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기 11-5

제목: 상실을 통과하는 이들

 

1.

저는 풀러 신학교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마치고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California, Pa.  sadena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LA 지역은 6월에 구름 낀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6월을 Gloomy June이라 말합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때 이삼일 빼고 매일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 됐습니다. 오히려 로체스터에 오니 날씨가 맑고 따뜻해 좋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역시 보금자리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여러분들을 뵈니 주님을 뵌 듯 반갑습니다. 지난 2주 동안 두 분의 설교자가 다하나 교회에 오셔서 빌립보서 말씀을 여러분에게 나눠주셨는데 저에게도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짜고 하신 것이 아닌데도 두 분 다 빌립보 말씀을 전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두 분은 로마의 식민 도시인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나눠주셨습니다. 식민지처럼 둘러 싸고 있는 이 땅의 세속적인 가치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방식에 대해 나눠주셨습니다. 경쟁하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우리는 도전 받았습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더 깊게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룻기는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읽었던 책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불립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예루살렘교회 위에 충만히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 일어난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부흥은 경쟁하지 않고 만족하며 나누고 기뻐하는 은총의 방식이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음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룻기는 우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언약적인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헤세드가 공동체를 살리며 인류 전체를 살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한 책입니다. 언약적인 신실함이란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 이 표현은 룻기를 나누며 수없이 반복되어 설명되어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옛날 히브리 성경은 양피지에 쓰여져서 두루마리로 보관되었습니다. 룻기를 포함한 다섯 권의 책이 한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습니다.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서 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권의 책의 한 두루마리를 Five Megillot이라 부르는데요, 메길롯은 scroll(두루마리) 이라는 뜻의 히브리 말입니다. 이 책들은 유대인들의 큰 명절에 각각 읽혀 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룻기는 보리와 밀 추수기와 연관된 칠칠절에 읽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기에 아가서를 읽습니다. 풀로 지은 초막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기에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습니다. 성전 파괴일에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것을 울며 노래한 예레미야 애가를 읽습니다. 부림절에는 부림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스더를 읽는 것이구요.

 

2.

우리 말 성경의 순서는 구약성경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 70인경(Septuaginta, LXX)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70인경은 성경의 순서를 연대순으로 재배치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은 모세 오경인 토라(Torah), 예언서인 느비임(Nebiim), 성문서 또는 시가서라 불리는 케두빔(Ketubim)으로 나눠져 있었죠. 그런데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연대순으로 재비치하여 다 섞어 놔 버린 겁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케투빔, 즉 성문서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서 룻기는 역사서인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룻기의 배경이 바로 사사가 다스리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배치가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 31장 후반부는 현숙한 여인(woman of valor)’에 관한 주제로 잠언을 마무리 짖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히브리말 에쉐트 하일’(אֵשֶׁת־חַיִל)을 번역한 말입니다. ‘하일이란 말은 힘과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유능하다, 능력있다, 힘이 세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라는 뜻보다 가정을 건사할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여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31장과 잇대어 룻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에쉐트 하일의 대표적 사례로 룻을 말하고자 하는 성경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기 다음에 이어지는 아가서는 이방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의 이야기로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의 후속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룻기 11절은 사사 시대에 그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그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사사(Judge)라는 말은 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의 부족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사 시대라는 말 한 마디에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절인 사사기 2125절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인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열 두 지파의 공동체가 한 지파를 왕따시키고 전멸시키려는 동족상잔의 슬픈 역사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룻기의 배경이 되는 베들레헴의 황폐한 현실을 사사기 17장에서 19장 말씀은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레위인이 먹고 살기 힘들어 베들레헴을 이탈하여 개인 제사장으로 전락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들레헴의 부족 공동체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그들의 지역 사회와 부족 공동체를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이 없고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부족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책임져야 했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았던 겁니다. 룻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매우 암울한 영적인 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1절 말씀의 베들레헴에 찾아 든 기근은 이런 영적인 암울한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물인지도 모릅니다.

 

3.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모압 땅으로 임시적으로 이주하여 갑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가족들의 이름을 통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의 뜻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장인 엘리멜렉입니다. 엘리(Yeli)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구요, 멜렉(Melek)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라는 뜻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참 좋은 뜻입니다. 여러분이 딸을 낳으시면 나오미라는 이름을 지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의 이름을 왜 이런 식으로 지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먼저 말론이란 뜻은 닳아지다, 병들다, 슬퍼하다이란 뜻이구요, 기룐이란 뜻은 쇠퇴하다, 수척해지다, 병들다란 뜻입니다. 태어날 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름이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이름으로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큰아들 말론의 아내인 맏며느리 룻의 이름의 뜻은 아름다움, 친구라는 뜻으로 이 여인이 펼쳐갈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우정이 가득한 이야기가 될 것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반면 오르바라는 이름은  이마 갈기(full head of hair), 후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에서부터 벌써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무슨 뜻입니까? 집이라는 뜻의 베트(Beit)’와 떡 또는 빵이라는 뜻의 레헴(lehem)이 합쳐진 말로 빵집,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베들레헴은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 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을 통해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빵집에 기근이 들어 빵이 없는 현실을 보십시오. 마치 자비의 집이란 뜻의 베데스다에 자비가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뜻이지만 정작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뭔가 결핍되고 상실이 가득한 현실을 이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족을 굶기지 말자는 일념하에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일으켰던 민족인 모압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이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어지간히 없으면 그랬겠느냐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압땅으로 간다는 것은 모압의 신인 그모스(Chemosh)가 다스리는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베들레헴을 벗어나 이방신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머물다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 베들레헴을 등지고 그렇게 이주를 결단한 것이었죠. 모압은 베들레헴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였습니다.  유대땅과 모압을 가르는 시내가 흘렀는데 얍복강이었습니다. 얍복강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복을 쟁취해 낸 곳이었죠. 엘리멜렉은 그의 조상인 야곱을 생각하며 복을 쟁취해 내기 위해 그렇게 얍복강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는지 모릅니다.

