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깊어가고있습니다.그럼에도해가점점길어져감을보며이겨울 의끝을상상하게됩니다.다음주에예고된한파도견디다보면지나가겠 죠.또한파가여러번오겠지만그것또한지나갈것입니다.삭풍에움츠 려들면서도봄을상상할수있는여유가있어서다행입니다.창너머겨울 나무를물끄러미바라보곤하는데그럴땐어김없이어린시절좋아했던 겨울나무라는 동요가 떠오릅니다.

나무야나무야겨울나무야눈쌓인응달에외로이서서.아무도찾지않 는추운겨울에바람따라휘파람만불고있느냐.” 겨울나무는자기가자리잡은그곳에뿌리를깊이내리고긴겨울을그냥 버티고 있는 것이겠죠?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바람으로 오히려 휘파람을 불어가는 여유를 부리며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겠죠? 겨울나무가 바람 에흔들리는모습을보며여러분도잘버티고잘견디라고응원하는것같 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긴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에게 에너지를 만 들어 주던 파란 이파리들을 다 떨궈내고 그렇게 겸손하게 인생을 버텨가 는겨울나무를바라보는것이큰기쁨입니다.긴긴겨울을보내고나면나 무에게는 상급처럼 딱딱하고 진한 나이테가 주어지겠죠. 그 혹한에도 나 무는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자 보상일 겁니다.

인생의 혹한기를 지나고 계시는 형제 자매님들이 계실텐데 겨울나무처 럼 잘 버텨내시길 기도드립니다.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버티 다보면봄날은찾아올것입니다.지금은납작엎드려겸허히기다려야하 는시간일지모릅니다. 이기나긴겨울이끝이없어보이지만변하지않 는사실은봄이저만치멀리서라도오고있다는겁니다.따뜻한봄을상상 할수있는자격은모두에게있습니다.끝이있다는것,그것은큰희망입 니다.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순환을 보며 우리는 창조주의 신비를 경험하 곤합니다.계절의변화를통해창조주를만나고느낄수있다는것은큰 복입니다. 모든 시즌에는 그 시즌 마다 매력이 있습니다. 시인이자 가수인 라드 맥쿠언은 계절의 변화와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죠.
“And to each season something is special

Lilac, red rose or the white willow.

Young men of fortune old men forgotten Green buds renewing
The brown leaves dead and gone...”

우리모두가다른계절을지나고있고다른형편이지만각자에게가장최 선의 시즌을 보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고 나아갔으 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삭풍에 흔들리는 모든 겨울나무들이여 잘 버티 시고 이겨내십시오. 마음을 담아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

 

지난 주에 옆교회에서 주일마다 모이는 중국인 교회 리더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설날인데 중국교회는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 았습니다. 금요일에 모여서 꿔니엔(過年)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중국인들 은새해첫날보다그전날저녁에모여서한해를보내는데에더큰의미 를 두죠. 그래서 한 해를 보낸다는 표현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우리는 새 해아침에서로문안하며한해를축복하는것이그들의문화와조금은다 르죠. 중국인들은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언어를 지키 기 위해 노력하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중국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민족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받아들였습 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딜 가든 회당을 결성하여 안식일마다 모이기를 힘 썼죠. 회당의 가장 큰 기능은 다름 아닌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역 만리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지만 회당에서 만 큼은 히브리말로 말씀을 듣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히브리말을 노출시켰습 니다.그렇게하지않으면그들의정체성은몇세대가지나면온데간데없 이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이국의 언어에 익숙하고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히브리어 교육을 고수한 것이죠. 안식일마다 히브리 성경을 들려주고 히브리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저에게 가끔 이민 교회 교육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이민자로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민족이라 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인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물론 영어가 편하고 영어가 모국어인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는 정체성이자 정신을 담는 그릇임을 믿습니다. LA에 있을 때 많은 이민 23세의 Korean- American들을 만났었습니다. 그들의 세대에 부모님은 영어만 강요했고 한 국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미국인들의 커뮤니 티에도 한인들의 커뮤니티에도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과 방황이 그들에게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인후예들에게서 한국어 를 거세해 버린 댓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반면에 뉴질랜드나 호주같은 이 민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한국어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좀 불편하더라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이민 생활이 훨씬 장구 하신분들앞에서모르는리일지모르나저는역사를겨봐야한다 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과 중국인들의 역사가 말해주는것은 언어와 정체 성은 우리 을 지하고 유지하게 해주는 핵심가치라는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124-10

제목: 눈을 감고 떠나라

 

1.믿음과 순종의 여정

지난 주에 우리는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본질이 떠나는 것에 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우리를 지탱해주는 익숙한 가치들과 사고 체계라고 했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옴으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세상은 참되고(truth) 선하고(good) 아름다운(beauty) 세상이었어요. 하나님은 이 선한 세상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에게 맡기며 대신 다스려 달라고 부탁하셨죠.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인간에게 위임하신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기까지 하셨다고 창세기 6장에서는 말씀하세요. 얼마나 이 세상이 엉망이 되었는지 하나님의 후회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의심과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와 심판의 악순환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해 내려갔습니다. 이 악순환을 하나님은 끊기를 원하셨어요. 새로운 선순환이 일어나기를 바라셨죠. 헝클어진 실타래를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려 놓으려면 실마리를 찾아야 하겠죠?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게 된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실수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작년에 예배의 실패, 소명의 실패라는 설교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예배와 부르심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에덴은 온 우주의 성전이었고 아담은 그곳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아담이 악의 세력과 손을 잡고 하나님이 아닌 것에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었죠. 자기가 보고 느껴지는 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순종하지 않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원상태로 돌려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브람과 사래가 아담과 하와의 반대로 해야 하는 겁니다. 아담이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구요. 아담은 순종하지 않았기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믿음과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을 중심에 놓았기에 아브람을 부를 때 하나님 자신을 강조합니다.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줄게. 내가 복을 배풀거야. 내가 저주할거야.” 계속해서 나, , , , , 하나님 자신을 강조합니다. 아담처럼 너 자신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따라가는 순종의 여정이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의 핵심이라는 것을 아브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 약속과 응답의 불연속성

아브람의 네러티브는 약속과 응답이라는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 지의 과정과 여정을 살펴 보면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는 배우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명령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너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 너는 복이 되라는 것은 명령이기도 했지만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명령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누리던 모든 안전한 기반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는 엄청난 상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 틀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고 새 판에서 시작해야 했기에 떠나야했습니다.

 

문제는 떠나는 약속에 순종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곧바로 성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 믿음 생활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죠. 내가 믿고 따라왔던 나 중심의 가치관에서 과감히 떠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탈출해서 떠나는 것이 신앙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향해 과감히 옮겨 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만 믿고 떠났는데 여전히 인생에 시험이 가득하고 약속의 성취는 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약속과 응답 사이의 불연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했으면 그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 약속이 응답되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이 생긴다는 거죠.

 

아브람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응답의 큰 틀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브람이 정작 겪고 있는 현실을 한 번 봐보십시오. 4절 말씀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진짜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혼자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내 사래는 65살 할머니고 조카 롯도 함께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 많은 식솔(members)들이 있었습니다. 재산도 많았는데 아마도 가축떼였을 겁니다.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 한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만도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드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저도 아내가 중국 선교에 동의하는데 7년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가부장 사회라지만 사래를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약속의 성취가 진행되는 것이 눈에 보여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줄곧 이동한 이야기만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에 세겜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신령한 참나무에서 제사가 드려지는 지방의 산당(High Place, shrine)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아브람이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연이어서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그 나무 밑에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는데 아브람은 그곳에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다는 겁니다. 비교대조를 하고 있는 거죠.

 

7절을 읽으면서 저는 피식 웃었습니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아브람에게 하는 말이잖습니까? “내가 너에게 이 땅 줄게.”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는 것은 더 큰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긴 합니다. 자손이 있어야 땅이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자손이 없으면 아브람에게 그 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의미로 따져 보면 네 자손에게 이 땅 줄게라는 말이 더 타당하긴 하죠. 문제는 다시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데도 아브람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엘과 아이성 사이의 산악지대로 갔다가 아예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네게브까지 이동해 갔다고 성경은 말해 줍니다.

 

왜 이동해 갔겠습니까? 그땅에서 정착하기가 녹녹치 않았던 겁니다. 아브람 혼자가 아니라 많은 식속들과 가축들을 거닐고 이동해야 했던 아브람을 그 땅 사람들은 반길 리가 없었겠죠. 아브람은 세겜 땅에서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결국 헤브론(Hebron)과 브엘세바(Beersheba)가 있는 네게브까지 이른 겁니다. 이스라엘 지형을 보면 세겜 북쪽으로 므깃도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 농사짓기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남쪽으로 산악지대가 나오고 그 산악지대보다 더 남쪽으로 가면 척박한 황무지가 나옵니다. 네게브는 농사도 짓기 힘들고 가축떼를 돌보기도 힘든 그런 황량한 땅입니다. 아브람이 세겜 남쪽으로 계속 이동해 갔다는 것은 남쪽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0절 말씀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땅에 기근이 듦으로 인해 아브람 가족이 약속의 땅에서 이탈해 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가나안 땅이 아니라 이집트 땅으로 피해갈 수 밖에 없는 처량한 나그네 신세가 아브람의 신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곳으로 왔는데 왜 이 모양인 겁니까? 왜 계속 이동해야 하고 왜 계속 삶은 지쳐만 가고 불투명해지기만 하는 겁니까?

 

3. 불투명한 삶, 그리고 신비

아브람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죠.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자기에게서 큰 민족이 나올 확률이 0%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합니다.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이 탄생하고 그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고 세계 모든 민족의 본이 된다는 그 높은 뜻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안갯 속입니다. 불투명하기만 한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아브람의 심정은 어떨까요?

 

방을 정리 어지럽히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치우고 정리하는 것은 어렵습니까? 아담의 길을 따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죄든 한 번 짓기 전에 갈등하고 고뇌하고 몸부림 칠지 모르지만 일단 한 번 선을 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그 죄는 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되는 건 어려울지 모르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람의 길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담이 망가뜨려 놓은 길을 다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수고스럽고 긴 싸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은혜라는 연료가 없이는 애당초 움직일 수 없는 길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도저히 시작되지 못할 기적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저도 20년을 계획하고 준비한 중국 선교사의 삶이 4년만에 추방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보면서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아니 황당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따라 온 것이 맞는 걸까라는 그런 의심이 생기더라구요. 이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내가 그려온 나의 비전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분명히 20년 넘는 시간 동안 검증의 과정을 거치고 여러 기적들을 맛보며 선택해 온 여정이었는데도 그런 의심이 들더라구요.  종잡을 수 없는 방황이 시작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있었더라구요. 중국에서 추방 되기 전에 하나님은 1년 동안 중국 사람들이 아니라 한인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인 교회를 하면서 생기게 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풀러 신학교 온라인에 등록해 놓았는데 추방 후 한 주만에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더라구요. 그 계기로 추방과 함께 미국에 건너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떤 영화 대사처럼 ~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불투명한 인생인데 정말 신비로 가득한 인생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삶이 오늘 내일만 불투명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불투명한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불투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는 삶 자체가 불투명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며 그분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구요.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유명한 장이죠. 거기서 아브람의 삶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18-9절 말씀입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

아브라함의 인생이 한 마디로 장막 인생, 텐트 인생이었다고 합니다. 약속하신 땅에 갔는데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이리 저리 떠돌아 다녔다.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텐트죠. 39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도착했는데도 야 여기가 아닌가봐~ 딴 데로 가자.” 베델과 아이 사이에 텐트를 쳤는데도 가나안 사람들에게 밀려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는 서러움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랑처럼 보이는 불투명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는 약속의 지연과 유보를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했다는 겁니다. 이 것은 우리 삶에도 시사하는 바는 믿음이라는 여정이 본디 그렇다는 겁니다. 뻔하다면 절대 신비롭지 못할 것입니다. 불투명하기에 우리 삶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때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선물을 갖고 계시는 분을 향한 신뢰

그런데 본문 가운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내용은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은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르다는 히브리 동사 카라는 큰 소리로 외쳐 부르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듣고 있습니까? 내가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긴 한 겁니까? 대답해 보세요.” 아브람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찾은 겁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은 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했던 그 행위였습니다. 제사장은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민족과 하나님을 연결할 다리 역할을 위해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 겁니다. 예배는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왔는데도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예배는 그의 삶에 드리운 안개를 거둬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겁니다.

 

지금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없는 선물 목록들만 잔뜩 받아 들고 떠나 온 아브람은 그 선물을 줄 수 있고 주겠다고 약속한 당사자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선물을 주실 분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서 선물을 주실 분을 압박하는 거죠. 아이들이 그러잖아요. 생일이 반 년 넘게 남았는데 그때부터 엄마 아빠를 압박합니다. “내 생일 때 이거 이거 사줘야 해요. 엄마 아빠 알지?” 이 아이들은 선물이 누구로부터 오는 지 압니다. 아직 자기 손에 선물이 들어와 있진 않지만 그 약속을 계속 상기시키는 겁니다.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삶 가운데 우리가 취할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물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5.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

여러분 중에 미국 시티즌십을 따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 국민이었다가 미국 국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구요 적잖은 문화충격을 극복하고 문화적응의 노력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여러분들 안에 한국 사람으로 가지고 계셨던 문화나 습관들이 있으시겠지만 그러나 미국화된 문화와 습관에 이제 익숙해 지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은 이것보다 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끊임 없이 나를 쳐서 복종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만큼 지난한(difficult) 여정입니다. 믿음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음을 믿는다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우리를 적응시켜 가는 기나긴 여정이 필요합니다.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은 바로 그것을 말해 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끝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거죠. 그런 면에서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이자 면입니다.

 

칼뱅은 이 믿음의 여정을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눈을 감고 떠나라너희 나라를 포기할 때까지 온전히 너희를 나에게 맡기라하나님께서 선물을 잔뜩 쥐고 계십니다. 그 선물은 나를 위한 선물인 줄 알았더니 내 손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선물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큰 줄 알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가고 있습니다. 부디 그 약속을 붙들며 가는 길이 험하고 고되고 지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계속 견지(유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을 견지하게(유지)해주는 힘은 선물을 쥐고 계신 하나님을 붙드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협화음들이 많아지고 혼란스런 상황에 처하시더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거쳐 왔던 과정입니다. 아브람은 계속 장막을 이동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많은 이동을 경험하신 분들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아실 겁니다. 저도 결혼 후에 9번의 이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1000Km 이상을 이동하여 이사를 한 것은 다섯 번이었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 인생의 주도권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어딜 가든 당신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 인생은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불투명한 삶을 즐기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겨드리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여정이 끝나면 선물 꾸러미들로 여러분의 텐드가 가득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착한 것 같지만 진짜 정착한 건지 의구심이 드시는 분들이 여기에는 상당히 많으실 겁니다. 그러한 불투명한 인생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찾으시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통해 선물을 주시고 우리 삶에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Main text: Genesis 12:4-10

Title: Close your eyes and leave   / Translated by Myung-Ha Kim

 

1. The Journey of Faith and Obedience

Last week we talked about the essence of faith in letting go, through the story of Abram. “Mainland relatives and father’s house” are typical values and thought systems that support us. Our journey of faith begins when we leave our native land, our relatives, and our father's house, and enter the world of God. In the beginning, God made the world a true, good, and beautiful one. God entrusted this good world to humans made in his image and asked them to rule it instead. God has entrusted his kingdom to man. However, because of Adam and Eve's disobedience, God's plan began to go awry. Genesis 6 tells us that God even regretted creating such a world. You can guess how messed up this world is through God's regret.

 

The history of rebellion that began with Adam's doubt and disobedience continued to repeat itself. God wanted to break this vicious cycle. He hoped that a new virtuous cycle would take place. To untangle a ball of thread back to its original form, you must find the thread head, right? It was necessary to go back to the starting point, where mankind fell away from God, and go in the opposite direction to the mistake Adam and Eve made. This is the part where we can know what God requires of Abram. Last year, I gave a sermon titled “Failure of Worship, Failure of Call”. I have said that Adam and Eve's failure was deviating from the position of worship and calling. This is because Eden was the temple of the entire universe and Adam was the person God established as the priest there. However, Adam, the priest, joined hands with the forces of evil and began to worship things that were not God. At the center was himself. He did what he saw and felt.

 

Their fall began from doubting and disobeying the Word of God. How can I get this back to its original state? Abram and Sarai had to do the opposite of Adam and Eve. Since Adam did not believe the Word, Abram had to believe the Word of God. Adam did not obey, so Abram had to obey the word of God. Faith and obedience were the core content that God required of Abram. Because Adam and Eve put themselves at the center, God emphasizes Himself when calling Abram. “Go to the land I show you. I will make you a great nation. I'll make a fortune. I will curse.” Continue to emphasize me, me, me, me, me, God Himself. Like Adam, do not follow yourself, but follow God. Through Abram, we can see that the core of our journey of faith is the journey of obedience, believing in the promises God has spoken and following those promises.

