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2 장 1-13 절 제목: 성령충만과 희년(禧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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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새로운 시작을 즐기시는 성격이신가요, 아니면 익숙한 것을 더 편안하게 느끼시나요? 사람들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부담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새 출발이 좋아 보이긴 하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취약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이 5월 28일인데 공교롭게 1996년 딱 이 날 저는 군입대를 했습니다. 정말 모든 것이 새롭더군요. 저는 군대에서 그런 거친 대우나 거친 욕설은 살면서 처음 받아 봤습니다. 솔직히 군대는 제 체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만큼 군생활을 할 때만큼 제 신앙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성숙했던 시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군대에서 훈련 받으면서 읽으라고 선물해 주었던 포켓용 성경을 앞가슴 주머니에다 넣고 틈만 나면 읽었습니다. 이등병때는 책을 못 읽게 하니까 화장실에 가서 읽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신앙이 많이 성숙하고 깊어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환경은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 깊은 연대와 연결을 만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이번 여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보내는 입자에서는 너무 서운하고 아쉽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신다면 떠남과 새로운 환경의 삶은 여러분에게 오히려 선물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떠나는 이들은 반드시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운 환경은 항상 우리를 취약함 가운데 놓이게 만들죠. 그런데 그 취약함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어주는 훌륭한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취약함 가운데 내몰려 본 사람은 또한 그런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의 고충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이 많아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시작되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증명해 줍니다. 새로운 환경에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발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성령강림주일이라고도 하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오순절은 성경에 있어 완전히 획기적이고 새로운 전기를 열어줍니다. 그리스말 Pentecoste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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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50 번째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한자로 오순은 오십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로부터 50 일째 되는 날을 펜테코스테, 즉 오순절로 기념하였습니다. 7 일이 일곱 번 있으니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밀의 수확을 마치고 바로 맞는 명절이기에 맥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 성령강림절 모두 같은 절기를 가리키는 말들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유월절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50 일이 지난 시간이 시내산에 머문 시간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율법 가운데는 희년(Jubillee)이 매
50 년마다 행해졌는데 오순절에 연결하여 생각해볼 율법 조항 중에 하나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절기마다 읽는 특정한 성경책들이 있었는데 오순절에는 룻기를 읽었다고 합니다. 룻기의 배경이 밀의 추수시기가 되는 것이 그 큰 이유 중에 하나일 겁니다. 무엇보다 오순절은 자신의 스승을 떠나보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전환점이 된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승 없이 홀로 남겨진 제자들의 난처하고 새로운 상황 가운데 성령님이 어떻게 활력을 불어 넣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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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순절이 예수님 이후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매우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오순절이 교회라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의 출발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배공동체이자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되어 온 것이긴 하지만, 본격적인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기 시작한 것은 오순절 이후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부터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매번 중요한 출발점과 시작점에는 항상 성령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창조때로 거슬러 가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창 1:2). 창조시에 이 땅을 품고 운행하시던 성령님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킬 때도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내리시며 예수님을 감싸 안으셨죠.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가시며 그분을 시험가운데 빠뜨리시기도 하시지만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큰 위로를 주시던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첫 설교로서 나사렛 회당에서의 이사야 61 장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 본문의 말씀 또한 성령님과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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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3 년간의 자신의 공생애가 마무리 되어가고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상황에서 성령님을 부각시키시면서 강조하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시면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란 말은 예수님이 이미 보혜사로 오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오실 거라는 얘깁니다. 보혜사란 참고로 헬라말 ‘파라클레토스(paracletos)’인데 선생님, 카운셀러, 보호자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 말씀하셨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십 일이 지나고 오순절이 되는 날 아침 9 시에 마침내 놀라운 일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하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과 구속의 역사가 이제 그의 제자들을 통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성령님은 성경 이야기의 모든 출발과 시작에 항상 함께 계셨고 원동력을 제공하신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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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 당일 제자들이 모인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도행전 2 장은 우리에게 자세히 소개합니다. 먼저 바람과 불길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강하게 나타난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람과 불길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바람은 히브리 말로 ‘루아흐(Ruach,
이고 헬라말로는 ‘프뉴마(pneuma, πνεῦμα)입니다. 바람이란 뜻과 성령이란 뜻을’)רוּ ַח 둘 다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의미를 두었던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은 불로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구원 공동체였던 출애굽 공동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던 시내산에서의 율법 수여식때와 연결하기 위해 성령님은 바람과 불로 임하고 계십니다.