 

4.

룻기 11절에서 5절의 말씀만을 가지고도 소설 한 권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고된 타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지고 있습니다. 이주를 해 간지 10년도 안된 시점에 엘리멜렉은 그렇게 죽은 것이지요.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에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텐데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당시 남자의 결혼 적령기가 18살이라고 추정한다면 엘리멜렉은 30대 정도에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압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모압은 그야말로 적국이었습니다. 현재의 요르단 땅입니다. 성지답사를 가 보면 모압 땅이 그렇게 비옥해 보이지 않습니다. 척박한 이국 땅에서 땅을 일구며 가족을 건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사후에 얻은 이방인 며느리들과 시어머니 사이는 원만했을까요? 가끔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농촌 마을의 시어머니와 베트남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소재로한 방송프로그램을 재밌게 본 적 있습니다. 말과 문화가 다른 고부간에 만들어지는 오해와 갈등이 재밌게 그려지지만 당사자들은 정말 힘들어 보이더군요. 분명히 나오미와 룻 그리고 오르바 사이에 여러 문화적인 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들이 존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은 말룐과 기룐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눈물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의 생명력이 남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질기고 길었었나 봅니다. 엘리멜렉은 어린 아들들과 아내를 남기고 죽어가며 안타까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이국 땅에 묻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아버지의 날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장이신 아버지 여러분들은 이국 땅에 와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국 땅의 언어인 영어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미국 문화 속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한된 기회와 시간들로 인해 직장을 옮겨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럴 땐 막연하고 불투명한 미래와 마주해야 합니다. 아버지들은 가족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불안감을 홀로 껴안은 채 힘겹게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우리 모두 이방 땅에서 여기까지 살아낸 것만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고백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잘해 오셨어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아버지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박수 한 번 쳐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당신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사랑합니다. Hang in there, dear daddy.

 

5.

룻기 초반부의 이야기는 상실과 결핍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지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압니다. 여러분은 이미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주의 과정에서 정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분명히 거쳐 오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이주해 오지 않았더라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이주해 오면서 여러분이 겪어야 했을 불안감과 상실감도 적잖았을 겁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Inside Out”이라는 영화를 보면 미네소타에서 켈리포니아로 이사해 간 라일리라는 어린 소녀가 겪는 상실의 경험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심리학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이 이주나 이사를 경험하면 마음 속에 엄청난 상실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 상실을 적절하게 해결하고 보상해주지 않으면 그것은 내면에 큰 상처로 남기도 한다고 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의 이주, 그것은 자의였든 타의였든 그들 가정에 엄청난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가족의 죽음은 그보다 더 큰 상실을 남은 가족들에게 안겨줍니다. 남편의 죽음, 아들들의 죽음을 연달아 경험한 나오미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을 겁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빈 지갑이라고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도 있지요. 지갑이 두둑하면 넉넉함이 자연스레 생기는데, 지갑이 비어있으면 자연스레 옹색해집니다. 버짓이 타이트해지면 마음의 여유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근과 배고픔의 경험은 큰 상실감을 사람에게 안겨줍니다. 배고픔과 쪼들림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연스레 원망의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나는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괜한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나오미가 나중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더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런 상실이 가져다 준 씁쓸함 때문입니다.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은 모두 이런 쓴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이래도 되는가? 정말 이러셔야만 하는가? 라는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저희 가정은 20192월 중국에서 한국으로 잠깐 비자를 갱신하러 출국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21일 정오쯤에 여행사로부터 비자가 거절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거절 사유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중국대사관에서 여행사 직원에게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선교사 신분을 알고 저희를 중국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저희는 저희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장난감, , 사진들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상실감에 괴로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자거절 후 네 달만에 안식년으로 공부하러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했지만 저희에게는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한 밤중에 경기를 일으키며 몽유병 환자처럼 날뛰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겪은 불안감과 상실감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것을 치유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솔직히 요즘도 문득문득 그 앙금들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풀러 신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받은 상실의 잔재들을 깨끗이 청산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중국에서의 추방이 남긴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의 쳅터를 넘길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곳 다하나 교회에서 쓰여지게 될 기대감을 가지고 로체스터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하나 교회와 여러분은 그런 의미에서 저희 가정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보상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제 자의 든 타의 든 정들었던 로체스터를 떠나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떠나가는 여러분 모두는 나름대로의 상실감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엘리멜렉처럼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처럼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어떤 형태가 됐든 이곳을 떠나는 이들이 겪는 상실감과 박탈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버텨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상실과 결핍이 우리 이야기의 끝이라면 정말 암울할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앞으로 펼쳐갈 이야기들은 우리네 인생에 던지는 많은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친구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다하나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정의 이야기, 은총의 이야기는 상실과 결핍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상실과 결핍을 보상하고도 남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우정의 관계를 통해 치유하고 회복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보상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앞으로 펼쳐지게 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상실과 이별의 아픔을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상실을 경험하고 통과하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여러분 앞에 펼쳐질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두움 후에 반드시 빛이 있고, 비바람 뒤에 반드시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을 선하게 인도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