 

2. Discontinuity between promise and response

Abram's narrative must be viewed in the broad framework of promise and response. We can learn and realize what our faith should be by looking at the process and journey of how the promise to Abram was being fulfilled. The promise to Abram was given in the form of a command. “Leave your country, your relatives, and your father’s house. “Be a blessing” was both a command and a promise. We can only guess how difficult it is to follow such a command. It was not easy for him to give up and leave all the safe grounds he pleased. This is because not only is there a threat to life, but it is premised on the consequence of losing everything you could depend on. It's not easy to leave. However, the Kingdom of God could not be built on the existing framework and had to start from a new one, so they had to leave.

 

The problem is that even though they obeyed the promise to leave, God's promise was not immediately fulfilled. The dilemma of our faith life is right here. A life of faith begins with leaving. It starts with boldly leaving the self-centered values that I believed in and followed. The point where faith begins is the transition point from self-centered to God-centered. By believing in God's Word and trusting in God's promises, we boldly move toward new values. However, there are many times when life is still full of tests and it seems like nothing has happened, let alone the fulfillment of the promise. You could call it the discontinuity between promise and response. This is an illusion that nothing is happening even when God gave us a promise and you realize that it will be fulfilled, but it takes too long for the promise to be answered.

 

I said that we should look at Abram's story as a frame of God's promise and its response, but take a look at the reality that Abram is actually experiencing. Verse 4 says that Abram believed God's promise and left. But he didn't leave alone. His wife, Sarai, a 65-year-old grandmother, and their nephew Lot also left with Abram. And there were many members in his family. Because he was a wealthy man, they probably had a herd of cattle. You should know that leaving Haran and going to Canaan is not an easy decision. We know that just convincing your wife can take a lot of energy and time. It took me 7 years for my wife to agree to go to be a missionary in China. Even in a patriarchal society, it would not have been easy to convince Sarai. After a long difficult journey, they finally arrive at the land of Canaan. Since they have obeyed and arrived, one would expect to see some kind of fulfillment in the promise of God. However, if you look at verses 6 through 10, the bible tells us only the story of their journey and moving from place to place, not anything about promises. At first, they arrived in the land of Shechem. People there had a local high place (shrine) where sacrifices were offered at the sacred oak tree. Why is it that the Canaanites lived there and that Abram built an altar there? The Canaanites were in idolatry under that tree, and Abram built an altar to worship God. The Bible is making a comparison.

 

As I read verse 7, I chuckled. “I will give this land to your offspring.” Eh? God is talking to Abram who left everything and obeyed to receive the promises of God. Shouldn't it be "I'll give you this land"? Of course, giving this land to his descendants is a reminder of a greater promise. The land has meaning only when there are descendants. What would the land mean to Abram if he had no offspring? In that sense, “I will give this land to your offspring” makes more sense. Despite the recent reminder of God’s promise, we do not see anything but the continuous migration of Abram and his companions. The Bible tells us that they went to the mountainous area between Bethel and Ai, and then moved all the way to the Negev, the southernmost point of Israel.

 

Why did they move? Because it was not easy to settle in the land. The people of the land couldn't have welcomed Abram, who had to walk and move around with many food and livestock, using the land’s resources and space. From the land of Shechem, Abram gradually went south and eventually reached the Negev where Hebron and Beersheba are. Looking at the terrain of Israel, the plains of Megiddo are formed to the north of Shechem, making it a good land for farming. However, a mountainous area emerges south of Shechem, and a barren wasteland emerges further south of the mountainous area. The Negev is such a barren land that it is difficult to farm and take care of livestock. The fact that Abram continued to move south of Shechem tells us that he was pushed south.

 

Verse 10 tells us that that was not the end, but that Abram's family departed from the promised land due to a famine in the land. Abram's life became that of a miserable stranger who has no choice but to escape to the land of Egypt, not the land of Canaan. Is this what God promised? Abram believed in God's promise and came to the place God showed him. Then, why is it like this? Why does Abram’s life keep getting exhausting and unclear?

 

3. An unclear life and mystery

Abram decided to believe in God who called him. He was unable to bear children. However, He chose to follow God. He chooses to believe God's Word, even though from a biological point of view he has a 0% chance of a great nation coming out of him. He chose to follow God’s promise and will that a great nation would be born through him, that nation would occupy the land of Canaan, and become an example for all nations in the world. Even so, his life is still in a fog. What about Abram's feelings as he has to continue walking down the unclear path?

 

Is it more difficult to clutter up your room or to clean and organize it? It is not difficult to follow Adam's path. You may struggle, agonize, and struggle before committing any sin, but once you cross the line, that sin becomes easy from then on. “It may be difficult to become a needle thief, but it is not difficult for a needle thief to become a cow thief.” Conversely, following Abram's path is not an easy task. It is because it takes a long and laborious battle to restore the path Adam destroyed. In a way, following God's will and being a Christian is hard work. It is a path you can’t go down in the first place without the fuel of grace. A miracle that cannot begin without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is a life of faith that follows God's promises.

 

I was quite taken aback when I saw that my life as a missionary in China, which I planned and prepared for 20 years, ended in expulsion after only 4 years. It almost felt like a joke. I began to doubt whether it was right that I had followed God. I also thought that this might not be my vision, that maybe I have drawn the path based on my preferences. It was definitely a journey that I had chosen through the process of verification for over 20 years and tasted many miracles of God, but I had such doubts. A wild wandering could have begun. However, in the midst of this journey, I came to think that there must be God's will.

Looking back later, I realized that there was specific guidance from God. Before I was expelled from China, God made me serve the Korean church, not the Chinese, for a year. And to solve the questions that arose while attending the Korean church, I registered online at Fuller Theological Seminary. Who would have known that I would come to the United States after a recent deportation from another foreign country? Like a line from a movie, I couldn't help confessing, "Oh, God had a plan." At that time, I came to think that it is an unclear life, but it is really a life full of mysteries.

 

Our lives are not only unclear today and tomorrow. Life itself is unclear. The journey of faith is unclear. The life itself that believes in and follows God's promises is choosing an unclear life. That is why we must rely only on God, discern God's voice, and follow Him. Hebrews 11 is a famous chapter that introduces us to the lives of those who lived such a life of faith. There, the life of Abram is evaluated like this. This is Hebrews 11:8-9. “8 By faith Abraham, when called to go to a place he would later receive as his inheritance, obeyed and went, even though he did not know where he was going. 9 By faith he made his home in the promised land like a stranger in a foreign country; he lived in tents, as did Isaac and Jacob, who were heirs with him of the same promise. “

It is said that Abraham's life was, in one word, “a life in a tent.” He went to the promised land but wandered here and there like a stranger living in a foreign country. A tent symbolizes nomadic people wandering here and there. This is verse 39. “These were all commended for their faith, yet none of them received what had been promised.”

Even after arriving in Canaan, the land of promise, he had to move somewhere else. Even though he pitched a tent between Bethel and Ai, he had to endure the sorrow of being pushed southward by the Canaanites. However, you will discover the mystery of God in the unclarities. It is said that the forefathers of faith experienced the delay and reservation of the promise of not receiving what was promised. What this also implies in our lives is that the journey of faith is inherently like that. If it is obvious, it will never be mysterious. Because it is unclear, we are thrilled when something mysterious happens in our lives.

 

4. Trusting in the Gift Holder

However, what we should pay attention to in the text is that Abram built altars wherever he went and called on the name of God. What does it mean to call on God's name? The Hebrew verb to call, ‘Kara’, means the action of calling out loud.

“God, are you listening? Am I on the right track? Please answer.” Abram desperately sought and found God. And building an altar was the act that Adam failed in Eden. Priests are those who build bridges between people and God. Abram built an altar and worshiped God in order to serve as a bridge to connect all nations with God. Worship is identity. Worshiping God is an act of confirming our identity as God's priests. Having come to his promised land, Abram has built an altar in the midst of his still unstable and uncertain life. He decided to call on the name of God. Worship was a struggle to reap the fog in his life.

 

Abram, who has left with a list of presents that are not yet in the palm of his hand, is calling to the one who can and promise to give them to him. Calling on God is an act of remembering the Giver of gifts, and putting pressure on God to give the gift. Children are like that. Their birthdays are over half a year away and yet they start to put the mom and dad under pressure. “I want this and that for my birthday, okay?” These kids know where gifts come from. They don’t have it yet, but they continue to remind them of it. This is the attitude we need to take in the midst of an unclear and unstable life. It is remembering God who promised gifts and calling on His name.

 

5. Being a People of the New Kingdom of God

Some of you have obtained US citizenship. Think about the process from being a citizen of the Republic of Korea to become a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It wouldn't have been easy. It probably took quite a bit of time, and it would have taken a lot of effort to overcome cultural differences and adapt. You may have some of the cultures and habits that you had as Koreans, but you are now accustomed to the Americanized culture and habits.

 

Building God's kingdom with God may require longer time and effort than this. It is because it requires an effort to constantly self-discipline in order to obey God's will. Being a Christian, being a disciple of Christ, and following Christ is a difficult journey. Faith is not a one-time event. If we believe that by accepting Jesus we have been accepted as children of God, we need a long journey to continue transforming us into citizens of God's kingdom. Abram's journey of faith tells just that. It tells us that receiving God's promise and becoming God's people is not the end, but just the beginning. In that respect, faith is not a point, but a line and aspect.

 

Calvin once described the journey of faith like this. “Close your eyes and leave… Entrust you completely to me until you give up your country.” God holds a bunch of gifts. I thought it was a gift for myself, but it was a gift that had to be passed on to others through my own hands. Nevertheless, we hold on to God's promise because we know how great the joy is when that gift is passed on to others through us. Please hold on to that promise and do not give up even if the road is rough, arduous, and exhausting. Continue to persevere. And remember that the only way to sustain that life of faith is to hold on to God who holds the gift. Never cease to cry out and worship to meet God.

If you find yourself in a chaotic situation with many sudden dissonances in your life, do not panic. This is the process that our ancestors of faith have already gone through. As Abram continued to move from tent to tent, he learned to obey God. Those of you who have traveled a lot know how difficult this can be. I also moved 9 times after getting married. Five of them moved more than 1000km. Do you know what you confess every time you move? “God, you are in control of my life. Wherever I go, you are my master and my life is in your hands.” Enjoy the unclear life of following God. Don't be afraid to surrender your life to God. Because at the end of the whole journey, your tent will be full of gift packages. There are probably quite a few people here who seem to have settled but have doubts about whether or not they are really settled. In the midst of such an unclarity, I hope you will call God, worship God, and find God. And through that journey, I bless you to deeply know the heart of God who wants to give gifts and bless our lives.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11:27-12:4

제목: 만민을 위한 선민

 

1.

제 군대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주임원사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은 그 부대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부대의 모든 분야에 간섭하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끔 못된 시어머니처럼 병사들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제가 주임 원사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저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교회 다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교회 관련된 주제로 시비를 걸고 싶었나 봅니다. “~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됐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만 다루는 종교인데 그걸 왜 한국 사람이 믿어야 하냐?”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못해 드렸습니다. 덕분에 얼차려 시간이 늘어나긴 했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종교이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성경을 왜 우리는 믿고 있는 걸까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민족을 부르셔야만 한 것일까요? 이스라엘보다 앞서 왜 아브람이란 늙으신 할아버지를 선택하셔야만 했을까요?

 

그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11장까지의 내용은 인류의 원역사(原歷史, primeval history)에 관한 내용입니다. 원역사라함은 인류 문명의 모든 시기에 경험된 보편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류 문명이 시작될 때부터 역사 속에서 반복적이고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을 기록한 역사라는 겁니다. 이 원역사에서 인간의 역사는 선하게 창조하여 시작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죠.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시작과 함께 영적 세계의 반역과 천사적인 존재의 반역에 동조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오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과 함께한 인간의 반역은 초동 진압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종말에 진압될 것이라는 암시를 우리에게 남겨주기만 했죠.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뱀의 머리를 밟지만 그 뒷꿈치는 상하게 될 것이다. 뱀과 인간의 하나님을 대항한 구테타는 초동에 진압되지 않고 종말에 진압됩니다. 요한계시록 19-20장에 가서야 옛 뱀이라는 이름으로 이 쿠테타 세력들은 무저갱(Abyss, 深淵)으로 집어 던져지게 됩니다. 이 인류의 시점과 종점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악의 세력과 동조하면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순환적인 역사(Cyclical history)가 되어버립니다. 즉 아무런 목적(telos, eschaton)도 없이 순환하기만 하는 역사인 거죠.  자세히 말해서 죄와 그에 대한 심판이 순환합니다. 이러한 순환적인 역사의 과정에서 여러 유형(type)의 인류가 출현하죠. 아담형, 가인형, 네피림(Nephilim), 바벨탑형 인류입니다. 아담형 인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욕망을 좇아간 인류입니다. 가인형 인류는 자신의 가족을 죽일만큼 인내하지 못하고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인류입니다. 노아시대의 네피림형 인류는 자기 가족을 넘어 다른 민족들을 죽이고 학살하는 인류로 음란하고 폭력적인 인류였습니다. 창세기 11장에 가서 인류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을 보여주죠. 하나님은 이런 과정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것은 죄와 심판이라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기존 인류에 대한 대안으로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 계획(redemption plan)의 시작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순환적인 역사 가운데 구속적인 역사(redemptive history)를 시작하고자 하신 겁니다. 이제 보편적인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선택된 사람과 선택된 민족에 의해 이끌어져 갈 역사인 겁니다. 보편적인 역사는 선택된 민족의 역사에 의해서 견인되어 나아갈 것입니다.

 

2.

창세기 10장과 11장에는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가 나오는 이유는 인류의 구세주가 여자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15).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중에서 뱀의 머리를 칠 구세주를 보낼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온 족보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란 뜻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직접 이끌어 가시는데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1장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셈족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셈의 후손이었던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명령하시죠. “너는 복이 될찌라(You will be a blessing)”. 그런데 왜 하필 아브람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미 출산의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한 75세의 늙은이인 아브람을 불러서 이 거대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것인가요?

20세의 팔팔한 청년이면 훨씬 수월했을텐데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절정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조의 축복은 모든 생물 세계와 인류를 지탱시키는 근본적인 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축복으로 끊임 없이 이어져 내려오던 족보가 아브람에의해 멈출 위기를 맞습니다. 창조의 축복의 관점으로 보면 아브람과 사래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낳고 낳음의 수 없는 반복 속에서 사래의 불임은 갑작스런 불협화음과 같습니다.

아브람의 본토 친척 아비집의 족보가 이어지지 못할 위기에 처해져 있는 상황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연적인 방식에 의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의 족보를 잇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로 세워진 견고한 문화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부부는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게다가 아브람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는 달의 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아브람은 달의 신의 저주를 받아 불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자신을 한탄했을 겁니다. 그의 삶은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기전의 아브람을 상상해 보면 그의 암울한 현실이 느껴집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 바깥에 방치된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운명주의에 주저앉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람을 저주로부터 부르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살고 있는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 갑자기 이런 명령을 여러분이 받는다면 어떤 느낌이시겠어요?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익숙한 곳을 떠나 전혀 낯선 땅으로 옮겨 가라는 겁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부장적인 권위 하에서 세워진 엄격한 사회 체계를 말합니다. 이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 과격한 요구였습니다. 나의 모든 안전망을 떠나야 하는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혈연적이고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연결고리를 끊으라는 요구는 정말 쉽지 않은 명령이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그러한 모든 연대와 연결고리를 끊고 떠나는 창조적인 분리를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출애굽기에 앞선 탈출의 이야기가 바로 아브람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그를 불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떠나는 대신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붙들고 믿음의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네 가지였습니다. , 큰 민족, 이름, 임재와 보호가 그것입니다. 이 네 가지 약속 중에 가장 놀라운 약속은 자기 세대에 대물림도 못하는 아브람을 큰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브람은 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합니까? 그것은 그가 세계 만민의 복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세계 만민의 복이 되기 위해 아브람은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의 결속에서 분리되어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한 개인을 지탱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생명과 같은 씨족 사회를 떠나라는 명령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제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될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방식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blood)과 육(body)의 유대로 무의미하게 순환되어 온 인류의 원역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의 유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위에 건설된 나라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야만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지연과 인종 그리고 이념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믿음 위에 새워진 새로운 나라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우리의 어순에 따라 해석이 되어 있지만, 3절의 목적절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수 있도록,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이 목적절에서는 아브람을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삼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만민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타락한 인류 전체를 한꺼번에 돌아오게 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선택된 민족을 통해 모든 민족을 돌아오게 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전 인류와 교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사람, 선택된 민족을 상대로 교섭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이들과 교섭하시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그러니까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생학적인(eugenics) 실험을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씨앗 하나로 시작하여 온 세상에 좋은 열매를 퍼뜨리는 실험을 하고 계신 겁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된 아브람이라는 씨앗 하나를 하나님은 집어 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사람들이 볼 때 싹을 띄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보잘 것 없는 씨앗인 겁니다.

