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기 1장 6-18절
제목: 공감과 헤세드의 사람들
1.
지난 주, 교회 건너편 큰 밭에 한 농부가 트렉터를 몰고 밭을 한 바퀴 돌고 있더군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 보고 싶어졌습니다. 농부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귀리(oat)를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트렉터를 잠시 세우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귀리가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왜 잘라버리는 거냐 물었습니다. 농부는비가 내리지 않아 귀리를 잘라서 건초로 써야 해서 잘라낸다고 하더군요. 다른 날엔 교회 옆의 밭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켄이라는 은퇴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눴지요. 비가 오지 않아 켄의 걱정이 커져만 갑니다. 로체스터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아 농부들이 너무 힘들어 하고 있다더군요. 저도 매일 아침 일어나 비를 내려주시도록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농사만큼 하늘의 뜻에 민감하게 따라야 하는 직업도 드뭅니다. 땅을 일구며 살아간다는 이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준비했더라도 하늘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열매를 거둬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바로 옆의 또 다른 밭에 심겨진 콩밭에 콩이 메말라 듬성듬성 흙만 보이는 곳이 많아지니 제 마음도 무거워 집니다. 주님이 어서 큰 비를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모압지방에 있던 나오미는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인 고향 사람들에게 풍년을 주셨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룻기에서 야웨 하나님이 세 번 정도 언급이 되는데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언급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근을 주시기도 하시고 풍년을 주시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농사와 목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근이 들 수 밖에 없었죠. 반대로 제대로 된 시기에 비가 풍성하게 내리면 풍년이 들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은 기근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제 10년이 지나고서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풍년으로 돌보고 계시다는 소문을 나오미가 들은 것이지요. 룻기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배고픔과 후세를 갖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대한 갈등의 해소가 이야기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갈등 요소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있기 전에 율법을 성실히 실천하는 공동체와 개인을 통해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룻기는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결단과 공동체의 노력이 있더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 수반되어야 함을 룻기는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6절 말씀이 딱 그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나오미는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죠. 풍년을 주셨다고 한글 성경은 표현하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레헴(lehem), 즉 빵을 주셨다고 나옵니다. 빵집이란 뜻의 베들레헴에 이제 빵이 있는 겁니다. 뭔가 모순이 정리되어가는 상황인 거죠.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이유였던 빵이 없는 배고픔의 문제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살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어떤 문제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농사가 그렇듯이 자식 농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자식 농사를 짓고 싶지만 태의 문이 열리지 않아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죠. 직장을 옮기거나 결혼을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문제들은 어느 정도 나의 선호도나 선택이 개입될 여지가 있지만 오랜 시간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개입이 절대적이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돌보심이 우리 교우들의 삶 가운데 가득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2.
룻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 중에 하나는 “돌아가다.”라는 뜻의 히브리 말 “슈브(Shub)”입니다. 6절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라는 번역은 “모압지방으로부터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라는 뜻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7절에 나오미와 며느리들이 돌아갈 여행의 목적지가 유다 땅임을 나타내며, 여기서도 ‘슈브’라는 동사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후에 8, 10, 11, 12, 15, 16절에서 슈브라는 동사가 연속적으로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는 바로 ‘돌아감’ 또는 ‘돌아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년의 세월을 자기 힘으로 배고픔과 후손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던 나오미의 노력은 헛수고였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현실이었죠. 그녀는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을 돌보지 않고 잊은 것만 같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10년만에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벌어진 세 여인의 대화입니다. 세 여인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 땅에서 얻은 며느리 룻과 오르바입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유다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동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나오미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 먹은 것 같습니다. 걷다 보니 상황 파악이 된 것이죠. 자기가 지금 20대 초반의 며느리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나오미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오미가 이방 며느리를 들인 것을 숨길 목적으로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며느리들을 돌려 보내려고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들이 자기 이력을 망가뜨리고, 자기에게 오히려 짐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는 거죠.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나오미가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며느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지 않았겠죠. 오히려 나오미는 길 위에서 며느리들의 미래의 삶에 깊은 공감이 되었고 그들의 삶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이 베들레헴에 돌아가 혼자 사는 수고를 하더라도 두 며느리에게 자신의 짐을 떠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나오미는 10년 동안 외국에서 외국인들 사이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녀가 다른 민족 속에서 나그네로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 며느리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간다면 겪게 될 어려움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나그네로 살아본 사람만이 나그네들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법입니다. 1년 정도 로체스터에서 안식년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절대 한국에 살아가는 외국인들을 이전과는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가시면 느끼실 겁니다. 고난은 사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현재의 고난은 나를 절망하게 하고 넘어뜨리게 할지 모르지만 이 고난을 잘 이겨 낼 때 같은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고난을 현재 당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말리는 이유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본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자신이 이방인으로 살아보니 며느리들이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이 안 봐도 훤한 것이었겠죠.
