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들은 무례하게 주인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b) 주요 해석적 포인트들 (위의 발견한 내용들을 몇가지 주요 포인트들로 아우르도록 합니다)
i) 첫번째: 프로토이들의 특권의식 (바리새인, 부자청년, 유대인들)
그러나 주인의 눈은 포도원에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고라에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자주 나가서 누가 있는 지 살폈고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다. 후하고 선하신 주인이 과연 먼저 된 프로토이들에게만 후하겠는가? 포도밭에 모인 자들이 먼저 주의 선택을 받은 자로 이해한다면 교회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포도밭에 모인 자들을 두고 교회 바깥으로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수혜자)을 찾아 다니시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ii) 두번째: 주인의 시혜성은 언약을 기반으로 한다. 언약의 신실함에 반할 때 전복은 일어날 수 있다. 그 전복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잘 예시해 준다.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특권층이었던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끝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이미 먼저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가지 못할 때 그들의 특권과 먼저됨은 사라질 수 있다. 부자청년의 예를 들어도 그는 언약을 다 수행한 듯하지만 언약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언약을 실행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담을 갖고 떠나간다. 그는 가장 뒷자리로 밀려난 것이다.
iii) 세번째: 주인의 선함(시혜성)에 반하는 프로토이들의 무례함이 부각된다. 그들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주인의 후한 마음을 이해했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의 시혜 행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했다면 그들의 이런 행동은 무례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 의식을 경계해야 하는 대목이다. 주인의 후한 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아고라로 나가 빈둥 거리는 자들에게 주인을 소개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c) 다른 자료들을 통한 보충 내용 (위의 발견내용들은 다른 보조자료 없이 성경 텍스트만 가지고 씨름한 결과입니다. 이런 발견 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주석이나 다른 자료들을 통해 더 보충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이 있을지 적어봅니다)
i) _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모든 것이 바로잡혀서 이방인이 낮아지고 이스라엘은 높아지라고 믿었다.(IVP, 성경배경주석, 1317쪽)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그들의 기대와 일반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그것이 뒤집혀 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ii) _ 지중해 연안의 부유층은 이따금씩 빈민을 위해 상당한 재물을 증여함으로써 그 자선 행위에 대한 공공의 영예(honor)와 더불어 사회적 신분 상승을 꾀했다. 고대 사회에서 신분이 곧 역할을 결정했으므로, 하루 노동의 대가로 하루분의 삯을 받은 데 대해 불평한 자들은 매우 무례하고 감사가 결핍된 자로 여겨졌을 것이다(성경배경주석,1317쪽). 15절의 악한 눈은 ‘인색한 눈’이라는 당시의 숙어였다. 주인의 너그러움 때문에 일꾼들이 인색한 자가 된다는 공격은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iii) _ 신분이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극단적인 본보기를 제시하신다. 그가 평범한 죄수 신분으로 나중에 부활을 통해 전세가 뒤집어 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설교 디자인
a) 중심 메시지 포인트: 주인의 눈은 아고라를 향해 있었다.
b) 전체 구성 디자인 (해석 포인트들의 위치 + 삶의 연관성과의 연결등을 염두에 둘 것)
i) 하나님의 눈은 세상을 상징하는 아고라를 향하신다. 이미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교회의 신자들보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다니시는 목자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설탕인가 세상의 소금인가?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눈으로 아고라를 향해 있는가? 우리 주위의 이웃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해 있는가?
ii)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언약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언약적인 신실성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인 신실함으로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고 그를 희생시켰다. 그 예수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언약적인 신실함의 실천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의 이러한 수난과 부활은 기존의 신분과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낮아짐을 이해하고, 포도원 주인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후하심을 이해하는 신자들이라면 이제 그들 또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고라를 향해 가야 한다.
iii) 우리의 관심은 온통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를 받을 수 있을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받은 삯이 정당하고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시기심 때문이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함 때문이다. 내가 얼마를 받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주인이 정말 멋지고 선하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기심(본문에서는 나쁜 눈, 악한 눈으로 표현했다.)을 없애지 않는 한 주인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교회는 이제 교회 밖 아고라로 나아가야 한다. 아고라에서 그분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이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그들이 하늘 나라의 가장 앞자리에 설 수 있도록 내 소유를 나누면서 기꺼이 우리가 차지하고 있던 앞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부르심이며 먼저 된 자(포로토이)로서 행해야 할 주인과의 언약(약속)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