 

4.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망가뜨려 놓은 아담형 인류의 대안으로 아브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브람을 축복한다는 말은 아브람과 같은 믿음의 길을 따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아브람과 같이 믿음의 결단을 하고 약속을 따라 가기로 결정하는 자들의 삶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할 것이다라는 뜻은 아브람이 따라간 믿음과 순종의 길을 반대하는 자들은 적대시하겠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7절에서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을 걷는 모든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난 사람들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저번에 칼럼에도 제가 한 번 쓴 적이 있는데요. 제가 이해하는 구약성경의 한 줄 요약은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은 몸과 정신이 이집트로부터 분리되고 탈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아닌 새로운 가치관을 선택하는 겁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체제 아래서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박차고 탈출하는 결단이 출애굽입니다. 왜냐면 이집트의 파라오 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출애굽의 원형적인 모습이 아브람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75세로 늙어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떠나는 결단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로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거룩한 분리와 탈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보호해주고 내가 의지해왔던 가치들 대신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붙드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민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다는 의미를 다른 이들보다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고국으로부터 떠나 있고 가족들로부터 분리된 느낌 아니까요. 공교롭게 오늘이 한국에서 설날 연휴입니다. 이런 명절이 되면 본토 친척 아비집이 더욱 생각나잖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복이 되라고 우리를 이곳에 두신 것이 아닐까요? 이민 생활이 30년이 넘으신 분에게 여쭤보았습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냐구요. 그랬더니 내 가족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그러시더군요. 한국에 있는 가족도 가족이지만 그들과의 유대는 희미해졌고 오히려 이곳에서의 삶이 익숙해진 것이죠. 저는 우리 믿음의 여정이 딱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우리가 익숙했던 가치관에서 떠날 때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너무나 낯설고 자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하지만 한 번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 성취되고 순종의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 이 기쁨에서 떠나 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설날에 본토 친척 아버지 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한 복을 약속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만들었듯이,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5.

하나님의 부르심은 저주받은 인생 마저도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히려 그 저주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셨습니다. 75세의 불임 부부였던 아브람과 사래는 저주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임 가운데 슬픔의 세월을 살아온 이 부부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모험스러운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에 힘 입지 않고는 우리는 옛 삶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전환점을 줄 만한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 가득한 저주와 불협화음들 속에서 우리는 괴로워 합니다. 그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조우할 때 우리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명주의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닉 부이지치 같은 사람들은 팔다리가 없는 너무나 좋지 않은 조건에 살아갑니다. 그가 운명주의에 빠져 살더라도 어떤 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밝은 얼굴과 삶의 태도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죠. 헬렌 켈러는 태어난지 19개월만에 시력과 청력과 말을 잃어버리는 3중 장애를 겪습니다. 하지만 설리반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대학에 가게 되었죠. 87세의 나이에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장애우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말씀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하다는 고린도후서 4:16-17절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명주의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우리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새로운 미래로 안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도 닉 부이지치나, 헬렌 켈러처럼 우리 삶에 드리운 저주스러운 것들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일어서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의 무질서를 하나님이 수습해 가시는 시작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하나님은 무질서한 창조 이전의 세계로 회귀하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노아 이후, 인류는 하나님을 향해 더 강한 적대감과 반항을 통해 이 세상을 무질서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죠. 그 것을 수습하기 위해 하나님은 히든 카드를 꺼내 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한 노 부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새롭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이 인류에 소개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막혀버렸던 복의 댐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선택하셔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시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됩니까?이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신뢰하고 믿고 따라가느냐 입니다.

아브람처럼 나의 예전의 가치관과 세계관 가운데서 분리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아직 목적 없이 반복되는 창세기 3장에서 11장 사이 어디매서 헤매고 계신 겁니다. 인생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대안적인 인생의 목적은 복이 되는 인생입니다.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이 복을 누리는 인생이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의 씨앗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많은 이들이 따 먹으라고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 복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요 복의 유통자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변과 여러분의 이웃들의 삶에 많은 열매들이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복이 되는 인생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저주의 그늘을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 젖히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Microsoft Word - Sermon script_translation_1222023.docx

1/22/2023 One Heart Church
Text: Genesis 11:27-12:4
Title: The Man Chosen for All Peoples / Translated by Wi Chungil

1.
This is the story of my military days. The person with the title of chief sergeant is the person who acts as the mother of the unit. Think of him as someone who interferes and nags all areas of the unit. Sometimes he even gives his soldiers a hard time, like a mean mother-in-law. I don't remember what happened, but I was being punished on my knees in the chief's office. But then, this person started arguing with me. Since he knew I went to church, he must have wanted to argue with a church-related topic. “Hey~ Christianity started in Israel and only deals with the history of Israelis, so why should Koreans believe in it?” At the time, I couldn't clearly answer that question. Thanks to that, my punishment got longer. Why do we believe in the Bible, which is the religion of Israel in the eyes of the world and deals with the history of Israel? Why did God have to call the chosen nation of Israel? Why did he have to choose an old grandfather named Abram before Israel?

To understand the story, you need to understand the story in Genesis 1-11. The content up to Genesis 11 is about the primeval history of mankind. Primeval history refers to the universal history experienced in all periods of human civilization. In other words, it is a history that records phenomena that have repeatedly and universally appeared in history since the beginning of human civilization. In this primeval history, human history begins with good creation. But as time went on and history progressed, things took a turn for the worse. This was an unintended direction when God created the world and mankind. With the beginning of Genesis, there is a story of Adam and Eve who sympathize with the rebellion of the spiritual world and the rebellion of angelic beings. The rebellion of man with the serpent in Genesis 3 was not suppressed in the first place. It has only left us with a hint that it will be subdued in the apocalypse in the last days. The seed of the woman will appear and step on the serpent's head, but it will bruise its heel. The coup d'etat of the snake and men against the God is not suppressed at the beginning, but is suppressed at the end. In Revelation 19-20, these coup d'état forces are thrown into the abyss under the name of 'the old serpent'. The theme that penetrates the beginning and end of this human race is the Kingdom of God. In Genesis 3, human history has become a cyclical history since humans sympathized with the forces of evil. In other words, it is a history that just cycles without any purpose (telos, eschaton). In detail, sin and judgment for it cycle. In the course of this cyclical history, many types of mankind emerged. They are the Adam type, the Cain type, the Nephilim type, and the Tower of Babel type. Adam-type mankind is a mankind that has disobeyed God's command and pursued its own desires. The Cain-type mankind is a human being who has not endured enough to kill his own family and has not overcome the temptation of sin. The Nephilim type of Noah's era was a lewd and violent mankind who killed and slaughtered other peoples beyond their own family. In Genesis 11, mankind shows arrogance over the position of the one and only God. God decides to choose one person in this process. It was the beginning of God's redemption plan as an alternative to the existing mankind repeating the vicious cycle of sin and judgment. He wanted to begin a redemptive history in the midst of a cyclical history of sin and evil. Now, God intervenes in universal history, and it is a history that will be led by the chosen person and the chosen people. Universal history will be driven by the history of the chosen people.

2.

1

Genesis 10 and 11 contain genealogies. The reason for the genealogy is that the savior of mankind will come from the woman's descendant (Genesis 3:15). Since God will send a savior from among the woman's descendants to strike the serpent's head, the genealogy here has a redemptive-historical meaning. The redemptive-historical meaning means that God directly leads history, leading it in the direction of redeeming all mankind. In particular, in the second half of Genesis 11, the genealogy of the Semites who were chosen by God appears. Abram, the son of Terah, a descendant of Shem, was chosen. And God commands Abram. “You will be a blessing”. But why Abram? Why is God calling Abram, a 75-year-old man who has already completely lost the possibility of childbirth, to begin this great work of redemption?

It would have been much easier for a 20-year-old spunky young man.

The culmination of God's blessing to mankind in Genesis 1 was,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earth." This blessing of creation was the fundamental driving force that sustained all living things and mankind. With this blessing of creation, the genealogy that has been continuously passed down is in danger of being stopped by Abram.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blessings of creation, Abram and Sarai are cursed. Sarai's infertility in the countless repetitions of giving birth is like a sudden dissonance. We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situation in which the genealogy of Abram's relatives father's house is in danger of not being continued. Abram was a man who, by natural means, failed to carry on the genealogy of his native father's family. The ‘your father’s household” symbolizes a solid culture built on patriarchal ideology. In these patriarchal societies of the ancient Near East, couples who failed to produce male heirs were thought to be cursed by the gods. In addition, Ur of the Chaldeans, Abram's hometown, was the center of a pagan religion that worshiped the moon god. Before he was called, Abram must have lamented himself that he was cursed by the moon god and was infertile. His life would have been lethargic and unmotivated. If you imagine Abram before God's call came, you can feel his gloomy reality. He must have been living a life neglected outside of God's purpose. He was in perfect condition to sink into fatalism. God is calling such Abram from the curse

3.
God commands Abram to “Leave your country and your relatives and your father’s house.” He commands Abram to leave the land where you live, the place where you were born, and the house of your father. How would you feel if you suddenly received an order like this? Wouldn't it be embarrassing? It means leaving a familiar place and moving to a completely unfamiliar land. The mainland relative father's house, again, refers to a strict social system established under patriarchal authority. Breaking free from this social system was too radical a demand. Because it is a demand to leave all my safety nets. Demanding the severing of all kinship, cultural and religious ties would have been a very difficult order.
Abram had to go through a creative separation, to sever all such solidarity and ties. The story of escape prior to Exodus begins with Abram. God is not calling him out at random. He gives him a promise in exchange for leaving. Abram held on to this promise and ventured to escape by faith. God's promises were fourfold. It is the land, the great nation, the name, the presence and protection. Among these four promises, the most amazing promise is that Abram, who cannot be passed on to his own generation, will be made the ancestor of a great nation.

Why did Abram have to leave his native land, his relatives and his father's house, and go to the land indicated by God? It is so that he can become a blessing to all peoples of the world. In order to become a blessing to all peoples of the world, Abram had to escape, separated from the mainland and the bonds of his kinsmen and father's house. What is the meaning of the order to leave the clan society, which is like a life that can support and protect an individual?

2

Now, it means that the kingdom of God that will begin with Abram is not a nation established in the existing way. In order to renew the original history of mankind, which had been meaninglessly circulated by the bond of blood and body, it was necessary to start the kingdom of God on a new foundation. This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was not to be established through the ties of blood and flesh, but had to be built solely on faith in God. That's why Abram had to leave his native land, his relative's father's house. Tha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not a nation created by regionalism, race, or ideology. It is a new nation built on faith by those who believe in and obey the Word of God.

The Korean Bible is interpreted according to Korean order, but if we interpret the purpose clause (“so that~”) of verse 3 correctly, it is as follows.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whoever curses you I will curse, so that all peoples of the earth may be blessed through you.” In this purpose clause, God's intention to make Abram the reference point for blessings and curses is clearly revealed. The reason is to bless all people. If it was not possible to bring back all of the fallen mankind at once, then there was no choice but to bring all peoples back through one chosen person. Now, God is not negotiating with all mankind, but with the chosen person and the chosen people. The reason He is negotiating with them is very clear. “To bless all nations,” that is, to save all nations. God is starting a eugenics experiment right now. He's experimenting with starting with one good seed and spreading the good fruit all over the world. God picked up one seed, Abram, who was chosen to save all mankind. However, the seed is an insignificant seed that seems to have no possibility of sprouting when people see it.

4.
God is calling Abram as an alternative to the Adamic mankind who destroyed the whole world. To bless Abram means to follow the same path of faith as Abram. God will bless the lives of those who, like Abram, make a decision of faith and decide to follow the promise. Conversely, ‘he who curses him will be cursed’ means that those who oppose the path of faith and obedience followed by Abram will be hostile. Galatians 3:7 says that all Gentiles who walk the path of faith like Abraham can become Abraham's descendants. “Know,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born of the faith are the descendants of Abraham.”
I wrote about it once in a column the other day. The one-line summary of the Old Testament that I understand is “the story of Israel’s failed exodus.” Exodus means the separation and escape of body and spirit from Egypt. It is choosing a new value system, not an existing value system. The Exodus is the decision to escape from the life of being satisfied to some extent under the Egyptian pharaoh system. Because the Egyptian pharaonic system is a way of life that goes against the kingdom of God. The archetype of this Exodus is appearing in Abram. It is a decision to leave by believing in God's new possibilities, not in one's ability and potential to grow old at the age of 75.

This decision is required of all those who decide to become descendants of Abraham. Being a Christian, being a disciple of Jesus Christ, begins with a holy separation and exodus. It starts with holding on to the word of God, the promise of God, instead of the values that protect me and that I have relied on.

Thankfully, because we live as immigrants, we may feel more sensitively than others what it means to leave the ‘mainland relatives and father’s house’. You know the feeling of being away from home and separated from family. Coincidentally, today is the Lunar New Year holiday in Korea. When it's a holiday like this, don't you think of the mainland relative's father's house? I believe that there will be God's plan towards us who left the mainland relatives and father's house. Isn't God putting us here to be a blessing in this place? I asked a person who has lived an immigrant life for over 30 years. Don't you feel like going back to Korea? Then he said that my family lives here, so I can't leave. My family in Korea is also a family, but the bond with them

3

has faded, and I have become accustomed to life here. I think our journey of faith is exactly like this. At first, when we leave the values we are used to, God's values are very unfamiliar and we are tempted to return to the previous ones. However, once the promise given by God is fulfilled and you begin to enjoy the joy of obedience, you cannot leave this joy.

We believe that God is promising the blessings promised to Abram to us who are away from our relatives and father's house on New Year's Day. Just as God made Abram a source of blessing, God is calling us to make us a source of blessing.

5.
God's call turns even the cursed life into a source of blessing. Rather, through the curse, God gave the promise and opened a new future. Abram and Sarai, a 75-year-old infertile couple, had a cursed life. However, God is preparing a new future for this couple who have lived through years of sorrow in the midst of infertility. Encouraged by God's Word, they decide to embark on an adventurous journey. Without the power of God's Word and God's promises, we cannot escape from our old life. God's Word has enough power to give you a turning point in your life. We suffer in the curses and dissonances that fill our lives. What we must hold on to at that time is the Word of God. When we encounter God's Word, a new page in our lives opens. The word of God calls out those who have fallen into fatalism and nihilism and leads them to the promised land. People like Nick Vujicic live in very bad conditions without limbs. No one can blame him if he lives in fatalism. However, he impresses many with his bright face and attitude towards life. Helen Keller suffered a triple disability losing her sight, hearing and speech when she was 19 months old. But she went to college because of Miss Sullivan's devoted love. Until he passed away at the age of 87, he gave a light of hope to many people with disabilities. It is said that the word she loved the most was 2 Corinthians 4:18, “What is seen is temporary, but what is unseen is eternal.” God's Word makes us overcome fatalism. It is God's Word and God's promise that opens up new possibilities in our lives and guides us to a new future. I hope that we too, like Nick Vujicic and Helen Keller, will hold on to God's promise and stand up from the cursed things in our lives.

Today's message looked at the starting point of God's rectification of the world's disorder that began with Adam and Eve. Through Noah's flood, God wanted to renew this world even by returning to the world before the disorderly creation, but it did not work according to God's will. After Noah, mankind was driving this world into disorder through stronger hostility and rebellion toward God. To rectify that, God took out a hidden card. God chose an insignificant elderly couple. Through them, a new and alternative way of life will be introduced to mankind. Through them, the dam of blessing that was blocked will break down. What gives us hope at this point is that God chooses and uses even insignificant people like us. You have enough conditions to become a channel of God's blessing. Because you have been invited by God. Abram can do it, but why can't I? The important thing now is whether you accept the new values presented by God and trust, believe, and follow God's word, the promise.

If you, like Abram, have not been separated from your old values and worldview, you are still wandering between chapters 3 and 11 of Genesis, which are repeated aimlessly. Life has a clear purpose. The alternative purpose of life that God presents to us through Abram is a life of blessing. It is a life that others enjoy blessings through me.

God has called you as a seed. He has called you to bear good fruit through you and to have many people pick and eat the fruit. The reason God gives us promises and blessings is that blessings flow to all nations through those blessings. You are the source of blessings and the distributors of blessings. I hope that many fruits will be borne in the lives of those around you and your neighbors through you. I wish you a blessed life in your place of life. I sincerely pray that you will rise above the shadow of the curse and open up a new future opened by God.