3.
며느리들이 자신의 권면을 거절하자 나오미는 더 살갑게 며느리들에게 부탁합니다. 11절을 보면 “돌아가다오, 내 딸들아”라는 표현을 통해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자기 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의 나오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형사취수혼 levirate(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결혼한다)이라는 제도를 알아야 합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들여 형의 대가 끊어지지 않게 도와주는 제도가 형사취수혼(levinate) 제도입니다. 나오미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나오미의 아들의 아내인 룻과 오르바가 구제를 받으려면 나오미에게 아들이 더 있어서 그들이 룻과 오르바와 결혼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나오미는 나이로도 아들을 낳을 수도 없었겠지만, 이미 희망이 다 사라진 그녀의 마음은 상태로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진심으로 그의 며느리들을 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공감하며 그들에게 가장 복된 선택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두 며느리가 그들의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 새 가정을 꾸리는 것 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힘겨워 했던 이국 땅에서 나그네 삶을 그 며느리들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오미의 공감 능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맏며느리 룻의 공감 능력은 나오미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듯합니다. 룻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면에서 그 어머니 나오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누구보다 어머니의 아픔을 알았고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그 어머니를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상호간에 언약적인 신실한 관계인 헤세드(Hesed)의 도리를 다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에 헤세드라는 단어가 룻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게서도 너희에게 헤세드를 주시기를 빈다.” 너희가 헤세드를 가지고 나와 너희 남편을 대한 것처럼 주님께서도 헤세드로 너희를 선대해 주시기를 빈다는 나오미의 바람입니다.
헤세드는 아무에게나 거져 주는 단순한 은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헤세드라는 히브리 말은 자애로움(favor), 자비(mercy), 신실함(faithfulness), 충성됨(loyalty)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히브리말 헤세드가 룻기에서는 축복을 기원하는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첫째, 헤세드의 행위는 수혜자의 생존에 결부된 문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헤세드는 사소한 문제나 욕구를 채워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해결해 줄 때에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둘째, 헤세드의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만한 또 다른 사람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는 것도 하나님 밖에 헤세드를 그들에게 베풀 분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셋째, 헤세드의 행위는 관련된 사람들이 적극적인 관계가 확립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헤세드는 느닷없이 아무 맥락 없이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를 새로 확립할 목적으로 행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헤세드는 보통 언약 관계를 기반으로 요구되어집니다. 아비가 자녀에게, 반대로 자녀가 아비에게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은 모두 헤세드로 이해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언약적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언약적인 관계이죠. 부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구요. 자녀가 부모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국의 ‘효’라는 개념이 바로 헤세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또한 헤세드이구요. 이 세 가지 헤세드의 기준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언약적인 신실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4.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 권면하는 것은 공감과 헤세드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의 결단 또한 공감과 헤세드를 기반으로 한 것이구요. 10년 동안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한결같이 보여준 헤세드의 삶이 며느리들을 자극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헤세드를 어머니에게 되갚고 싶었던 것이죠.
공감과 헤세드가 한 가정을 살리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공감이 무엇입니까?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해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뜻하는 ‘이마고 데이’(Imago Dei)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예수를 따라가는 교회를 통해 이세상에 회복하시길 원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마고데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이마고 데이는 공감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주변의 이웃들이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이마고 데이는 시작합니다. 그들도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emotions와 affections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존귀하듯 내 이웃도 존귀합니다. 내가 나그네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내 이웃도 동일하게 그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감의 반대는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에서 끌어내려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죠. 유튜브에서 심리 상담이나 마음 치료 같은 콘텐츠들의 많은 부분은 바로 이런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합니다. 소시오 패스, 나르시스트로 표현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과는 손절하는 게 상책이라 합니다. 사람을 이용 가치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오미나 룻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소시오 패스였다면 룻기의 이야기는 절대 이렇게 아름답게 전개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핵심적인 정서가 바로 공감이었습니다. 복음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는 군중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것을 보시며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마음 아파하셨다고 성경은 말해 줍니다. 애간장이란 우리 뱃속의 장을 의미합니다. 장이 끊어질 정도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죠. 이 공감능력이 우리가 키워가야 할 예수님의 제자도 중에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상황과 현실에 귀기울여 경청하고 안타까워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헤세드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사회와 우리 공동체의 여러 문제들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룻기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5.
