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46

제목: 예수 따름의 삶

 

1.

교회 옆의 큰 밭에 드디어 싹들이 움트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씨앗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사이 농부는 벌써 이 밭에 씨앗을 뿌려 놓았더군요. 그리고 삼 센치 정도 씨앗이 자랐는데 제가 판단하기로는 싹을 틔운 씨앗의 정체는 콩인 것 같아요. 작년에는 분명히 옥수수 밭이었는데 올해는 콩밭이 되려나 봅니다. 교회 길 건너 밭에도 싹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요 거기에는 아마도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류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 같아요. 제 말이 맞는지 틀린 지 가을에 한 번 지켜 보기로 하시지요. 어린 시절 이맘 때 초여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밭에서 깨를 심었던 것 같아요. 세 손가락으로 깨를 대여섯 알 정도 집어 들고 땅속에 손가락을 푹 집어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며칠이 안되어 깨의 싹이 돋아 납니다.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제때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절대 가을에 추수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하시기도 했죠. 여러분의 삶에 어떤 씨앗을 준비하셨고 어떤 씨앗을 심으시렵니까? 이왕이면 절망의 씨앗보다 소망의 씨앗을 심는 것이 좋고, 미움의 씨앗보다 사랑의 씨를 심는 것이 좋겠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준비해야 하고 파종해야 할 씨앗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으실 수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이런 말이 나오죠.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할 때 비기독교인들에게 들이미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란 어떤 변수에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이밀면 그 사람들이 오호 정말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군요. 이 예수를 내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던가요? 십중팔구는 그래서 뭐?”라는 반응을 보일 겁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 소위 말하는 복음전도라는 것을 캠퍼스에서 많이 해 봤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비그리스도인들의 저런 반응을 수 없이 많이 접했습니다. 그때는 저런 반응을 상대방에게 들으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것이 맞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맞는데 왜 인정을 않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여러분 왜 비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거나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고,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운 좋게도 예수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 자라오셨든지, 아니면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어떤 사람이나 그룹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믿으라는 분위기에서 일단 믿고 시작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믿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경험되어져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인정합니다. “저분이 너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야. 너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해 주어서 여러분을 부모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무조건적인 여러분의 사랑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로 인정합니다. 꾸준하게 엄마 아빠의 변함 없는 사랑을 경험한 아이라면 의심하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곳에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참여함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는 그 사람이 부모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적이고 참여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죠. 예수가 어떤 분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경험해보고 참여해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3.

로마서 1013-15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경험하게 해주고 예수의 은혜 안에 참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오해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이고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성경구절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읽어주기만 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구요. 물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진리가 진짜 진리로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 주장은 지극히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배타적이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딱 한가지 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배타적인 주장으로 만민이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인 주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통해 만민이 혜택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예수님의 이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만민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시지도 않으면서 이런 주장을 말로만 했다면 이 주장은 하나도 설득력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요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앗시리아의 수도로 선교를 보냅니다. 니느웨의 악이 넘쳐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야만 하는데 요나 니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 회개 좀 시키라고 하신 거죠.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니느웨의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 탑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을 보내십니다. 그때 요나는 배의 맨 아랫 칸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풍랑에 다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죠. 배의 짐을 던지고 자신의 신들께 기도를 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잠자던 요나를 발견했죠. 이 때 요나는 그들에게 배타적인 주장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신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 재난은 그런 거짓 신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재난은 나를 부르신 이스라엘의 신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배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거 맞죠? 그런데 그 주장이 용납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요나의 배타적인 주장이 기분 나쁠 지 모르지만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에 던져야만 이 재난이 그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긴가 민가 하는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집어 던지자 곧 바로 풍랑은 잔잔해 졌죠. 요나가 던져짐을 통해 선원들이 그의 배타적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언제 배타적 주장을 해야 하는지 요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기독교가 배타적 주장을 해서 세상의 광풍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주장이 용납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는 주장이 용납되려면 그 주장을 통해 세상의 광풍이 잠잠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배타적 주장 뒤에 이타적인 행동과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없이 그 진리는 결코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이타적인 삶을 먼저 보여주셨죠. 예수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런 주장이 있기 전에 지극히 이타적인 삶을 만민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 핵심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죠. 십자가는 죄인 중에도 가장 중범죄자들에게 내려진 로마의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거룩하고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왜 지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와 어둠의 권세를 이길 길은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는 이가 다른 이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의 이타적인 삶의 결정체였던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 지는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 볼래?”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항상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같은 삶에 너를 초대한다는 것이죠. 내가 가는 길로 너를 초대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 진리가 됨을 직접 보여주셨죠. 그리고 그 사랑이 씨앗이 되어 생명을 자라게 함을 부활을 통해 증명해 주신 것이구요. 그래서 예수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자신있게 말씀 하신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