4

Posted by speramus

안녕하세요.
펜데믹이 일상화 되면서 풀러신학교의 유학생 모집이 다시 활발하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이 포스팅은 켈리포니아 페서디나 지역에 처음 오시는 분들이 생활하시는 데 필요한 여러 정보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저희가 2019년 선교사 안식년으로 풀러신학교에 공부하러 왔을 때 선배 선교사님께서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진 면들도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1. 보험

1) 부모 중 한 명이 학생비자일 경우 저소득층 보험 (Medi-Cal보험-병원에 갈 때 무료/ 카이저보험-소액의 돈을 내야 함)이 18세 미만 자녀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보험은 Public Social service 사무실 가셔서 직접 신청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은 무조건 이 보험 신청하시구요, 어른들은 설왕설래합니다. 이걸 받으면 나중에 영주권 신청할 때 안될 수도 있다는 설들이 돌아다니니까요. 본인이 선택하시는 거니 어른들은 신중하게 신청하십시오. 아이들은 무조건 됩니다. 미국은 아이들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나는 관대하다^^"

955 N Lake Ave, Pasadena, CA 91104
이 주소가 풀러 신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소셜 오피스입니다. 저소득층 Medi-Cal 신청하러 왔다고 말하면 됩니다.
참고로 메디켈은 연방정부 보험입니다. 주마다 이름이 다 다르고, 켈리포니아에서는 메디켈이라 부릅니다.
신청하러 가실 때는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무료 점심 확인증(저소득층증명), 1-20, 운전면허증이필요합니다.

2) 메디켈 보험으로 이용 가능한 병원
한인 치과-예치과 (LA 213-383-8275)
미국 치과- 알함브라 (626-457-1702)
김소현 한의원
메디캘 카드가 나오면 소아과, 치과를 한 군데 정해야 합니다. 엘에이 다운타운 한인소아과 중메디컬 보험을 받아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3) 만약에 응급상황이 생기면 종합병원(Hospital) 응급실로 가시면 됩니다. 미국은 돈을 안 내도우선 치료부터 해 줍니다. 나중에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오지만, 저소득층이라는 것을증명하면 거의 치료비를 받지 않는 수준의 소액만 내라고 합니다.

Luskin Orthopaedic Institute for Children

403 W Adams Blvd, Los Angeles, CA 90007
저희는 남자아이만 셋을 키웠기 때문에 기브스를 많이 했는데요. 이 병원으로 가세요. 풀러 신학교에서 차로 30분 안에 갑니다.
아이들 꿰매야 하는 경우도 이리 가세요. 저희는 아케디아라는 곳에 있는 풀러에서 가까운 일반 병원으로 갔더니 형편 없는 인턴이 꿰매는 바람에 아이 얼굴에 상처가 너무 심하게 남아 있어 지금도 속상합니다.
저 병원에 가셔서 성형외과 의사 만나 꿰매고 싶다고 말씀하세요.


2. 학교생활(자녀들)

1) 미국은 일 년에 두 번 학교 상담(컨퍼런스)이 있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가셔서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시면 됩니다.
2) 학교에서는 운동부, 밴드 활동, 학교행사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참여할만한 활동부서를 찾아 등록하게 하시면 즐겁고 의미 있는 학교생활이 될 것 같습니다.
3) 미국사람들은 알레르기가 많아서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간식과 점심으로 땅콩이 들어간 음식을 못 가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피넛 버터 바른 식빵이나 과자 중에서 건과류가 첨가된 과자는 가져가면 안 됩니다.
4) 미국학교는 아이에게 볼일이 있거나 학교에 일이 있어 가게 되면 먼저 학교 사무실에 가서사인 업(이름 서명)을 하고 스티커를 부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3. 장 보기 (글로서리)

1) 한국 마켓에 가실 경우(LA)- 주로 한인타운에 있음 (시온 마켓, 한남 체인, H 마트, 갤러리아).
2) 코스코(회원권있어야 함), 샘스클럽(월마트에서 운영하는 코스트코 같은 곳, 회원제)
코스코는 알함브라 지점이 차로 15분 정도 걸리고 제일 가깝습니다. 

3) 일반 과일이나 채소 그리고 고기는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Ralphs나 Target이라는 수퍼를 이용하셔도 됩니다. 이 두 수퍼마켓은 기숙사에서 걸어서도 가는 곳이니 차 없으실 때 이용하십시오.
처음 오시고 차가 없을 때 저같은 경우 유머차 가져가서 수박이나 물 같은 것을 사다 나르기도 했습니다.Super King Market은 야채가 무진장 쌉니다. 야채 장 보시려면 여기를 이용해보세요. 차로 12분 거리입니다. 주소는 2260 Lincoln Ave, Altadena, CA 91001

4)중국 물건을 사고 싶으시면 Ranch 99 Market 을 찾아가세요.
    멕시칸 마켓을 가기 원하신다면 Vallarta Supermarket 으로 가세요. 여기 고기가 조금 싼 편이예요. 다양한 치즈들도 싸죠.
    주소는 655 N Fair Oaks Ave, Pasadena, CA 91103


4. 미용실
1) 수지 미용실- 예약해야 함 , 28 Orthwoods Ln LA Crescenta, CA 91214 전화번호: (760) 673 8289
2) 은혜 미용실- 한인타운 소재, 예약 안 해도 됨, 신학생 싸게 해주심
2897 W. Olympic Blvd #107 Los Angeles, CA 90006 전화번호: (213) 252-9191


5. 방과 후 활동(아트, 레고, 농구, 수영 등등 / K-12/ adult course )파사데나 중심
파사데나에 거주하시면 가격할인 되고, 간혹 무료반도 있습니다.
아이들 놀릴 수 있는 동네 공원은 아래와 같습니다.
363 E Villa St, Pasadena, CA 91101(빌라팍) - 풀러에서 가장 가깝고 야구, 농구, 축구, 넓은 뜰이 있습니다.
2575 Paloma St, Pasadena, CA 91107(빅토리팍)- 풀러에서 차로 10분 거리고 정말 큰 부지에서 아이들 놀리기 좋습니다.
1081 Air Oaks Ave, Pasadena, CA 91103(로빈슨 팍)
맥도날드 파크도 풀러에서 5분 거리에 있고 테니스 벽치기 하기도 좋습니다. 농구 코트 야구장도 있구요.

테니스 코트는 Rosebowl Aquatic Center라는 실외 수영장을 치고 가시면 그 수영장 바로 옆에 5면의 테니스 코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녁 9시까지 세 면은 레슨에 사용되어 일반사람들은 2면 만 이용할 수 있어요. 
일요일은 사람들이 오히려 없어서 이용하기 편리하실 겁니다.
여기가 다 차고 사람이 많으면 La Canada Highschool의 테니스 코트를 이용하세요.
아래 주소를 치고 가십시오. 5면이 있고 로즈볼 테니스 코트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4463 Oak Grove Dr, La Cañada Flintridge, CA 91011
Washington Park 에도 테니스 코트가 두 면 있습니다. 여기는 벽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코트들은 저녁에도 서치라잇을 비쳐주기 때문에 테니스 하기 좋습니다. 

수영장은 Rosebowl Aquatic Center 의 회원이 되셔서 하시면 됩니다. 퍼블릭 수영장이예요.
아이들 점심 할인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있으면 싼 가격에 회원이 될 수 있는 걸로 압니다. 저소득층 혜택이죠.


6. 성인들을 위한 ESL Class(F1 F2 비자일 때)
주변의 커뮤니티 대학들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무료 영어 강의들이 있습니다. 
가장 접근하기 좋고 무료인 곳은 다음입니다.
GCC(Glendale Community Collage)에서 무료로 수강 가능합니다.
영어 베우실려면 GCC를 등록하세요. 외국인들에게 공짜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학교 내의 특별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두 학기 했는데 정말 많이 도움 됐어요. 지시시가 캠퍼스가 두 개 있는데 Verdugo 캠퍼스의 영어 특강을 들으시면 되구요.
감리교 교회를 빌려서 하는 클래스도 있는데 저는 이 교회에서 하는 것에 참여하고 펜데믹 터지면서 버두고 캠퍼스를 이용했어요.
PCC( Pasadena Community Collage)는 유료


7. 이중언어학교 (Public 학교) 소개
간단한 한국어 시험을 보고 입학 가능
마크캐플 초등학교 (Mark Kepple Visual Performing Art School- 글렌데일 / K-8 학년)



8. 운전연수 안내
박제영 전도사 (213)215-7645(선교사 할인, 목사는 일반 가격)
미국에서는 자기가 차를 가지고 가서 운전면허를 봐야합니다.
차가 없을 경우는 친구차를 몰고 가서 봐야 합니다. 
운전연수를 받으면 그 분이 자기 차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잘 이용해 보십시오. 아마 운전 면허 따실 때까지 총 비용이 150-200불 정도 지불해 드려야 할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요.

10. 여행정보
1) 국립공원을 많이 다닐 계획이면 국립공원 연간 패스 구입을 권장합니다. (한 장 80불). 참고로 4학년 학생을 가진 부모는 국립공원에서 1년 무료 이용권을 출력하는 싸이트가 있습니다. 잘 찾아 보시고 1년 무료 이용을 시도해보세요.
2) Hotels.com 에선 10회 이용할 때 1회 무료이다. Tripadvisor 에서는 여러 혜택이 있다.
3) 숙소 예약 시엔 꼼꼼하게 어떤 것들이 있는지 체크해야 한다. 본인 차로 갈 계획이면 꼭점검을 받는 것이 안전하다.
4)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우면 되도록 빨리 예약해야 한다. 요세미티나 그랜드캐년은1월이 되면 5월 말 캠핑 예약이 폭주한다.

요세미티 같은 곳에서 캠핑을 추천드립니다. 요세미티 말고도 다양한 켐핑 싸이트들이 있는데 receation.gov 에서 예약하면 되구요.
국립 공원 캠핑 싸이트는 자리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가시고자 하는 날의 10일 전부터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예약을 캔슬한 자리들이 한 두 개씩 나옵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요세미티 같은 곳에서 캠핑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5) 여행도착지는 visitor center 로 해놓고 도착하면 그곳에서 지도를 받고 동선을 어떻게 짤지설명을 듣는 것이 유익합니다.
6) 장거리 여행에서는 꼭 밥솥, 라면, 밑반찬 등을 챙겨가면 좋아요.
7) 아이들이 좀 크면 계획에 참여시키고, 가고 싶은 곳을 함께 정한 다음 리서치를 시킬 수도있다. 여행 후에 기행문을 쓰게 하거나 사진 등을 사용해서 작은 책을 만들게 하면가족들만의 소중한 기록이 된다.


11. 추천 여행 코스 (캘리포니아 주변)*

1) 캐년 써클 (유타, 아리조나 주)
집→ 라스베가스(1박) 자이언캐년, 브라이스 캐년 케이납(1 박) 앤털로프 캐년/페이지(1박) 모뉴먼트밸리 그랜드캐년(2박) 세도나(1 박) 후버댐 라스베가스(1 박) 데쓰밸리 집
- Zion 캐년은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셔틀을 타고 포인트들을 구경한다. 국립공원 내의셔틀버스는 다 무료이다.
Zion Canyon, Grand Canyon, Bryce Canyon, Arches Canyon 등을 일컬어 캐년 써클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보기에는 많은 날이 필요하구요. 아예 작정하시고 가셔야 할 겁니다.
좀 비싸긴 하지맞 저런 국립 공원 안에 랏지를 잡아서 머무시면서 등산로를 도시는 것은 국립 공원을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랏지는 250불 정도가 기본이니 큰 맘 먹고 잡으셔야 합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특히 자이언 케년은 랏지에서 머무시면서 트레일을 도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리조나의 Page 에 숙박을 예약하고 Antelope Canyon, Horse Shoe Bend, Lake Powell 을 하루에 다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 여행에서 다른 주들을 넘나들면서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유타와 아리조나는 1시간 차이가 나죠. 두 주가 붙어 있는데 경계를 몇 번 넘나들게 되니까요.

2) 요세미티(2박) 샌프란시스코(2박) 몬테레이/17 마일 솔뱅 산타바바라 집
- 요세미티는 꼭 공원 안에서 최소 2 박을 추천. 예약이 일찍 끝나므로 서둘러서 연초에예약하자.
-1번 국도는 아름답지만, 운전하기가 만만치 않다. Monterey, Pebble beach, 17 마일 절경이 매우 아름답고, 골프 치는 분이라면 17마일의 골프장을 이용해 보세요. 아니면 드라이브만 해도 멋집니다. 몬트리는 센프란시스코 여행에서 빼먹지 말고 꼭 가세요.
big sur라는 곳도 유명한데 다리가 유명하다 합니다. 다리 배경으로 기념 사진 남기는 것은 필수죠.

-솔뱅은 산타바바라 여행에서 빠지지 말아야할 관광지죠. 덴마크 민속 마을로 아기자기합니다. 안데르센 박물관도 있다. 그런데 별거 아니네 할 수도 있으니 기대는 말고 가세요. 솔뱅 가실 때는 Lake Cachuma 호수를 한 번 들러보세요. 인공 호수인데 캠핑장 예약해서 캠핑하기도 좋습니다. 솔뱅은 요세미티나 센프란시스코 여행길에 내려오면서 들르셔도 되지만 산타바바라 하루 바람 쐬러 가시면서 살짝 한 시간 만 더 올라가셔서 보고오셔도 좋을 겁니다. 
산타바바라에 가시면 Habit 이라는 켈리포니아 태생의 햄버거 집이 있는데 그 햄버거 1호점이 산타바바라에 있어요. 
그리고 산타바바라 시내는 걸어서 구경하기에 아기자기 하고 볼거리들이 많아요. 아이스크림 집도 맛난 집이 있으니 잘 찾아서 드셔보세요.

3) 샌디에고 (강추)
샌디에고는 저희 가족이 가장 좋아했던 도시로 바람쐬러 가기 좋은 곳이죠.
콜로라도 섬에 가셔서 석양을 즐겨보세요. 거기서 미드웨이 전함 있는 곳으로 유람선도 탈 수 있습니다.
Gas lighting 거리인가? 이름은 다시 확인해보시죠. 거기가 메인 도로인데 볼 거리들이 많습니다.
phills Barbeque 라는 폭립 식당을 꼭 가보세요. 맛집입니다.
-아이들이 어리다면 샌디에고의 동물원, 사파리, 씨월드를 패키지로 할인해서 판다. (코스트코에있음). Sea World 는 1월에 사면 연간 패스를 준다.
-레고랜드는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여름엔 워터파크도 연다.
- 샌디에고는 멕시코 국경도시라 타코가 맛난 집들이 많아요. 타코 안 드시고 오시면 손해 보시는 겁니다 ㅎㅎ
프레스토 타코(새우가 맛있음), Taco Stand 같은 곳은 후회 없이 드실 겁니다. Vallarta 라는 타코집도 맛있다고 소문은 들었습니다.
-이탈리안 스트릿 가시면 맛집이나 카페들도 있습니다. 


4) 남북횡단
-5 번 국도로 새크라멘토를 지나서 쭈욱 올라가면 포틀랜드, 시애틀을 지나 캐나다 밴쿠버까지갈 수 있다. 멀긴 하지만, 산과 바다가 가까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릴 곳이 많다. 오리건해안을 따라 나오는 비치와 절경도 좋고, 레드우드 국립공원도 들러가자. (큰 나무 숲)
- 오리건 주는 sales tax 가 없으므로 쇼핑하기에 좋고 우드번 아울렛은 정말 싸고 좋다.포틀랜드는 강, 바다, 산으로 둘러싸인 친환경 도시로 독특한 매력이 있다.
- Mt. Rainier 국립공원도 캠핑강추 천국 같은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이름도 Paradise.