제가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입학할 때 필수 암송구절이 신구약 각각 70구절씩, 총 140구절 이었습니다. 룻기 1장 16-17절 말씀은 구약 암송 구절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신학자이신 교수님들이 정말 성경에서 중요한 신학을 담고 있는 구절들만 암송구절로 뽑으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왜 룻기의 이 말씀을 신학교 준비생들에게 외우게 하셨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율법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도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이고 뒤의 여섯 계명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이죠. 룻기 1장 16-17절 말씀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룻이라는 이방 여인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가치가 이 구절 안에 담겨 있는 것이죠.
제가 이번에 켈리포니아에서 참석한 졸업식 행사 중에 논문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논문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이웃 사랑이었고 그 실천으로 ‘이웃 안에 거하기(dwelling in the neighbor)’라는 구체적인 실천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페널로 참여한 졸업생 중 한 분이 제 발표가 다 끝나자 이런 질문을 던지시더군요. “목사님~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이라는 개념 안에 가족이 포함되는 것인가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가족은 이웃인가요 아닌가요? 저는 가족 또한 이웃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십계명의 이웃 사랑 계명 안에도 부모가 표현되고 있잖습니까? 우리는 가족 안에서부터 공감의 능력을 키워가고 공감을 실천해 가야 합니다. 논문 발표 시간에 짓궂은 패널 한 분이 같이 참석하여 듣고 있는 제 아내에게 질문을 하더군요. “김경헌 목사님이 집에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내는 망설임 없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아내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사람인가? 제 아내는 그 진짜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공감과 헤세드는 가정 안에서 먼저 실천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공감과 경청이 습관이 되도록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이번에 켈리포니아에서 미네소타로 돌아오는 길에 덴버에서 잠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아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분은 코칭 전문가이십니다. “코칭이 무엇입니까?” 라고 제가 물어 보니 이렇게 답하시더라구요. 상대방의 문제를 듣고 공감하여 그의 문제에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 이것이 코칭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모두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씨름하며 탈출구를 찾기 힘든 문제도 다른 이가 나에게 공감해줄 때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기게 됩니다. 남자분들은 천 번은 더 들으셨을 겁니다. 여자 분들이 문제를 이야기 하면 해결책을 찾아 주려고 하지 말라구요. 그냥 추임새만 잘 넣어주라구요. “그랬구나. 속상했겠다. 완전 나빴다 그 사람.” 등등의 추임새 하나로 여자들은 그 문제를 탈출할 능력을 갖는다고 하죠. “아 그거 이제 그만 말해”, “그건 이렇게 했어야지.”라며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제가 이걸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니 여자분들에게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더군요. 남자 아이들에게 “속상했겠다.” 그러니까. “아빠 내 말 잘 듣고 있는거야?”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남자 아이들에게 공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저에게는 큰 숙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공감과 헤세드의 실천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고부간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려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당시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는 다르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를 대하는 공감의 태도 그리고 언약적인 신실함으로서의 헤세드의 실천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는 가치입니다. AI와 챗GPT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공감과 헤세드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를 여기서 우리는 간파해 내야 합니다. 지식을 달달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은 앞으로 AI가 인간을 대체할 겁니다. 하지만 이웃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는 공감의 능력은 AI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공감 능력을 풍부하게 가진 아이로 키워가야 합니다. 공감을 받은 아이가 공감할 수 있는 아이로 클 수 있기에 부모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교육의 목표도 이런 공감하는 어린이들로 키워가는 것이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공감과 헤세드의 실천이 주님이 바라시는 더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룻과 나오미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감과 헤세드의 사람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삶을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