다른 명절도 많은데 왜 하필 오순절에 성령님이 제자들 위에 임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을 시내산 율법 수여식과 연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몇가지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오순절은 밀의 추수가 끝나는 시기에 맞는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추수의 이미지와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리리 주변과 유대 주변을 위주로 사역을 하시다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모든 민족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그 약속이 실현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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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모든 민족을 위한 추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5 절 말씀처럼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에게 성령강림은 놀라운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실제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3 천명의 세계 각처의 사람들이 회심하는 놀라운 추수가 예루살렘에서 이날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에 룻기를 읽는 이유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룻은 이방인으로서 모압여인이었습니다. 신명기 23 장의 율법에는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히브리인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구원의 프로젝트에 편입되는 사건을 룻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구원의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죠.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사건의 또 다른 의미는 창세기 11 장의 바벨탑 사건과 연결됩니다. 바벨탑 사건은 범죄한 아담형 인류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통해 범죄한 인류에게 내린 벌은 흩어지게 만든 것과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그 바벨탑에서 헝클어진 인류의 문제를 원상복구 시키려는 하나님의 노력을 보게 합니다. 일단 흩어졌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언어를 혼잡하게 했던 문제가 해결되고 있습니다. 분명 갈릴리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곳 말로 듣고 있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느낌을 압니다. 여러분들이 로체스터의 코스트코 같은 큰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한국말이 들려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한국말이 반가워서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오래 사시다 한국에 오랜만에 들어가시면 인천 공항에 내려서 주변에 온통 한국말만 들리면 처음에는 어리둥절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내가 알아듣는다는 신기함 때문이죠. 그러면서 긴장하며 살았던 타향살이의 부담감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면서 깊은 안도감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모국어가 주는 편안함입니다. 모국어 또는 태어난 곳의 방언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경험해 본 이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에서 혼잡하게 되었던 언어가 오순절에 일시에 성령님의 개입으로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벨탑 이후에 아브라함이라는 선택된 사람과 선택된 민족을 통해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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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이후 바벨탑의 문제를 원상복구시키며 모든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프로젝트가 새롭게 런칭해 가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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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불과 바람이 임하고 방언을 말하고 이런 현상은 정작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그 교회를 통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강림 후 성령님은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예수님이 꿈꿔 오셨던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그 구원의 프로젝트를 이룰 파트너로 교회를 선택하십니다. 성령강림의 결과는 예루살렘교회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3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교제하며 빵을 떼면서 교회를 생활을 시작합니다.
42 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이를 통해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빵을 뗀다는 것은 성찬을 가리키고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갔다는 것이죠. 그리고 누가는 이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이어지는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행 2:44-47).”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모자람을 느끼는 이들이 없는 부와 자비의 균등한 나눔을 우리는 주목해 봅니다.