5) 당일치기 가능한 곳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Knott's Berry Farm/Six Flags Magic Mountain
LA Zoo (그리피스 공원 안에 있음)
- 산타모니카 비치와 몰 (몰에 주차하면 90분 무료)
- 헐리우드 (Mall 에 주차하고 information center 에 가면 주차 확인해줌)
- 로데오 거리, 베버리 힐스 (인터넷에서 스타의 집 지도다운 가능, 쿼터로 거리주차)
- 게티 센터 (주차비 16 불만 내고 입장료는 없음), 아주 큰 미술관임, 게티 멘션이라는 게티 사촌 미술관도 있는데 여기는 말리부 해변 근처에 있는 그레코 로만 스타일의 정원 집이라 보면 됩니다.
- 그리피스 천문대(월요일은 휴관, 입장 무료) Griffith observatory
- 말리부 비치, 롱비치 (아쿠아리움, 퀸메리호), 라구나 비치/뉴포트 비치/레돈도 비치(횟집)
-카탈리나 섬(크루즈)
- The Grove (mall), 그루브 몰 바로 옆의 파머스 마켓을 꼭 들르세요.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더 핑크 핫도그를 먹어보세요.
- 우정의 종각, 토렌스 근처에 있는 한국식의 종각입니다. 종각 옆에 이쁜 농구장이 있는데 거기서 농구하면 정말 환상입니다.
- 다저스 야구장- 다저스 구장은 유니온 스테이션 이라는 메트로(전철)을 타고 가셔서 거시에서 다저스 구장까지 셔틀이 운행되는 데 공짜입니다. 이 방법이 주차 지옥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죠. 풀러에서는 걸어서 레이크 역까지 가셔서 유니온 역으로 이동합니다.
- 은광촌 Calico Ghost Town (서부시대 재현해놓은 미국식 민속촌)
- 디스커버리 큐브 (12세 미만이 좋아하는 어린이 과학박물관 5번 프리웨이 길에 있음)California Science center (무료)
•Descando Garden (매월 셋째 주 화요일 무료)

6) 풀러에서 15 분 미만 거리
- Old Pasadena (쇼핑, 레스토랑, 카페, 공연)
- Americana Mall/Galleria Mall (글렌데일)
- Kidspace Children's Museum (매월 첫 주 화요일 4-8시 무료): 10세 이하 아이들에게 좋음
- LA Arboretum botanic garden (아케디아→ 매월 셋째 주 화요일 무료)
- Huntington library (매월 첫 주 목요일 무료: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학생들 대상으로 1년 회원권 무료로 뽑는 행사가 있으니 잘 찾아보세요.
-Norton Simon Art Museum (매월 첫 주 금요일 5-8 시 무료)- 풀러 학생증 있으면 무료입니다. 풀러에서 가장 가까운 정말 수준급의 미술관으로 저는 자주 이용했어요.
- Eaton Canyon 등산 - 풀러에서 차로 15분.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봄에 가시면 물이 많습니다. 여름에 가면 물이 다 말랐을 겁니다.

7) 겨울 여행 가까운 곳 추천 *
- Mountain High
- Big Bear : 엘에이에서 두시간 정도 걸리며 겨울에 눈썰매를 탈 수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 Mammoth Lake: 엘에이에서 6시간 정도 걸리며 스키를 타러 많이 가는 곳이다
-팜스프링스: 엘에이에서 2 시간 거리에 있으며 트램을 타고 San Jacinto 산을 올라가는 것이관광 포인트이다. 근처에 아울렛도 있고, 사막 박물관 등도 있으며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도가까이 있다.-

8) 켈리포니아에만 있는 독특한 관광지 Mission

Mission 미션은 17세기 스페인 개척자들에 의해 켈리포니아에 세워진 선교 베이스들을 가리킵니다.
샌디에고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길게 21개의 미션이 있습니다.
각각의 미션들을 다 돌아 보시는 것도 켈리포니아 계실 때 한 번 시도해 보실만한 프로젝트이죠.
저희에게 인상적이었던 미션들을 추천드리자면 샌디에고 시내에 있는 미션(이름은 잘 생각 안 남), 롱비치 쪽에 있는 San Juan Capistrano,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위치한 미션, 요 세가지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싼 후안 카피스트라노는 풀러에서 차로 1시간 정도면 가는 거리니 한 번 도전해보세요.
미션 주변의 작은 타운 중심부를 걸어보시는 것도 추천드려요. 거기서도 맛난 아이스크림 집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21개의 미션에 관한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californiamissionsfoundation.org/the-california-missions/

Posted by speramus

어떤 분이 저에게 문의해 오셔서 정리해 봅니다.
본 포스팅의 내용은 풀러 신학교에 유학 오시기 원하는데 현지 상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선 이해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저는 패서디나 현지에서 3년 동안 5인 가족으로 학교의 기숙사(하우징)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씁니다.
지금은 학위를 마치고 미국 중부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유학오시는 분들의 시행착오를 줄여들이기 위해 경험자로서 소개하는 글입니다. 본 포스팅의 작성일은 2023년 1월이며 이 내용의 여러 사실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 장학금 제도
먼저 풀러 신학교의 장학금에 대해 알아보죠. 물론 목회학 박사 과정에 대한 것이구요. 다른 학위 과정은 목회학 박사과정보다는 장학금이 더 많으리라 예상됩니다.
풀러는 유학을 와서 현지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을 위한 지원을 어느 정도 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학기에는 학비의 반 값으로 학비를 깍아 주는 제도를 실행해 왔어요.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알아봐야 하지만 이건 거의 변함 없었어요.
그리고 3월 경에 1년 동안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 장학금을 신청하도록 안내를 합니다. 어플라이를 하고 잘 통과하면 학비를 전액은 아니고 어느 정도 보조를 해 줍니다.
그리고 LA에 큰 교회들 위주로 장학생 선발을 해서 1000불에서 2000불 사이에서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교회들이 여럿 있습니다.
에세이를 잘 쓰면 거의 잘 선발해주니 이런 기회들을 잘 이용해 보세요.
나성영락교회, 인랜드 교회, 토렌스장로교회, 한길 교회 등이 제가 아는 선에서의 장학금 지원해주는 교회입니다.

2. 자녀 교육 및 주변 학교
아이들이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거주자(resident)인 것을 증명하면 파사데나 근처의 학교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주자 증명을 할 수 있는 서류로는 전기세 납입 영수증, 학교에서 발급해주는 임대차계약서, 미국은행의 어카운트 정보가 들어 있는 statement 등이 있습니다.
이런 거주자 증명 서류들은 두 가지 이상 가지고 가셔야 하고 운전면허증을 따실 때도 이런 서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Mackenley 초등학교가 기본적으로 배정됩니다. 고등학교는 Blare 고등학교로 배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두 학교는 점수가 낮아서 풀러에 사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꺼려하는 학교입니다.
대부분 아주머니들이 여기를 어쩔 수 없이 등록하고 로터리(추첨)를 통해 다른 학교로 이동을 꾀합니다.
로터리는 매년 1월에 교육국에서 실시하니 잘 주시하시다 로터리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트렌스퍼하고 싶어하며 선호하는 학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등학교로는 Hamilton Elementary School입니다. 파사데나와 다른 교육 지구에 있는 학교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Sierra Madre Elementary School도 선호하는 것 같아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Marshall 중고등학교를 선호합니다.
어떤 엄마들은 한국에서 온 아이들이 영어가 잘 안 되니 Glendale 이라는 곳에 있는 (자동차로 15분 거리)한국어 영어 이중언어 학교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 학교의 이름은 Mark Keppel School입니다.
유아들이 다니는 Preschool이나 위탁기관을 찾으신다면 Family Forward Learning Center를 풀러의 한국 엄마들은 선호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대기를 6개월은 기본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유학 오시고 주소가 생기자 마자 걸어 놓셔야 합니다.
신학교 주변의 프리스쿨로 Head Start라는 기관에서 운영하는 퍼블릭 프리스쿨이 있습니다.
Villa Park 에 있는 헤드스타트 프리스쿨이 가깝습니다. Orange Groove 거리에 있는 헤드스타트 프리스쿨도 학교에서 가까운 유치원입니다. 둘 중에 하나 가보시고 괜찮은 곳을 보내세요.
그리고 이런 학교는 8:30분부터 12시까지 운영을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페밀리 포워드는 오전반과 오후 반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엄마들은 오전엔 헤드스타트로 보내고 오후에는 페밀리 포워드로 보내는 분도 있습니다. 오후반은 1시부터 4시 30분까지 했던 것 같아요.
이상의 학교들은 모두 퍼블릭 스쿨로서 학비가 전혀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립 학교를 알아보신다면 1년에 한 학생이 1만불 정도의 학비를 내는 학교들이 몇 개가 있습니다.
Bethany Christian School은 Sierra Madre에 있는 학교이고 K부터 8까지 있는 학교입니다.
고등학교는 Maranatha High School 이 있구요. 25분정도 차를 타고가면 Village Christian School이 있는데 여기는 K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 매우 규모가 큰 크리스챤 스쿨입니다.
이런 학교들은 선교사 및 목사들에 대한 학비감면 혜택이 대부분 있습니다. 학교들마다 그 감면 비율은 다르구요.
레터를 잘 쓰시고 이유를 잘 설명하시면 50%이상도 할인을 받으실 수도 있구요.


3. 사모님들 생활 및 커뮤니티
풀러신학교 안에는 여러 기숙사가 있지만 Chang Commons라는 기숙사가 가장 크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Chang 바로 옆에 Jubilee라는 아주 오래된 2층 건물의 아파트 건물이 있는데 창보도 훨씬 쌉니다.
다만 층간 소음이 너무 심하고 에어컨이 없습니다. 하지만 창과 붙어 있어서 같은 생활권입니다.
Ford Place라는 기숙사는 창과는 5분 거리고 학교 캠퍼스 안에 있는 기숙사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도 거의 100년 된 건물로 창보다는 저렴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창에 몰려 살죠.
창에서 사실 때 이곳의 한인 커뮤니티때문에 즐거운 분들도 많지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국인들 특성상 너무 들이밀고 오픈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경계를 원하시는 분들은 창 커뮤니티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들의 나이에 의해 또래 엄마들끼리 가까워지는 현상은 어느 한인 커뮤니티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창 안의 중간 뜰이 있는데 시멘트 바닥이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고 해가 질 때까지 시끌벌쩍 모여 놀기도 하죠.
아이들 놀리며 엄마들은 밴치에 삼삼오오 모여서 아이들 학교 이야기나 여러 잡담들을 나누기도 하죠.
창 기숙사 마당이 사람들이 많고 별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풀러 신학교 마당까지 걸어서 거기서 놀기도 합니다.
풀러 캠퍼스 마당의 잔디밭에서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놀기도 합니다. 아이들 놀리며 몇 몇 엄마들은 자리 깔고 이야기 하기도 하구요.
사모님들이 다른 분들과 어울리기 원하신다면 금방 어울리실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다만 투머치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으니 원하지 않으신다면 조용히 지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다른 분들과 어울리면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너무 들이밀지 마시고 천천히 분위기 보시면서 다른 분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본인이 원하시기만 하면 고립되어 외롭지는 않으실 겁니다.
외국인들과 교류하길 원하시는분들에게 창은 매우 좋은 공간입니다.
모든 외국인들과 미국인들은 서로에게 열려있고 친화적입니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하시다 보면 필요하신 물건들을 싼 가격에 사실 수 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테이블이나 의자, 메트리스 그릇 등의 필수품들은 페이스북 그룹 안에서 많이 거래되는 물건들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정보는 월요일 오전 10시경 목요일 오전 10시경에 페이스북을 통해 푸드뱅크에서 나오는 음식물이 있다는 공지가 뜹니다.
그러면 216동 앞에서 가셔서 음식물들을 차례로 받아 오시면 됩니다. 의외로 이게 없는 살림에 보탬이 됩니다.
우유, 계란, 빵등의 물품은 자주 나옵니다.

4. 사역지 찾기 (풀타임, 파트타임)
사역지는 원하시면 언제든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왜냐면 펜데믹 이후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파트타임은 정말 찾기 쉽고 풀타임도 잘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전략적인 분들은 풀타임 교회를 잘 찾아서 영주권을 받으시는 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나중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풀타임으로 어차피 가게 되시더라구요. 여기 와 보시면 영주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게 될겁니다.
경제적인 이유와 신분때문에 사역지를 찾아 가시더라구요. 풀타임을 하시게 되면 공부는 못마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공부하러 오셨다가 풀타임 잡을 잡으면서 공부를 내려 놓고 미국에 정착하는 길을 택하지요. 가족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공부가 목적이시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서포트가 있으시다면 파트타임을 잡으시고 공부를 마치시는 방법을 선택하시길 권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풀타임을 잡으시는 그때부터 공부는 멀어지게 됩니다.
사역지를 찾는 청빙 싸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일보 청빙란인데 여기에 많은 교회들이 청빙 공고를 올립니다.
https://kr.christianitydaily.com/board/bbs/board.php?bo_table=minister
캘리포니아 지역 위주의 청빙게시판은 아래와 같습니다.
https://kcmusa.org/bbs/board.php?bo_table=mn06_1
전세계 청빙게시판입니다.
https://jcwebs.org/
동부 지역 위주의 청빙게시판이 아래입니다.
https://usaamen.net/bbs/board.php?bo_table=peter
PCUSA장로교회의 교단 청빙 게시판은 아래와 같습니다.
http://nckpcusa.org/nckpcusa/index.php?mid=call
KPCA 교단의 청빙게시판은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kpca.org/kpca/bbs/board.php?bo_table=HD_MINISTRY
그리고 만약 사역을 시작하신다면 사모님들은 발이 묶이기 때문에 사모님들이 운전면허를 따셔야 하는 것은 필수이고 차를 한 대 더 마련하셔야 될 수도 있습니다. 사역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차를 두대 마련하시더라구요.

4. 방학 때 기숙사 방은 빼야 하는지?
기숙사에 사시다 기숙사를 나가시고 그만 사시길 원하신다면 30일전에 나가겠다는 30일 노티스를 기숙사 사무실에 제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학적만 유지된다면 기숙사는 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까 방학이 된다고 해도 방을 뺄 일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학생 비자가 아니고 영주권자나 종교비자로 유지하실 수 있다면 학적만 유지되면 몇 년이고 기숙사에 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영주권이나 종교비자가 있으면 학생 비자처럼 매학기 등록할 의무가 없거든요. 휴학을 길게 하며 기숙사에 남는 방법을 선택하시는 겁니다. 기숙사가 월등히 싸기 때문이죠.

5. 영어 못해도 생활이나 수업 따라가는 데 지장 없는지?
영어를 못해도 LA나 켈리포니아 지역에서 살아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죠.
한인타운에서는 그런 불편함 조차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사람들이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고 편리한 지역은 LA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편리한 것들도 많고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식당도 많고 한국 마트도 다양하게 있기 때문에 전혀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학업에 있어서도 목회학 박사 과정이 한국어로 다 진행되기 때문에 영어를 못해도 상관 없으십니다.
그리고 웰컴센터 같은 곳에서 한국 직원이 있기에 도와주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코리언센터의 직원들도 친절하게 잘 안내해주실 겁니다.

이상으로 대충 풀러신학교가 있는 페서디나에서의 삶에 대해 지극히 전지적 남자시점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는 6개월 전에 켈리포니아 페서디나를 떠나서 중부로 이사해 와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켈리포니아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겁니다. 그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지역이니 감사하며 유학생활을 잘 즐기십시오.
그리고 미국의 대부분의 관광명소는 서부에 몰려있습니다.
유학을 오신 후 한 달 안에 아리조나와 유타주에 몰려 있는 캐년서클과 관광 명소를 먼저 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 수록 갈 기회가 줄어들 겁니다 막 유학오셔서 가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가격의 차를 구하는 것인데, 자동차 구입에 대해서는 중요하다는 말만 말씀드립니다.
왜냐면 이분야에 대한 지식이 제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라디오 코리아라는 곳의 자동차 게시판을 한 달 넘게 주목하여 보았고 직접 연락하여 미니밴을 구입하였습니다.
자동차 구입하는 것은 오시자 마자 주변에서 좋은 정보를 잘 들어서 구입하시길 빕니다. 많은 분들이 딜러들을 통해 자동차를 구입하시곤 하더라구요.
절대 마일리지가 많은 차는 피하십시오. 싼게 비지떡이란 말을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느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경험담입니다.
제 첫차는 30만 마일된 1998년식의 차였는데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자동차 기능보다 마일리지가 적은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같은 조건이면 마일 수가 적은 차를 구입하십시오.
어떤 차든 될 수 있으면 10만 마일 이하의 차를 구입하실 것을 권합니다.
이상입니다. 더 궁금하신 것은 아래에 댓글을 다십시오. 시간 되면 댓글로 답변 드릴게요.
살아 본 경험으로 여러분의 시행착오를 줄여드리고자 이글을 쓴 것이니 많은 도움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asadena와  LA 근교에서의 다양한 생활정보는 아래 링크에 모아 놨습니다. 특히 여행 정보는 참고하실만 할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행은 유학 오시자 마자 2주 후에 바로 떠나세요. 그게 가장 현명합니다. 

https://oamici.tistory.com/entry/%ED%92%80%EB%9F%AC%EC%8B%A0%ED%95%99%EA%B5%90-%EB%B0%8F-%ED%8C%A8%EC%84%9C%EB%94%94%EB%82%98-%EC%A7%80%EC%97%AD%EC%9D%98-%EC%83%9D%ED%99%9C%EC%A0%95%EB%B3%B4-%EB%AA%A8%EC%9D%8C

Posted by speramus

추운 겨울이 되면 군대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던 저는 영하 20도를 넘는 추위를 난생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추우면서도 고립된 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회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죠. 어떤 이들은 공중전화통을 붙들고 외로움을 달랬고 어떤 이는 지인들을 부대로 불러 외박, 면회 등의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죠. 시절 저는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를 쓰는 즐거움보다 편지를 받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던 같습니다. “김이병 편지왔다.” 고참이 건내주는 편지 통에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같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마음 써주고 있다는 것을 편지로나마 느끼고 싶었던 같습니다. 편지도 편지지만 소포보다 기쁨은 없었습니다. 종이 상자 가득 과자를 담아 보내 친구의 마음이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열자 마자 고참들에게 뺏기고 내무반 전우들과 함께 순식간에 먹고 없어지지만 소포의 여운은 오래 갔었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소포를 통해 그렇게 연결되는 기쁨을 누렸던 같습니다. 번은 동아리 선배들과 친구들이 카세트 테이프에 노래도 녹음하고 시도 녹음하고 돌아가며 저에게 마디씩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녹음한 테이프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듣고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군대 시절에 느꼈던 소포의 추억과 희열을 오랜만에 느껴보았습니다. 월요일에 갑자기 울타리 몰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저는 울타리몰에 가입한 적도 없고 물건을 시켜 적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실은 군대 시절에 함께 성가대 봉사를 하던 옆집 중대 아저씨가 LA 이민 20년이 넘어가는데,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저에게 전화를 것이었습니다. 지금 울타리몰 사장님이 옆에 계시는데 아는 사람 중에 울타리 먹거리를 주고 싶은 사람 있냐고 하시면서 당장 전화 걸어 주소를 물어 보라 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배송 선물꾸러미를 받아들고 항공 익일 배송의 속도에 대한 경탄과 함께 감동이밀려왔습니다. 이건 사회의 어떤 분과의 연결을 넘어 하늘 위에 계신 크신 어떤 분과 연결되는 그런 기쁨이었습니다. 당장 울타리몰 신사장님께 손편지를 보내 그분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군대시절 성가대의 인연이 울타리 몰까지 연결되는 플로우를 보며 인생의 신비와 해학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호의들이 다른 호의를 만들어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생깁니다.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상대의 존귀함을 꽃피워주고 깨닫게 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작은 소포처럼 말입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누가복음 161-8

제목: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1.

