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브레드 이발소”라는 만화를 즐겨 봅니다. 이 만화에서 에피소드가 끝나면 “디저트 이야기”라는 것을 짧게 보여주는데, 우리가 즐겨 먹는 디저트들의 유래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소개합니다. 이번 주에는 치즈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기원전 6000년 경 아라비아에 카나나라는 우유를 파는 상인이 살았었죠. 그는 양의 젖을 짜서 가죽 주머니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하루는 양의 젖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이웃 나라에 팔 요량으로 먼 길을 떠났죠. 그는 사막을 지나며 모래 폭풍도 만나기도 하고, 전갈에게 쫓겨 도망치기도 하고, 사막의 뜨거운 햇살에 갈증을 느끼며 겨우 이웃 나라에 도착했답니다. 그런데 우유를 팔기 위해 가죽부대를 열었더니 우유는 안 나오고 웬 딱딱한 덩어리만 나와 무척 당황했죠. 그런데 이웃 나라 사람들은 고소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나는 이 마른 우윳덩어리에 호기심을 느꼈고 우유보다 더 많은 돈을 쳐주었죠. 카나나는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돌아 올 수 있었죠. 사막의 높은 기온과 흔들림이 가죽 부대 안의 우유의 지방질을 굳게 만들고 발효되게 만들어 치즈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지만 그 시련으로 말미암아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세옹지마라는 사자성어처럼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섣부른 실망이나 자만은 지혜롭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펜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자, 모두 절망했지만 장소와 국경을 초월한 랜선의 세계가 열렸죠. 물론 온라인의 만남이 대면을 대체할 수 없지만 온라인을 통한 만남들은 우리의 시간과 번거로움들을 많이 덜어주었죠. 우리의 삶을 제한되게 만드는 여러 시험과 한계들을 통해 우리들은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결과물들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오 히려 제한적인 상황과 한계들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것들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헨델의 곡으로 알려진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첫 소절은 “도시라솔 파미레도”의 단순한 계이름의 조합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제약 안에서 아름다운 멜로디를 헨델은 만들어 냅니다. 누에고치는 자신을 옭아매는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 명주실을 몸에서 뿜어 내어 비단의 재료를 만들어 냅니다. 때론 우리 삶을 흔들고 답답하게 만드는 고난과 제약들을 통해 하 나님은 우리의 삶에 창조적인 열매들을 맺히게 하실 것을 기대하면 좋겠 습니다. 지금 너무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시련을 감사함으로 잘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흔들림과 시련을 통해 우리 인생은 치즈보다 더 고소하고 맛깔난 인생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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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지난 주에 가을의 정취를 깊이 느꼈다는 말이 무색하게 로체스터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이곳 미네소타의 겨울의 혹독함을 10월 중순의 첫눈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봅니다. 집에 설치돼 있는 파이어 플레이스(fire place)를 처음으로 켜보았습니다. 따스함이 좋았습니다. 파이어 플레이스의 가스불을 보고 있노라니 에너지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세계의 현실이 자연스레 겹쳐 보이더군요.