저는 누가가 쓴 복음서인 누가복음 4 장의 예수님의 첫 설교인 나사렛 회당 설교와 이 부분이 연결점이 있다고 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교회의 시작에 의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출발점에 자신의 고향의 회당을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에 놓인 여러 성경의 두루마리 중 이사야 두루마리를 꺼내서 펼쳐 드셨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에 장 절이 없고 한 권의 성경은 한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읽으신 본문이 이사야 61 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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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었으니까 두무마리를 끝부분까지 펼치셔서 읽을 본문을 찾으신 겁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
19)"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은 성령의 강림,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펼쳐 가실 사역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로 탄생한 교회의 출발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잇대어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죠.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풀려나는 해방이 기쁜 소식이구요. 눈먼 사람에게는 보게 되는 것,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억압에서 풀어나는 것이 기쁜 소식이겠죠. 이사야 61 장 본문은 이것을 은혜의 해라고 말합니다. 원래 이 말은 ‘희년(Jubilee)’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명기 15 장의 ‘면제년’법에는 매 7 년마다 빚을 면제해 주라는 법이 나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 빚을 지게 되죠. 미국에 정착하며 사신 분들 중에 카드회사에 빚을 안 져 본 사람들이 없습니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통과의례처럼 일단 카드 빚을 끌어 와서 가난을 메꿔야만 합니다. 당시에도 빚진 사람을 면제해 주라는 말씀은 가난으로 비참한 삶 가운데로 내 몰렸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은 이 가난을 해결할 방법으로 면제년 법을 제정하셨고, 면제년 법은 공동체의 자비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7년은 너무 자주 돌아오니까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발짝 더 물러나셨고, 7년의 일곱 번인 50년에 한 번 큰 면제를 행하라는 희년법을 만드신 겁니다. 희년은 은혜의 해이자 용납(acceptance)의 해입니다. 희년에는 가난한 자들이 빚을 면제 받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되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케 되는 기쁨과 은혜의 날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희년은 가진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이 자비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 가난한 사람들이 희년의 혜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년법과 면제년 법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의 삶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당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이러한 것을 당신들에게 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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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신명기 15:15 절).” 이러한 희년의 놀라운 면제의 기쁨이 성령강림절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십시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니까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제가 안 믿는 사람이더라도 이런 나눔이 일어나는 교회라면 호기심에라도 한 번 찾아가 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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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말하고 몽롱한 상태가 되어 이상한 환상을 보고 예언하고 이런 현상들이 성령충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나의 이익과 유익만을 위해 사는 삶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나의 욕망이 나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 존재를 완전히 장악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욕망이 우리 욕망을 이기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의 욕망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자비로 배불리 먹고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포로된 사람들이 종된 그들의 고달픈 삶에서 놓여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설 땅을 제공해 주는 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인 것이죠. 성령충만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의 주파수에 하나님을 맞추려 했을 때 들리지 않던 성령의 음성이, 하나님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니 들려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꿈꾸시는 희년 운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터전이 되는 직장, 집, 사회 안전망
등을 나누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 교회를 통해 진행되어 온 이 희년 운동은 성령님께 자신을 내 어 맡긴 존재들, 즉 성령충만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소유나 배타적인 소유를 향한 내 욕망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각자 내가 너무 많이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 행복의 터전을 앗아가고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합니다. 탐욕적으로 많이 소유하는 부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부를 하늘에 쌓는다는 건 가난한 사람들의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나의 돈과 나의 재산을 나누는 것은 절대 맨정신으로 실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술에 취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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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힘과 의지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희년의 실천은 성령충만 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희년 운동은 성령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성령의 충만함은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모습은 예수그리스도가 지향한 희년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은총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 사랑과 자비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 예수님이 꿈꿨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꿈꾸는 세상은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어 먹으며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지 않으면 절대 이런 세상은 올 수 없습니다. 사자들은 맨정신으로 이렇게 못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혀야만 가능합니다. 많이 배워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초과 지성인들, 초과 부를 소유한 사람들, 사자같이 용감 무쌍한 엘리트들이 풀을 먹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희년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결단의 힘이 어디서 나온다구요? 성령님으로부터 그런 두나미스(권능)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 추구했던 성령충만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한 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스승 예수의 정신이 어떻게 실현되고 발현되는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 다하나교회에 그런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을 여러분의 중심에 모셔드릴 때 가능해 집니다. 또한 그런 개인들이 모인 집단적인 나눔과 베풂의 실천이 예수님과 성령님이 꿈꾸셨던 참 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하나교회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충만의 역사가 행해지고 성취되기를 우리 주님은 간절히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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