오늘은 주현 후 둘째 주일입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성탄절이 지나고 12일째 되는 날 그러니까 16일을 주현절로 지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냈고 현현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죠. 교회 전통에 따라 주현절의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동박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함으로 예수님이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냈다고 이해하여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또 다른 전통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이 땅에 자신을 드러냈다고 이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주 주현 후 첫 주에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추구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고민했습니다. 형식과 본질의 싸움에서 율법의 본질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예수님보다 미리 와서 예수님이 걸어가실 그 길을 먼저 걷게 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한이 대항하여 싸웠던 실체가 무엇이라고 이야기 했었나요? 바로 대제사장들을 필두로 한 성전체제(temple system)이었습니다. 그 성전시스템은 결국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무엇을 좇아 간 것이라고 말씀드렸었죠? 결국 대제사장들은 돈을 따라 갔고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는 삶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복잡해 보이지만 성경에서는 두 가지 길 중에 택일하는 것으로 우리 삶을 단순화 합니다. 재물을 섬기든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든 이 둘 중에 하나를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복잡한 삶을 그렇게 단순화 할 수 있느냐고 불만을 가지실 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은 돈 아니면 하나님,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돈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라 살 것인가 그 길은 확연히 갈리지만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돈의 위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돈은 신적인 위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야기 드리는 것이지만 돈이 가진 신적 위력이라는 것은 신이 가지고 있는 전능성을 돈이 유사하게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돈의 유사전능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돈만 있으면 신처럼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만져지면서 하나님처럼 작동하는 돈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그 씀씀이가 어떠한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과 깊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설교 초반부터 돈 이야기를 꺼내냐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돈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한 목장에서 본문의 이야기에 대해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나 봅니다. 저에게 설명을 요청해 오시더군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은 성경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난해(難解) 본문 중 하나로 꼽힙니다. 불의한 청지기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전하신 목적과 이유를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2.

자 그럼 본문의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야기이자 비유입니다. 늘 예수님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진리를 설명하시곤 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크게 두 사람입니다. 청지기와 그의 주인이죠. 청지기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는 오이코노모스 (οκονμος)”입니다. ‘을 가리키는 오이코스을 가리키는 노모스의 합성어입니다. 집을 관리하고 재산을 관리하는 재무 관리자(금융계)이면서 전답을 관리하는 마름(농업)a tenant farm agent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의 재산을 이용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을 불러서 계약서를 다시 쓰는 것으로 보아 농촌 배경하에서 주인의 전답을 관리해 주는 마름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회계장부를 맡아서 관리하는 주인의 자산 관리인을 겸하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갑자기 주인의 호출을 받습니다. 주인은 그를 부른 후 따져 묻지도 않고 그를 해고 합니다. “자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인가? 자네는 오늘부로 해고네. 자네가 맡아서 정리하고 있던 회계장부를 나에게 가져오고 일을 그만 두게나.” 주인이 청지기에게 한 말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내가 보던 일을 샘하라.” NIV에서는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로 번역되는데 헬라 성경에서는 자네가 오이코노모스로서 관리하던 장부를 나에게 제출하게이렇게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청지기에게는 회계 장부를 정리할 몇 시간이 주어진 상태에서 해고 통지가 된 겁니다.

우리를 당황시키고 어렵게 하는 부분이 이 다음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청지기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영악한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악한 방법이 오히려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자신의 재산을 낭비했다고 꾸지람을 듣던 청지기의 행동이 이제는 칭찬을 받고 있잖습니까? 그것도 주인에게 손해를 끼쳐가면서 자신의 살 길을 마련한 청지기의 행동이 분명히 나쁜 행동 같은데 바른 행동이고 지혜로운 행동으로까지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한 사람으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해석의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사용할 방법은 주변 본문들과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 것입니다. 본문 앞 뒤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를 살펴 봄으로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자는 거죠. 원래 성경은 장과 절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AD 1200년 경에 장이 확정이 되었고 AD 1500년 경에 절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과 절이 확정되기 전에 누가복음을 읽었던 사람들은 누가복음 한 권을 통째로 읽었던 겁니다. 오늘 날처럼 끊어서 읽지 않았던 거죠. 그렇게 따지면 청지기 비유 앞 뒤에 놓인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이야기들인 거죠.

본문의 바로 앞에 놓인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뒤는 재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연이어 등장합니다. 그리고 16장 마지막 부분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탕자의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 두 이야기 모두 제멋대로 구는 아랫 사람에게 윗사람이 은혜와 호의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탕자의 아버지도 그랬고 청지기의 주인도 호의를 베풀었죠. 둘째, 자산을 낭비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셋째, 제멋대로 굴던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손실과 행동에 대한 반성이 있습니다. 넷째, 아랫 사람들은 윗 사람의 자비와 선한 성품에 자신을 맡깁니다. 다섯째, 마지막에는 깨어진 신뢰에 대한 회복이 이뤄집니다. 이것을 단순화 시키면 잘못을 저지른 아랫 사람에 대한 윗 사람의 호의와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윗 사람의 호의는 아랫 사람의 태도의 변화로부터 시작됐다는 점도 중요하구요.

본문 뒤에 놓인 단락들과 본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 주인을 잘 선택하여 살아갈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그에 실패한 케이스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야기 가 연이어 나오는 것이구요. 하나님을 따르는 듯 하지만 실상은 돈을 따르는 바리새인들로서 실패한 케이스를 언급하는 겁니다.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도 자신의 이웃인 거지 나사로에게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굴다 지옥이라 불리는 하데스(Hades)로 떨어진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가 만약 자신의 생의 끝을 알았다면 자신의 재물을 그렇게 인색하게 사용하지 않았겠죠.

 

이런 맥락들을 통해 볼 때, 본문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돈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종말론적인 감각을 가지고 돈을 사용해야 함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회계장부의 제출을 요구 받은 청지기가 자신의 끝을 인식하고 수습에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끝을 인식하고 그 끝나는 시간에 자신이 어떤 판단을 받게 될 것인지를 인식하고 돈을 사용하게 되는 이야기 인 겁니다.

특별히 본문과 바로 이어진 9-13절의 말씀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는 주제로 본문의 주제를 완벽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는 뜻을 자세히 이해하면 본문의 비유가 의도하는 바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잘 이해해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도구를 더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틴의 사회적, 문화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팔레스틴의 사회 속에서 공유되어 오던 공통적인 가치와 문화를 이해해야만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첫번째 개념은 평판과 영예 그리고 수치 개념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평판에 의해서 한 사람의 영예(dignity)와 수치(shame)가 매겨졌습니다.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에게는 영예가 따라 왔고 나쁜 평판을 듣는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라왔습니다. 오늘 날에도 마찬 가지지만 당시에는 오늘날 보다 훨씬 다른 이들의 평판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두번째 개념은 호의(favor) 또는 호혜(reciprocity)의 개념입니다. 호의를 받은 자는 그것을 베푼 자에 뭔가를 주어야 하는 것이 호혜이지요. 원래는 부족 사회에서 물물 교환하는 개념이 호혜의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 주는 부한 사람의 호의는 충성(loyalty)이나 영예로 갚아지곤 했죠. 동가(同價)의 재물이나 동등한 가치로 갚을 형편이 안 될 때, 사람들은 경의(respect)나 영예(honor)를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충성까지 덤으로 돌려주었죠.

 

그렇다면 평판과 호혜의 사회/문화적 개념이 본문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먼저 평판에 의한 영예의 개념으로 본문을 살펴보죠. 주인의 해고 통지를 듣고 청지기는 회계장부를 들고 소작 농들을 한 명씩 찾아 방문합니다. 그리고 소작 농들이 진 빚을 반 값으로 깍아 주며 장부에 친필로 서명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주인 앞에서 혹시나 대조할 일이 있을 때 친필로 싸인했기에 변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겠죠. 빚을 깍아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빚을 절반으로 탕감 받은 소작농들은 청지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인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겠죠.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내려준다면 자신은 종국에 가서 지위가 회복될 것을 예상하고 기대했습니다. 결국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소작농들의 평판에 의해 그의 영예가 결정되었습니다.

또한 주인은 그의 영리한 행동에 대해 칭찬으로 갚아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좋은 평판으로 그 동네에서 영예를 얻게 된 청지기에 대해서 주인은 다른 평가를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결국 소작농들의 좋은 평판의 결과로 주인의 마음까지 움직여지고 주인은 그의 행동에 대해 영예로 되갚아 주게 된 겁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사회문화적 개념 중에 다른 하나는 호혜와 수혜의 개념이라했죠. 먼저 주인과 청지기 사이의 호혜와 수혜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의 부당한 행동을 알고도 즉결 처분하지 않고, 오히려 청지기에게 계산하고 샘하여 만회할 수 있있는 말미를 제공했습니다. 주인의 호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성품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호의가 풍성한 사람인 줄 알았고 지혜로운 주인임을 알았기에 그가 지혜롭고 영리하게 처신한다면 그의 수치가 만회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겁니다. 실제로 주인은 그의 영리한 행동에 호의적으로 반응하며 그의 모든 불의한 행동들을 눈감아 주죠.

두번째로 청지기와 소작농 사이에서 일어나는 호혜와 수혜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재물이 아님에도 소작농들이 주인에게 빚진 것을 정리한 문서를 수정함으로 소작농들의 빚을 경감해주고 어느 정도 탕감해 줍니다. 주인의 재물을 이용한 호혜 행위였습니다. 이에 대해 수혜자인 소작농들은 그에게 영예를 선사합니다. 소작농들은 그가 만약 청지기 직에서 물러날 경우 그를 돌봐주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불경기에는 주인들이 부채의 일부를 탕감해 줌으로써 인정이 많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베푼 호의는 청지기의 행동을 자극했고 청지기는 주인의 호의와 자비의 성품을 신뢰하여 불의하지만 주인을 영예롭게 할 일을 진행해 가기로 한 겁니다. 결국 불의해 보이지만 청지기의 행동을 통해 소작농들도 이득을 얻고, 결국에 주인까지 영예를 누리게 되는 일석이조의 일로 결말 납니다.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끝에 가서는 자신의 삶에도 영예와 이익을 얻게 되니 결국 일석삼조로 모두가 잘 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이야기 인거죠.

평판과 영예의 개념 그리고 호의와 호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5.

이제 우리가 살펴 본 여러 요소들을 종합하여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죠. 본문은 불의한 재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지기란 남의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 청지기의 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우리에게 재물을 맡겨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재산은 따로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재산을 맡아서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지기 비유는 기독교 종말론의 관점으로 재정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종말론적인 틀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재산은 하나님이 맡겨 놓은 위탁재산일 뿐 이라는 거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이 논지를 뒷받침 하면서 종말론적인 재정 사용에 실패한 예입니다. 청지기는 비록 자신의 소유는 아니지만 재물을 가지고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끝이 있음을 인식하고, 모든 것이 끝날 때를 대비하여 처신 한 것이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끝이 있음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일까요? 불의한 재물의 사용설명서를 본문은 제시합니다. 한 마리도 말하면 주인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 사용하라는 겁니다. 주인이 영광 받으시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에만 촛점을 맞추고 그의 행동이 비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주인의 재물에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 주인에게 영예를 선사하는 것이 훨씬 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영악스런 행동은 윤리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오히려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타인을 위해 장부를 변경하여 빚을 탕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행위로 인해 결국엔 주인의 영예를 드높였습니다. 어차피 주인의 재물임으로 주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빚을 탕감하는 경제적 손실도 주인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이익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영예를 얻는 것이라는 것을 청지기는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우리의 재정 사용이 바로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재정 사용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들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목적으로 우리가 가진 소유가 쓰여질 때 이웃들은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들로부터 얻는 좋은 평판은 결국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구요. 나아가 이런 재정 사용은 결국 끝날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당당해 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본문과 곧바로 이어지는 9절 말씀은 이 비유를 이렇게 총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맘몬(재물)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맘몬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장막tent, tebernacle(처소)으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본문의 한 줄 요약이 바로 9절 말씀입니다. 불의한 맘몬이 사라질 때가 온다. 종말이 있다는 거죠. 그때 너희가 불의한 맘몬을 잘 사용하여 얻게 된 친구로 말미암아 영원한 장막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재정이 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사용설명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겁니다. 나의 욕망이 아닌 이웃을 위해 친구를 위해 우리의 재정이 사용되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주인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장막으로 초대된다는 것이지요.

 

6.

지난 주 울타리 몰 본사인 LA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울타리 몰 회원도 아니고 울타리 몰에서 주문해 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저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김경헌씨 주소 좀 불러주세요.” 직원은 다짜고짜 저의 주소를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 직원은 저의 군대시절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를 봉사했던 옆 중대 아저씨였습니다. 그 형님은 유학 온 부인을 따라 20년 전에 LA로 이민 온 형님입니다. 그런데 울타리몰 사장님께서 그 형에게 갑자기 아는 사람 있냐고 묻더랍니다. 그 사람에게 공짜로 음식을 부쳐주고 싶다고 하면서 아는 사람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합니다. 형님은 제가 생각났고 그 자리에서 저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울타리 몰 정말 좋더군요. 그 다음날 큰 상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항공 배송의 위용을 처음 느꼈습니다. 고기를 포함한 다양한 한국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저희 가족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형을 통해 들었는데 울타리몰 사장님이 신실한 기독교인이시라고 합니다. 사장님은 분명 본문의 재정사용 설명서를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급을 통해 저희 가정도 하나님의 배려를 느꼈고 진한 이웃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사장님의 선행에 보답하고자 저는 손편지를 써서 사장님께 영예를 돌려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도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십시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일지 모릅니다. 13절 말씀처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스리는 사용설명서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재물을 통해 주인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저버릴 것인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인이 인자하고 인내심이 많은 것을 이해한 청지기처럼 주인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성품을 따라 우리의 삶이 디자인 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호의가 많으신 분이기에 우리 재정 사용도 호의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죠. 주인의 성품을 더 잘 알고 이해함으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얻고 하나님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Scripture: Luke 16:1-8

 

Title: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Translated by Min-Jun Hur

 

1.

 

Today is the second Sunday after Epiphany. In church tradition, the twelfth day after Christmas, which is January 6th, is observed as Epiphany. On this day, the Lord revealed Himself to this world and manifested Himself. According to church tradition, the meaning of Epiphany is interpreted in two ways. First, Jesus revealed Himself by being worshipped by the Wise Men. Second, Jesus revealed Himself by being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Last week, we talked about John the Baptist and what he pursued. We learned that John the Baptist had to fight fiercely to find the essence of the law in the battle between form and essence. He came before Jesus and walked the path that Jesus would walk. What was the entity that John the Baptist was fighting against? It was the temple system led by the high priests. The temple system was not centered on the essence, but it pursued money and fulfilled the high priests’ interests and desires.

