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3:1-20
제목: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1.
1945년에 미군 정보장교인 Carl Ferris Miller라는 군인이 한국으로 파견이 됩니다. 그는 한국전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는 1962년 우연히 충남 태안에 들렀다가 땅을 사달라는 어느 노인의 간곡한 부탁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해변의 절벽 땅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나무들과 식물들을 심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의 천리포 수목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밀러 박사는 1979년에 아예 한국인으로 귀하했고 그의 이름을 민병갈로 개명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끊임 없는 친환경적인 노력으로 천리포 수목원은 2000년에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얼마전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을 삽니다. 내가 하는 수목원은 이제 겨우 30년 됐지만, 적어도 300년은 내다보고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이곳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 년은 더 살 것입니다.”
이것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마음인가 봅니다. 당장 그 열매와 성과는 볼 수 없지만 후대를 위한 더 큰 그림 안에서 나무를 심는가 봅니다.
오늘은 어머니날입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성장은 나무처럼 참으로 더딥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가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정도는 한 부모 아래 잘 자라야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고, 그 때에야 부모를 떠나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지게 되죠. 부모라는 토양이 척박하고 메말라 있으면 자녀들의 삶도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이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우리 자녀들도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한 후손을 길러내는 것은 우리 일생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인 듯합니다. 왜냐면 그 후손들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광주에 있을 때 다녔던 모교회가 ‘광주제일교회’라는 교회였는데 유진벨(Eugene Bell)이라는 선교사님이 개척한 광주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후손인 Linton가문은 한국에 오랜 세월 정착하여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지금까지 힘써 오고 있습니다. 린튼가의 인요한 박사님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며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시더라구요. 린튼가를 보며 유진벨 선교사님의 믿음의 발걸음이 이제는 한국안에서 숲을 이뤄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민병갈 박사님도 그렇고 린튼가의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나그네로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바라기에 현재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실천해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삶도 평생 나그네이자 이방인으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본토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걸어온 인생이었죠. 그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도 지금 당장 이뤄질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뤄질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자기에게 맡겨준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과 이집트를 헤매는 과정 가운데서 가나안 땅 남단의 브엘세바 근처에 정착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이자 이방인이었습니다. 그와 평생을 함께 했던 인생의 동반자였던 사라가 나그네 땅에서 먼저 죽게 되자 아브라함의 슬픔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 중에 그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위해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땅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그것을 샀다는 이야기 가운데 기나긴 협상의 내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주인이었던 헷(Hittites) 민족의 리더인 에브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4절).” 나그네라는 히브리 말은 “게르(foreigner, stranger)”이구요, 떠돌이는 “토샤브(resident alien, sojourner)”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하는 의도와 함께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막벨라 굴과 그 주변의 밭과 나무들을 사겠다는 아브라함의 제안에 그땅의 주인인 에브론은 매장지를 위한 땅을 돈을 받지 않고 제공하겠다고 제의합니다. 매장지를 돈을 안 받고 주겠다는 제의는 언뜻 보면 그들의 호의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에게 체류자의 신분으로 묶어 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굳이 매장지를 돈을 주고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제시한 은 400세겔에 대해 흥정하거나 깍지도 않고 제 값 그대로 주고 삽니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땅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땅의 가치를 치를 댓가로 돈을 충분하게 주겠다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밭을 샀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래 계약서가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브론의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아브라함 가족 소유 매장지로 확정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62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62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실제로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이 굳이 막벨라 굴을 가족 매장지로 구입한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제 서서히 마무리 되어갑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약속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겁니다. 사라도 죽고 그도 기력이 다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후손들을 위해 믿음의 근거로 삼을 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작은 밭에 딸린 매장지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실제로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상속함으로써 이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방황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을 겁니다. 이 땅에 뼈를 묻고 후손들에게 이 땅을 물려주겠다는 신앙적인 결단과 결의를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현실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foreigner)이자 거류민(resident alien)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는 현실 너머의 약속을 붙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몇 백 평에 불과한 땅 매입이지만 가나안 땅 전체를 미리 앞당겨 차지해 보는 믿음의 행위였던 겁니다. 성경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정반대의 행위를 결단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남유다가 멸망을 앞두고 예레미야가 보여준 땅 매입에 관한 이야기는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32장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11년을 즉위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10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해에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2절).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체포되어 갇혀 있었죠. 그가 잡힌 이유는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왕인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감옥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던 거죠. 이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7절)." 지금 유다가 오늘 내일 망할 상황에서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밭을 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매입이 어떤 의미인지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해 주십니다. 예레미야 32장 15절 말씀입니다.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약속이 주어지고 있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결과물로 땅을 매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 매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결단이자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된 것이죠.