 

왜 예배당의 중심에 항상 십자가가 위치해 있습니까? 십자가는 멋스런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 따름의 삶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이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의 사람으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겸손하게 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저는 가끔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열매의 씨앗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곤 하였습니다. 여기 복숭아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색깔입니까? 피치색입니다. 복숭아를 먹을 때 우리는 맛있는 과육만 먹고 씨앗은 내다버립니다. 씨앗은 맛도 없고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씨앗 안에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방법으로, 생명을 씨앗이라는 참으로 볼품 없고 부담스러운 것에 담습니다. 복숭아씨는 쭈글쭈글 주름살 투성이입니다. 망고씨는 오징어 뼈다귀 같아 보이구요.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들은 한결같이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면 너무나 맛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을 싹 틔우게 만드는 신앙의 결정체이자 씨앗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십자가에 다 녹아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는 삶을 살면 예수가 길과 진리요 생명입니다라는 주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삶을 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질문해 옵니다. “당신 안에 무엇이 있길래 당신의 삶은 우리와 다른 겁니까?”라구요.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은 반드시 다른 이의 삶에 임팩트를 줄 수 밖에 없고 열매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드디어 다섯 권짜리 소설 레 미제라블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소설이죠. 소설 1권에서 미리엘이라는 주교가 소개됩니다. 겉모양은 볼품 없는 사람입니다. 키도 작고 머리도 벗겨지고 매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사람은 매력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따뜻하고 인자하고 낭만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장발장은 29살에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투옥됩니다. 여러 번의 탈옥 시도로 그의 형량은 19년이나 늘어나게 됩니다. 미리엘 신부의 호의로 잠잘 곳이 없었던 출소자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지만 그의 은촛대를 훔치게 되죠. 경찰에 잡혀 주교 앞에 끌려 온 장발장에게 주교는 형제여 은쟁반까지 함께 가져가라고 했더니 가져가지 않은 겁니까?”라며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죠. 그 사건은 장발장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버립니다. 소설 후반부까지 줄기차게 장발장의 삶을 놓지 않고 좇아 온 것은 바로 주교의 사랑과 용납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장발장은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장발장은 소설의 5권에서 자베르라는 형사를 죽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자베르는 그가 출옥한 후에도 그를 다시 투옥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쫓아 다니며 괴롭혔던 사냥개와 같은 경찰였습니다. 자베르는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현장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가 시민들에게 잡혀 죽을 신세가 됩니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자신이 죽이겠다고 하며 그를 끌고 가죠. 그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그를 죽인 척하여 살려 보내줍니다. 자베르는 자신이 한 짓을 알기 때문에 장발장의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베르는 직선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장발장의 부드러운 곡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죠. 너무나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죠.

 

소설이 말하려는 핵심은 호의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임팩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이죠. 사랑은 말랑말랑하고 바보스럽고 손해 본 듯하고 느려보이지만 그 사랑이 결국 혁명보다 더 강력한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엘 주교의 호의와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장발장은 어느덧 자신도 미리엘 주교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용납을 직접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예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6.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분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분의 길의 방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삶에 다가가야만 합니다. 왜냐면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보다 더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씀이 끊임 없이 우리를 다그쳐서 우리를 겸손한 삶으로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예수 따름의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 볼품 없어 보이는 것일지 모르나 그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만민을 살리는 놀라운 비밀이 그 십자가의 길, 그러니까 예수 따름의 삶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곳입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서로 서로에게 선한 임팩트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다 같이 동참하는 가족의 삶과도 같습니다. 이곳에서 만큼은 빈부귀천을 묻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겉모양과 스펙에 상관 없이 존중 받고 사랑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생전 교회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천국의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다리가 되어 많은 이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