 

Even though our lives seem complicated, the Bible tells us life is about choosing between the two paths: serve money or serve God. The master of our life is either money or God. There is no middle ground. The path is clearly divided, but the choice is not easy. The reason is that the power of money is so great. Money is a terrifying being with semi-divine power. I'll tell you from time to time, but what I mean by the divine power of money is that money has similar omnipotence as God. Simply put, everything seems possible if you have money. It seems like as long as you have money, you can be like God. That is why people follow the money that works like God, rather than following invisible God. How we use money tells us about our maturity and depth of our faith. Today's scripture is related to money.

 

It seems like one of the small groups had a heated discussion about today’s Scripture, and I was asked for an explanation. This text, known as the parable of the dishonest steward, is considered one of the most difficult texts to understand. Today, we want to understand the purpose and reason why Jesus gave this parable and learn how to apply its lesson to our lives.

 

2.

 

Now, let's dive into the content of the main text. This is a parable Jesus told His disciples. Jesus always explained the truth to the disciples with stories. The main characters of the text are two people, the steward and his master. The steward in Greek is “oikonomos” (οἰκονόμος),” a combination word containing ‘oikos’ meaning ‘house’ and ‘nomos’ meaning ‘law.’ You could think of him like a financial manager (in the financial world), who manages the house and the property, and as a tenant farm agent who manages the field (in the agriculture world). He calls upon the tenant farmers to rewrite the contracts, so he manages the fields in a rural setting, but he doubles as the property manager, in charge of accounting.

 

The steward is suddenly called in by his master. The master says,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 because you cannot be manager any longer” (Verse 2). In the NIV version, it is translated as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 but in the Greek Bible, it is translated as “You submit to me the ledgers you managed as Oikonomos.” So the steward was given a notice of dismissal with only a few hours to organize the ledgers. The part that baffles us begins with this next part.

 

The steward is using a cunning method to settle this situation. But this method is rather praised by the master, so it is difficult for us to understand this. First, the behavior of the steward is scolded for wasting his fortune, but it is praised later. It seems like the steward caused financial loss to his master and prepared his own way, which seems like a bad action clearly, but it is considered a right action and even a wise action. It's hard to understand why the steward is not punished as an unjust man. In order to understand this parable, we need to use several methods.

 

3.

 

In order to correctly interpret today’s text, first we need to examine its relationship with the surrounding texts. By examining what stories come before and after the text, we can understand the intention of this text. Originally, the Bible did not have chapters and verses. It is said that around AD 1200, that the chapters were fixed, and around AD 1500, the verses were fixed. Those who read the Gospel of Luke before the verses were finalized read the entire Gospel of Luke. It did not get cut off like we read today. Today’s scripture is related to the stories that come before and after. The story immediately preceding the text is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And right after the text, there is a story about the money-loving Pharisees. And at the end of chapter 16, there is a story about the rich man and the beggar Lazarus.

 

There are many similarities between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and the parable of the dishonest steward. First, in both stories, the superiors show grace and favor to the subordinates. The father of the prodigal son and the master of the steward are both kind. Second, a wasteful person appears in both stories. Thirdly, the unruly people become aware of the losses they have caused and repent on that action. Fourth, subordinates trust themselves to their superiors' benevolence and good character. Fifth, in the end, the broken trust is restored. Simplified, the similarity between the two stories is the favor and grace of the superior to the inferior. It is also important to note that superiors’ favors begin with a change in the attitude of the subordinates.

 

What about the stories that come after today’s Scripture? Verses that follow today’s text tell us that one servant cannot serve two masters and that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so choose your master well. The Bible points out the Pharisees as people who seemed to follow God but indeed followed money. Even in the story of the rich man and Lazarus, the rich man acts stingily towards his neighbor, the beggar Lazarus, and the rich man falls into Hades. If the rich man had known about God’s judgment, he would not have used his wealth so sparingly.

 

Looking at these contexts, we can see that all the stories are related to the use of money. In particular, the story of the rich man and Lazarus has an apocalyptic sense and teaches us to use money with the end of life in mind. In today’s text, we can also see the steward recognizing his end and trying to mend his behavior after being asked to give an account of his management. The story is about how he uses money after he recognizes the end and the judgment he will face.

 

Verses 9-13 immediately following the main text say,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for yourselves” and they fully support the main text. So, when we understand this phrase, we can understand today’s text, and vice versa.

 

4.

 

There is one more tool to use in order to understand today’s Scripture. We need to understand the Palestine social and cultural concepts in the era of Jesus. The common cultural values in the Palestinian society culture at that time are crucial in understanding today’s text.

 

The first concept is the concept of reputation, honor, and shame. At that time, by reputation, a person's dignity and shame was decided. Those who had a good reputation had dignity, and those who had a bad reputation had shame. Even today, some of this holds true, but back then, the reputation of others mattered much more.

 

The second concept is favor or reciprocity. Reciprocity is when the one who receives a favor returns the favor. Originally, bartering was the concept of reciprocity in tribal societies. This developed into wealth often being repaid with loyalty or honor. When people could not afford to repay with the goods of equivalent value, they showed respect or honor to the people who gave favors. Even loyalty was given back as a bonus.

 

How does the social/cultural concept of reciprocity apply to today’s text? First, let's consider the concept of honor by reputation. Upon hearing the master's notice of dismissal, the steward visits the tenant farmers one by one with the account book. And by relieving the debt owed by the tenant farmers, he asks them to sign with their own handwritings. This is to make sure there are no excuses later. With a significant portion of their debts forgiven, the tenant farmers must have praised the steward and the master as well. The steward knew that if he has a good reputation, he will eventually regain his status despite his unrighteous behavior. In the end, his prediction was correct, and he gained honor from reputation among the tenant farmers. The owner also rewards the steward for his clever behavior. The master could not have a different opinion of a steward whose good reputation has earned him honor in the town. As a result of the good reputation, even the master's heart is moved, and the master repays him with honor for his actions.

 

The second concept we discussed was favor or reciprocity. We see this between the master and the steward. The master gave the steward an opportunity to make up even though he could have immediately taken away the books. This is seen as the favor of the owner. The steward knew the character of his master well. He knew that his master was a man of great kindness and a wise man. He expected that his shame could be redeemed if he acted wisely and cleverly. In fact, the master responds favorably to his clever actions, and in the end the owner turned a blind eye to all his unrighteous actions.

 

Another place we see the relationship of reciprocity is between the steward and the tenant farmers. The steward relieves the debts of the tenant farmers, even though it is not his own money. In response, the beneficiaries, the tenant farmers, honor him. They are ready to take care of him and help him if he steps down from the stewardship. At the time, in times of recession, masters gained reputation by forgiving parts of the tenant farmers’ debts. The favor given by the master to the steward made the steward forgive the tenants’ debts, and in the end, through the steward’s actions, the tenant farmers benefited, and the master enjoyed honor. Also, the steward himself also gains honor and gets to keep his job as well, so this is a happy ending story. It is a story of killing three birds with one stone.

 

 

 

5.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today’s Scripture unless we understand the concepts of reputation and honor, as well as favor and reciprocity. Today’s text is about unrighteous or worldly wealth. A steward is someone who manages someone else's property. This steward's story is about us. We must remember that our owner has entrusted us with wealth. All our possessions are not owned by us. We must not forget that we are only stewards of God's wealth.

 

The parable of the steward urges us to use our finances with a Christian eschatological perspective (eschatological = relating to death, judgment, and the final destiny of the soul). We must understand the text with an eschatological framework. The story of the rich man and the beggar Lazarus is also understandable under this setting. From an eschatological point of view, the wealth we have is entrusted to us by God. The story of the rich man and the beggar Lazarus supports this thesis, as well as an example showing unwise use of wealth. The steward recognized that there is an end and used money for his end, although the money was not his.

 

Then, how do we use our wealth wisely? Today’s text gives us guidance on how to use worldly wealth. In one word, we must use it for the glory and honor of the master. It is to be used in a way that the owner is glorified. When we focus only on the damage done to the master by the dishonest steward, his actions should be condemned. However, his actions should be praised instead, since at that time, it was a far greater action to bring honor to the master than to cause financial loss.

 

The steward's clever behavior is ethically reprehensible but considered wise. By forgiving the tenant farmers’ debt, he ultimately raised his master's honor. He understood that the monetary loss from debt forgiveness brings reputation and honor to the owner. He understood that after all, what is important to the owner is gaining people, not profit, and gaining honor from people. He knew this better than anyone.

 

How we use our wealth should be similar. The purpose of our worldly wealth should be the glory of God and love for our neighbors. When our possessions are used for loving our neighbors, they cannot help but praise us. The good reputation we get from our neighbors eventually goes back to God, our owner. Verse 9, which immediately follows the main text, is the one-line summary of the parable. “I tell you,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for yourselves, so that when it is gone,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tent, tabernacle).” There is a time that wealth is gone. There is an end. At that time, we will enter the eternal dwellings because we have friends we gained by using worldly wealth. If our finances are used to meet our own desires, we are not doing it according to the instructions. It is desirable that our finances be used for friends and neighbors. In doing so, the master will be glorified, and in return for the glory, we will be invited to the eternal tabernacle.

 

6.

 

Last week I got a call from the Wooltari mall headquarter located in Los Angeles. I'm not a member and I have never ordered from the company. “Kim Kyung-heon, please give me your address.” The employee asked for my address. That employee is a friend of mine, and we served in the same choir during my military days. He immigrated to LA 20 years ago with his wife who came to study abroad. He said the owner of the company suddenly asked him if he knew anyone. The owner wanted to send some free food to some people, so he urged him to name someone. My friend remembered me and called me on the spot. A large box arrived at our front door by air delivery the next day. It was full of various Korean foods including meat, so our family couldn't help but be thrilled. I heard through my friend that the owner of the company is a faithful Christian man. I thought to myself, he must be aware of God’s financial manual, as written in today’s text. Through this kindness, our family felt God's compassion and deep love from our neighbors. To repay the owner for his good deeds, I gave him honor by sending a handwritten letter.

 

I hope we can be part of these stories too.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Perhaps that is the most basic way to glorify God. As verse 13 says, one servant cannot serve two masters. We cannot serve God and Mammon at the same time. God’s financial manual for governing worldly wealth is available to us today. Shall we glorify our master through our wealth? Or will we become slaves to money and forsake God, the true master? Which life will you choose? Just like the steward who knew his master was benevolent and patient, we also must know our master well. Our lives are to be designed according to the character of the Lord. Because He is a kind person, we need to be kind with our use of finances. I hope that our lives become richer by better knowing and understanding the master's character. I pray that we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and gain God also.

 

Posted by speramus

 

제가 이해하는 구약 성경의 한 줄 요약은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입 니다. 출애굽(Exodus)이란 애굽, 즉 이집트(Egypt)를 탈출한다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나가다는 뜻의 ‘ex’이라는 뜻의 ‘hodus’가 합쳐진 말입니다. 길이란 삶의 방식을 의미하죠. 출애굽의 2차적 인뜻,그러니까속뜻은기존의삶의방식에서벗어나새로운삶의방식으 로 들어가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파라오의 체제에서 순응하며 살던 방식 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결단이지요. 이 스라엘은 몸의 탈출과 함께 정신의 탈출을 이뤄내야 했는데 실패했습니 다. 몸의 탈출은 이집트를 벗어나는 것이었겠죠. 정신의 탈출은 파라오의 가치간과 세계관과 문화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인들 은 몸은 이집트를 나왔지만 정신과 가치관과 문화는 이집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출애굽을 살아가는 것이라 이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출애굽적인 삶은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그 리고 문화를 장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가치를 과 감히 버리고 대안(代案)적이고 대항(對抗)적인 성경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 야말로진정한출애굽이라할수있습니다.기독교인들은어느시대나그 시대의 주류 문화와 지배세력들에 대항하는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왔습 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가나안의 문화, 그 후손들 세대에는 이집트, 앗시 리아, 바빌론, 헬라, 로마라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날의 주류 문화는 무엇일까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자본주의 (capitalism)라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고 다른 말로 이윤의 창출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를 위해 효율성이라는 중요 한 가치 판단을 기준으로 활용합니다. 나아가 효율성을 표현하기 위해 숫 자, 다른 말로 샘을 사용합니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 사회에서 디지털사회의 탈역사성과 탈서사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디지털 은 숫자를 새기 위한 손가락이란 뜻의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합니다. 우정, 사랑, 관계와 같은 가치들은 원래 이야기이며 서사적(narrative)인데 디지털 사회는 이런 가치들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페이스북 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서 친구도 애정도 호감도 모두 숫자로 표현됩니다. 모든것이셀수있게가공되어버리죠.디지털사회에서서사적인것은급 격히 의미를 상실해 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야기입니다. 출애굽도 이 야기이죠. 교회의 건강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야기 여야 합니다. 진리를 숫자에 가둘 수는 없습니까? 교회는 지진리를 라가기 위해 이 숫자와 우고 있는지도 모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가복음 11-8

제목: 회개의 세례

 

1.례요한의 배경

마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요한이라는 세례자로(John the Baptist)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1).” Good News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을 우리는 복된 소식이란 뜻의 복음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신 예수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Good News를 먼저 전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세례자 요한이라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낸 이야기와 그가 만들어낸 삶의 스토리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앞으로 펼쳐 갈 복음의 내용과 같은 방향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나기 200여년 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헬라하면 떠오르는 왕이 있죠? 누구인가요? 미국인들이 지금도 좋아해서 이 왕의 이름을 자기 아들과 딸에게 붙여주기도 합니다.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대왕입니다.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자 헬라는 네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되죠. 그 중에 한 왕조가 셀루커스 왕조(Seleucid Empire)인데 시리아(Syria)일대를 다스리게 되죠. 셀루커스 왕조 전까지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은 제사장들이 자율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왜냐면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제국들은 세금만 받아가고 자율적인 통치를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죠. 하지만 헬라제국 그중에서도 알렉산더가 죽은 후 등장한 셀루커스 왕조부터 팔레스틴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Antiochus VI Epiphanes)라는 왕은 이스라엘의 종교성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기로 마음먹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야웨(Yahwhe)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헬라의 신들을 섬기게 강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전에 헬라의 신상들을 들여 놓게 하고, 할례를 금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 돼지를 잡아 드리게 하고 돼지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이 돼지 아니겠습니까? 이 때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저항 운동이 마카베우스 항쟁(Maccabeus Revolt)입니다. BC 167년에 벌어진 사건이었죠. 마카비(Machabee)는 망치(hammer)라는 뜻인데 맛디디아(Mattathias)의 아들 유다(Judah)의 별명이었죠. 이 항쟁(revolt)은 성공을 거두고 이스라엘은 셀루커스 왕조 대신 마카비의 후손들이 다스리게 되죠. 마카비의 후손들을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ty)라고 부릅니다. 이 마카비 항쟁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세력이 핫시딤(Hasidim)”이란 집단이었죠. 핫시딤이라는 말은 자비나 사랑을 뜻하는 Hesed에서 파생된 말로 경건한 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스몬 왕조가 제사장 권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을 보고 핫시딤들이 매우 실망합니다. 하스몬 왕조가 타락함을 직감한 거죠. 이 경건한 무리였던 핫시딤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지방으로 흩어집니다. 이 핫시딤들이 두 분류로 갈라집니다. 핫시딤의 제사장 무리들은 쿰란(Qumran)같은 사해 주변의 광야에서 금욕적인(Ascetic)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제사장 무리들을 일컬어 에세네(Essenes people) 파라고 하죠. 그리고 핫시딤의 다른 한 부류들은 지방의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 바리새파 (Pharisees people)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제사장이 아니라 평신도 그룹이었죠.

 

이렇게 길게 역사를 짚은 것은 요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Essene 파로서 광야에서 수도적(monastic) 금욕생활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세네파는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단절하여 금욕적인(ascetic)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사유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수도원적인(monastic)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에세네파는 결혼이나 성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 출신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그들의 운동을 지속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Zechariah)와 엘리사벳(Elizabeth)은 노년에 요한을 가졌기 때문에 요한이 어린 시절 죽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에세네파 공동체에 맡겨지고 길러졌다고 추측하는 거죠.

 

2.세례를 행하는 요한

요한이 에세네파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운동(movements)을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 운동이 에세네파가 보여준 형태와 매우 비슷했구요. 요한이 이스라엘에 시작한 운동은 바로 세례Baptism” 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에세네파와 무슨 상관있냐는 질문이 들죠? 고고학자들은 쿰란이라는 지역에서 에세네파가 공동체 생활한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물에 몸을 담그고 정결하게 씻는 정결 예식(ritual)를 행하는 ritual bath도 발견되었습니다. 에세네 사람들은 자신을 죄로부터 씻어내고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배쓰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침례(baptism)가 에세네파의 정결예식과 많이 닮아있는 거죠.