히브리서 11장 13-14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예레미야의 땅매입 행위가 믿음의 결단이라 해석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간절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고향이라 번역된 헬라말은 ‘파트리아(Patria)’로서 아버지의 땅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며 믿음으로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4.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약속을 붙드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 우리가 받아 든 약속과 전혀 다르더라도 약속을 붙들며 걸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어떤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언약 백성의 삶을 통해 온 세상을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약속 받은 땅을 한 뙤기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죽고 그의 후손을 통해 마침내 이 땅 위에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지금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이라도 사들여 그 약속을 이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매우 어둡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며 답답해 합니다. 이 땅 위에 세워지겠다던 하나님의 나라는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셨다고 들었는데 악의 세력은 더 강력해 진 것 같아 보이기만 합니다. 악은 일상화 되었고 보편화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게 세상의 풍조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아가라 부탁하십니다.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고 견지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에브론을 비롯한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사용권을 무상으로 주며 그를 그 사회에 편입시키려 들었습니다. 너는 우리와 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인 것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당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기백을 놓지 않았습니다. 400세겔의 거액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나그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시고 이 땅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자 모이는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잘 못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돌려드리기 위해 우리는 찬양하며 기도하며 우리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안정감과 유사전능성에 대항하고자 우리는 헌금을 하며 그 헌금을 통해 사랑을 흘러보내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이 세상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함께 모여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현실과 악이 평범화 된 현실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는다는 믿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내일 유다가 멸망하더라도 아나돗의 밭을 샀던 예레미야처럼, 고향(아버지집)을 찾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표현한 선진들처럼, 약속한 것을 지금은 받지 못할지라도 그 약속을 잊거나 저버리지 말길 바랍니다. 오히려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 행동들을 결단하시고 실행해 옮겨 보십시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교회에서는 너무나 신실해 보이는데, 교회 밖을 벗어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하게 만들게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라면 교회 밖 현실에서 우리 태도는 분명히 달라야만 합니다. 세상에 발 딛고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더 사랑하고, 더 친절하고, 더 긍정적이고, 더 소망으로 가득하고, 더 인내하고, 더 절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품위 있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5.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더라도 우리는 밭을 사고 땅을 경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도 오늘이라는 일상을 우리는 묵묵히 살아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지난 겨울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그렇게 외롭게 서 있던 겨울나무들도 이제는 푸르른 신록의 잔치에 하나같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이파리를 이르게 틔우기도 하고 어떤 나무들은 아직도 앙상한 채로 있지만 언젠가는 푸르른 잔치에 동참하겠죠. 우리의 신앙도 나무들에게서 배웁니다. 약속이 더디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버텨서서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묵묵히 뿌리를 내릴 마음으로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인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부인들과 요셉은 막벨라굴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요인이되어 400년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의 땅인 약속의 땅을 잊지 않고 돌아오죠. 그런 면에서 우리의 일상 안의 믿음의 실천들은 우리 삶에 귀한 열매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의 부모님은 경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인 연천 마을이라는 곳에서 유일한 광산 김씨로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제 생각으론 꾀나 녹녹치 않은 현실 속에서 조상 중 한 분이 이씨 집성촌으로 들어가셔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시골의 집성촌의 분위기를 아시는 분들은 그 텃세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이씨 마을의 나그네처럼 살아가던 아버지께서 큰 결정을 내리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면소재지로 이사를 결심하셨죠. 면사무소와 교회 사이에 낀 집을 사셨고 지금도 그곳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웃에 위치한 겁니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믿음이 없는 분들이셨지만 그 이사의 결정이 저희 집안의 운명을 좌우했던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보다 앞서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들이게 된 것이죠. 자녀들이 교회가니 어머니 아버지도 교회에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질 수 밖에 없는 격이죠. 교회 가까이 살다 보니 가족들의 신앙은 깊어지면서 따라온 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의 이사는 정말 귀한 선(先) 투자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지금 내려지는 신앙의 결단과 행동들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열매가 되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은 선물임과 동시에 돈으로 매입해야 하는 땅, 곧 믿음의 선(先) 투자를 요구하는 땅임을 기억하십시오. 가족의 달을 맞아 우리가 만들어갈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정체성에 대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 답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선(先) 투자하는 이들의 삶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믿음의 투자는 더디더라도 반드시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백 세겔을 투자하여 나중에 후손들이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했잖습니까?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는 길손으로 살아갈지 모르지만 우리는 참 고향(파트리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귀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때론 아브라함처럼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이 다가올 지 모르지만, 때론 예레미야처럼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대재앙이 임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인생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투자하는 삶은 어떤 투자보다 수익률이 높고 보장성이 높은 투자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이 아브라함의 가문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이뤄드리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