요한을 세례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요한이 회개의 침례라는 새로운 예식을 유대인들에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침례를 행하라는 율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침례는 구약성경을 거스르는 예식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죄를 씻고 정결케 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회개의 유일한 길은 짐승을 죽여 제사 드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 율법을 거슬러 새로운 회개의 예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방인들을 유대인 공동체에 받아들이기 위해 행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라는 것을 행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 세례는 기쁜 소식인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3. 회개의 형식과 본질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종교에는 의식이나 예식이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그 형식(form, style)은 어떤 본질(Substance,essence)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형식과 본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본질을 선택하겠죠.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에도 형식과 본질이 있죠. 회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내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둘째, 나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셋째,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통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이런 회개의 본질을 감싸 안는 형식이 바로 대속 제사(redemptive sacrifice) 였습니다. 대속 제사라는 형식을 행하면서 회개의 본질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만 남고 본질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는 종교가 되어 버린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죠. 회개할 마음이 있고 회개의 본질은 갖추었는데 제물을 살 경제력이 안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할 줄도 모르는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했죠. 이런 것을 이용해 먹은 사람들이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스몬 왕조 말기에 에돔 사람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하스몬 왕조의 고위직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에돔 사람이 로마에 딱 달라 붙으면서, 헤롯 집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을 100년 동안 다스리면서 대제사장의 평균 임기가 5년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죠. 이전 대제사장이 죽어야 다음 대제사장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했다고 나오죠. 대제사장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가문에 뇌물을 많이 갖다 바치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며 많은 사람을 세웠기 때문이죠. 이들이 받친 뇌물은 지금돈으로 100만불 200만불 정도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100-200만불의 뇌물을 바쳐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가 대제사장으로 봉직하는 기간 동안 모든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겠습니까? 갖다 바친 뇌물 이상을 회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들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겁니다. 돈벌이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냈던 헌금이나 십일조를 가지고 고리대금업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두번째 돈벌이 수단은 제물을 비싼 값에 파는 것이었죠. 일반 시장에 가면 10만원에 살 수 있는 양 한 마리를 성전에서는30만원에 파는 겁니다. 그런데 안 살 수 있습니까? 시장에서 양을 사오면 부정하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제사장에 의해서 정결하다고 인정받는 것들만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나 일반 시장에서 산 짐승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이 다 부정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성전이 한 마디로 종교 사업을 한 겁니다.

 

누가복음 32절에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Annas and Caiaphas were the Jewish high priests. At that time God spoke to Zechariah's son John)”고 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장인과 사위 사이죠. 한 집안에서 대제사장직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가 아무 의미 없이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대항 세력이 바로 이들 대제사장 세력으로 대표되는 성전체제(temple system)였던 겁니다. 이들을 대항해서 회개의 본질, 나아가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운동이 바로 세례 운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싸움은 형식에 대한 본질의 싸움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껍대기만 남은 성전체제와의 싸움이 이 복음의 시작이죠.

대제사장들의 종교 장사가 악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사람을 수단화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자기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례 요한은 형식화 된 종교와 싸웠습니다. 형식화 된 종교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악한 종교였기 때문이죠. 이 형식과 본질의 싸움이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마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율법의 형식을 깨뜨리면서까지 복음을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이것이 세례 운동에 숨어 있는 복음입니다. 종교 장사에 희생되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준 것이 세례 운동이었던 겁니다

 

4.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복음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다를까요? 오늘날 기독교는 종교 장사를 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형식은 본질을 담아내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심령은 새로워지고 계신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며 살아갈 마음이 여러분에게는 있으신가요?

 

본질을 찾기 위한 형식과의 싸움은 요한이 보여준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앞으로 만들어 가실 좋은 소식(Good News)의 이야기가 본질을 찾기 위한 끊임 없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요한은 같은 도상(on the same road)에 서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찾고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예수님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인 자비와 사랑으로 행하는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셨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체제(temple system)로 작동하는 유대교가 종교장사를 하는 것을 가장 못 마땅해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성전이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답답하실 수 밖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이 회복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할 성전에서 사람이 이용당하고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근대에 와서 기독교는 자본주의 종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이고 효율이죠. 자본주의에서 생산성이 뛰어나고 효율성이 뛰어난 것이 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합니다. 숫자를 통해 선과 악을 가늠하곤 합니다. 교인 수가 많은 큰 교회는 좋은 교회, 교인 수가 적은 교회는 나쁜 교회라고 생각하죠. 헌금을 많이 드리는 성도는 좋은 성도, 적게 드리면 나쁘다생각합니다. 과연 숫자 안에 종교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를 비판합니다. 그는 디지털 사회가 놓치기 쉬운 서사(narrative), 즉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는 Digital 이라는 말이 손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손가락은 숫자를 새기 위한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디지털이란 새는 손가락, 즉 숫자를 바탕으로 합니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 인스타그람의 스토리라는 항목마저 샘을 위한 도구로 쓰여집니다. 몇 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하트 표시를 했는지에 의해 그의 인간됨이 판가름되기도 합니다. 친구도 숫자로 새지고, 애착도 호감도 숫자를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셀 수 있게 가공됩니다. 숫자로 나타내야만 성과와 효율성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 안에서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의미를 잃어가게 됩니다. 숫자 안에서 인간은 도구화 되고 수단화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절대 도구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으로 와서 자신들에게 이득을 남겨줘야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가자 요한을 이단으로 취급합니다. 성전 제사를 통해 수입을 올려주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자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blasphemy) 한다고 없애려 하였죠. 요한이 예비한 주님 오실 길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desperate struggle)였습니다.

우리들의 복음의 시작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슨 계명을 지켰고 안 지켰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 안에 숨겨 있는 본질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만의 자비와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죠. 교회는 헌금이나 사람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복음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일 주일 동안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고 교회에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모여서 주님의 복음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매 주일 예배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숫자를 통해 표현되는 효율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본질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소중하듯 다른 이들의 삶이 소중함을 아는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여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사투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Scripture: Mark 1:1-8
Sermon: Baptism of Repentance / translated by Ji-Han Park

1. Background of John the Baptist
Mark says that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begins with John the Baptist. “This i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v. 1).” We interpret the Greek word ‘Euangelion’, which is translated as good news, as the gospel. There is a story that Jesus, the Son of God and the Messiah, tells, and that story is very good news. There is a person who preached the Good News first, and he introduces himself as John the Baptist. The story of John the Baptist's life and the story of the life he created are in the same direction as the contents of the gospel that Christ (Messiah) will unfold in the future. In order for us to understand the story of John the Baptist, we must first look at the history of Israel.

When you think of Greek Empero, is there a king that comes to mind? Who is it? Americans still like it so much that they give the king's name to their sons and daughters. That's Alexander the Great. After Alexander's sudden death, Greece splits into four kingdoms. One of them was the Seleucid Empire, which ruled over Syria. Prior to the Seleucid dynasty, the areas inhabited by Jews were governed autonomously by priests. Because empires like Assyria, Babylon, and Persia only received taxes and left them to rule autonomously. However, among them, the Seleucid dynasty, which appeared after Alexander's death, began to directly rule Palestine. In particular, Antiochus VI Epiphanes decides to completely destroy the religion of Israel. Antiochus Epiphanes IV forced the Israelites to serve the Greek gods in order to stop serving the God Yahweh. In the temple of Israel, the gods of Hella are put in, and circumcision is prohibited. And when the Israelites hold a sacrifice, they force them to slaughter a pig and eat pork. Isn't the pig the most hated animal by the Israelites? At this time, there is a resistance movement centered on the priests, and the representative resistance movement is the Maccabeus Revolt. It happened in 167 BC. Maccabee means a hammer, and it was the nickname of Judah, the son of Mattathias. This revolt succeeds, and Israel is ruled by the descendants of the Maccabees instead of the Seleucids. The descendants of the Maccabees are called the Hasmonean dynasty. The forces that actively helped the Maccabi Rebellion was a group called “Hassidim”. The word Hassidim is derived from ‘Hesed’, which means mercy or love, and means “the godly one.” However, the Hassidim are very disappointed to see that the Hasmonean dynasty seizes both priestly and political power. He felt that the Hasmonean dynasty had fallen. This godly group, the Hassidim, leave the temple in Jerusalem and scatter to the provinces. These Hassidim ar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The group of priests of Hassidim begins an ascetic community life in the wilderness around the Dead Sea, such as Qumran. This group of priests is called the Essene people. And the other type of Hassidim were the Pharisees people who were in charge of practicing and teaching the law centered on local synagogues. The Pharisees were a group of laymen, not priests.

The reason why I pointed out such a long history is to understand John's background. Many people think that John may have lived a monastic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as an Essene. The Essenes people lived a community life in this kind of wilderness and lived an ascetic life cut off from the world. They were people who never married, did not own private property, and lived a monastic life. It is said that the Essenes wanted to continue their movement by adopting children from priests because they did not have marriage or sex life. John's parents, Zechariah and Elizabeth, had John in their old age, so they may have died while he was a child. So it is assumed that John was entrusted and raised by the Essene community.

2. John the Baptist
It doesn't matter whether John is an Essene or not. His life is only similar to that of the Essenes. The important thing is that John is creating new movements unheard of in Israel's history. That the movement has its roots in the Essenes. The movement that John started in Israel was “Baptism”. Then you ask what does baptism have to do with the Essenes? Archaeologists find traces of Essenes living as a community in the Qumran area. Ritual baths were also found there, where rituals of purification were performed by dipping and washing the body in water. Essene people went into a bath to cleanse themselves from sin and to keep themselves clean. The baptism of John the Baptist is very similar to the purification ceremony of the Essenes.

The reason why John is called the Baptist is because John performed a new rite called the baptism of repentance to the Jews. Even in the Old Testament, there is no law requiring baptism anywhere. Rather, baptism is a ceremony that goes against the Old Testament. In the Mosaic Law, we are told to offer sacrifices to wash away sins and purify them. The only way to repent was to kill an animal and offer it as a sacrifice. By the way, John the Baptist is doing a new ceremony of repentance against this law. Baptism was a ceremony performed to receive Gentiles into the Jewish community. But Jews are receiving that baptism. For what reason did John the Baptist perform baptism to the Jews? And what does this baptism have to do with the gospel, the good news?

3. The Form and Nature of Repentance
We have worship services every Sunday. Pray to God, praise God, and listen to His Word. There are rituals or ceremonies in the religion we practice, but they have a certain form, and the form (style) is a means to pursue a certain essence. If I had to choose between form and essence, I would choose essence. The same goes for repentance. Repentance also has a form and an essence. What is the nature of repentance? I could say three things. First, I am heartbroken and remorseful for my wrongdoing. Second, the essence of repentance is not only to feel sorry for the person who has suffered damage due to my wrong actions, but also to compensate for the damage. Third, the essence of repentance is to move in the opposite direction through a resolution and determination not to commit such a sin again.

In the law of Moses, the form that embraced the essence of repentance was the redemptive sacrifice. It is to pursue the essence of repentance while performing the form of the ransom sacrifice. However, as time passes, only the form remains and the essence disappears. It has become a religion with no substance and only a shell. There are also the opposite cases. There were also people who had a heart to repent and possessed the essence of repentance, but did not have the financial power to buy sacrifices. People like this were pointed at as bad people who did not even know how to repent. Religious leaders often used tactics like these.

After the Hasmonean dynasty, the Herod family began to rule Israel. It is said that the average term of office for the high priest was 5 years while the Herod family ruled Israel for 100 years. Originally, the high priest served for life. The previous high priest must die before the next high priest can be established. But in the Gospels, it says that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resisted Jesus. The high priest is in the plural. Because he appointed a person who brought a lot of bribes to the Herod family as the high priest and appointed many people. The bribes they paid were enormous amounts of money, about $1 million to $2 million in today's money.

If I became the high priest by paying a bribe of one to two million dollars, where would all the attention be focused during my service as high priest? Shouldn't we recover more than the bribe paid? That is why, from that time on, these high priests put up the name of God and became frantic about making money. One of the means of making money was usury with the offerings or tithes that people paid. Their second means of earning money was selling sacrifices at high prices. If you go to the general market, you can buy a sheep for 100 dollars, but the temple sells it for 300 daollars. But is there any choice not to buy it ? Buying a sheep from the market is considered unclean. Under the law, only those things recognized as clean by the priests could be sacrificed. If people bring animals they raise at home or animals bought in the general market, the priests say that they are all unclean. People have no choice but to buy sacrifices at the temple. In a way, the temple was doing religious business.

Luke 3:2 says, "Annas and Caiaphas were the Jewish high priests. At that time God spoke to Zechariah's son John." Annas and Caiaphas are father-in-law and son-in-law. He is holding the position of high priest in one family. Luke does not mention Annas and Caiaphas without meaning. The opposing forces of John the Baptist were the temple system represented by the forces of the high priests. The baptism movement was a holy movement to counter them and restore the essence of repentance and, furthermore, the essence of religion. John the Baptist's battle was a battle of substance against form. The fight against the temple system that has lost its essence and remains only a shell is the beginning of this gospel.

The reason why the religious business of the chief priests is evil is that they use people as means. It is to think of people as a means to satisfy one's own desires. It is a very evil act to use people to satisfy one's own interests. Because man is a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John the Baptist, on the other hand, fought against formalized religion. This is because the formalized religion was an evil religion that used people as its means. Mark says that this battle between form and essence i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John the Baptist tried to live out the gospel even by breaking the formality of the law. This is the gospel hidden in the baptism movement. It was the baptism movement that opened the way to meet God to those who were sacrificed in the religious business and could not meet God.

4. The gospel of restoring the image of God
Is today different from the time of Jesus? Can we confidently say that Christianity today is not in the business of religion? We worship every week. There is a certain format in worship, and the format was created to contain the essence. The essence of worship is to meet God. Are you meeting God through the form of worship? Is your spirit being renewed through worship? Do you have the heart to discern God's will through preaching and to live by doing that will?

The fight against form to find the essence wa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that John showed. In other words, it tells us that the story of the Good News that Jesus will create in the future will be a constant battle to find the essence. In that sense, Jesus and John are standing on the same road. Jesus used to say that he came to this earth to find the essence of the law and fulfill the law. Jesus emphasized that the form of worship offered in the temple is not important, but the importance of faith in mercy and love, which is the essence of the law. And Jesus showed that mercy and love directly. Jesus was most displeased with Judaism, which operates as a temple system, doing religious business. It can only be frustrating because the temple that should have saved people is killing people. A person who owes the form of God is restored and a person is used and used as a means in the temple that needs to be made anew. People made in the image of God became tools to satisfy the desires of the high priests.

In modern times, Christianity seems to have become a species of capitalism. The most important thing in capitalism is profit and efficiency. In capitalism, being productive and being efficient is considered good. So capitalism uses numbers to make it easy to recognize. We often judge good and evil through numbers. A big church with a lot of members is a good church, and a church with a small number of members is a bad church. It's good when a lot of offerings are collected, and bad when little is collected. Can the essence of religion be contained in numbers?

German philosopher Byung-Chul Han criticizes digital society in his book “Transparent Society”. He talks about the importance of narrative, that is, the story, which is easy to miss in the digital society. He said that the word digital comes from the Latin word “digitus” which means finger. Fingers are for counting numbers. So digital society is based on numbers. Even the Facebook Timeline and Instagram Stories items are based on numbers. Someone’s humanity is judged by the number of likes and hearts. Friends are counted in numbers, and attachment and liking are expressed through numbers. Today everything is countable. This is because performance and efficiency can only be expressed in numbers. In numbers, the story of our lives loses its meaning. In numbers, human beings are used and objectified.

Jesus never looked at people as tools. It was His purpose to restore the image of God in man. The high priests came to the temple and treated John as a heretic when people flocked to him because they had to give them a profit. When the people who had to raise their income through the temple sacrifices flocked to Jesus, they tried to get rid of

Jesus for blasphemy. The way John prepared for the coming of the Lord was a desperate struggle to return to the essence. The beginning of our gospel should be like this. It doesn't matter what commandments you kept or didn't keep. It must be a life of pursuing and practicing the essence hidden in the commandments. Now we have to create our own story of mercy and love. We have to create a beautiful story unique to our church. The church is not a place filled with offerings or people.The church is a place filled with beautiful gospel stories. We must gather at church with the beautiful stories we have created in our lives for a week. And we must gather here to hear the story of the gospel of the Lord and return to our place of life with a new imagination.

I hope that the essence of our faith will be restored through worship every Sunday. I hope the essence of valuing and loving a person is restored, not efficiency expressed through numbers. I hope it is a faith that knows that the lives of others are as precious as I am. We must move forward with a faith that makes love of God and love of neighbors into stories by practicing them with our lives, not faith that we only know in our heads. John the Baptist and Jesus are still inviting us to this holy struggle.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