그야말로 세계는 에너지 전쟁터가 되어가는 형국입니다. 석유를 생산하는 국가들의 연합체인 OPEC과 그외의 산유국들이 함께하는 OPEC PLUS는 원유 생산과 판매를 줄이겠다고 나오자 기름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발트해를 통해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에 어떤 인위적인 타격이 가해져 가스가 유출되는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는 부인하지만 러시아가 유럽의 기간시설을 고의로 훼손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수작이 아닌지 유럽 국가들은 의심합니다. 겨울철을 앞두고 유럽의 국가들은 에너지 문제 때문에 긴장하며 그 공포는 더욱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 지구 반대편 어느 곳에서 벌어진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대혼란 가운데 처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문명이 나아갈 바와 지향해야 할 바를 알려줘야 할 책임이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 대주교는 설교를 통해 러시아의 청년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병역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은 남을 위한 죽음이기에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치 치하의 독일교회를 방불케 합니다. 권력과 욕망에 사로잡힌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을 때 그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종교가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전락될 때인류문명은 표류할 수 밖에 없고 혼돈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내 자아(ego)의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할때 화해와 사랑, 자비와 긍휼, 나눔과 연대가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나치의 권력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독일의 교회 지도자들은 1935년 바르멘에 모여 <바르멘 선언>이라는 것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후의 세대에서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라고 불렀습니다. 욕망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지구촌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며 따라가야 할까요? 우리의 참되고 진실한 고백을 통해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른 길로 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터가 되어버린 세상과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안에 주님의 평화가 온전하게 임하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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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미네소타에 와서 가을의 정취를 오랜만에 느껴봅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 매우 잘 어울리는 계절인 듯합니다. 노랗고 붉은 단풍이 참으로 오랜만이고 반갑기까지 합니다. 나무는계절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아서 이파리에 보내주던 영양분과 수분을 멈추게 하여 단풍을 만들고 이파리를 떨군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때를 알고 버릴 줄 아는 나무가 부럽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둘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도종환 시인의 “다시피는 꽃”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시인은 깨끗히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 없음을 노래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찬란한 부활의 봄을 맞는 비결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열매와 이파리를 버리는 것이라는 걸 나무는 아나 봅니다. 비움이 없이 채움이 있을 수 없고, 버림이 없이 살림도 없다는 것을 왜 나만 잘 모르는 걸까요? 가장 아름답고 소중했던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신 우리 주님은 찬란한 부활로 다시 그 생명을 보상 받으셨죠. 떨어지는 낙엽 앞에서 겸손히 주님을 느껴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비워내야할지돌아보게 됩니다. 가을 단풍처럼 화려하진 않더라도 내게 있는 귀한 것을 돌려드려야겠습니다. 가을 열매처럼 맛깔스럽진 않더라도 내 삶에 맺은 작은 열매들을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더 갖기 위해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며 나누는 삶이여야겠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서리가 내린 걸 보니 겨울이 오나봅니다. 내년 봄날까지 다들 강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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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한 목장 모임에 참석했는데 나눔 도중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있는데 양식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이 던져졌다. 성경에는 왜 그렇게 먹거리 이야기들이 많은지 주기도문의 양식의 의미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간다. 실제적으로 많은 필요들을 느낀다. 그 모든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 밥이자 빵이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날마다 우리 실존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인정을 의미한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육신적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배고픈 이들을 동정하셨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오병이어 기적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며 배고픈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배고픈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에서 나오는 기도이기도 하다.

 

셋째, 일용한을 '충분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분한 양식을 구하되, 넘치거나 과하게 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자족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수세기 전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기도에서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빵 같은 기본적인 것이 전부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놀란 바 있다.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가축 떼도 비단 옷도 아니다. 높은 지위도 기념비도 조상(彫像)도 아니다. 다만 빵이 전부다. "라고 했다.

 

넷째, 나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란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빵은 공동체적 산물이다. 빵은 혼자 힘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Iowa의 농부들, Twin City의 제빵업자들, Rochester의 배달 트럭 운전사들, 빵은 이들 모두의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는 빵이 공동체적 산물임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빵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성 바실(St. Basil the Great)은 한 설교에서, "나의 소유물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했다. 특히,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들은 더더욱 그렇다. 우리들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들은 헐벗은 이들의 것일 수 있다. 우리의 금고와 계좌에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는 설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세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고 육체를 가지고 삶을 영위해 가야 한다. 또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하고 실행해 옮겨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 그러기에 육체를 대표하며 육체를 상징하는 양식을 향한 태도와 양식에 대한 자세가 우리의 신앙의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렇게 많은 먹거리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나눌 것인지에 대해 지대하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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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큰 아이와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녀석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자 사뭇 놀랐다. “아빠 난 정말 어렸을 때 세상이 천국인 줄 알았어.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됐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거든. 근데 내가 커보니까(지가 얼마나 컸다고^^) 세상이 그때랑은 달라 보여. 난 걱정하는 것도 많아졌고 욕심도 많아졌고 두려워 하는 것도 많아진 것 같아. 세상이 천국 같지는 않아.” 이렇게 인생을 깨달아 가며 철이 드는가 보다 하며 웃어 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녀석도 이제 어린이의 옷을 벗어가고 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막내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지러지게 웃을 때가 많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감각과 상상력을 접할 때 나는 놀란다. 가끔 아이들과 개그콘서트를 본다. 한번은 한 개그맨이 어떤 드라마에서 조선의 왕이 한 말을 가지고 페러디를 한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그걸 보더니 한 글자만 바꿔서 자기만의 페러디를 즉석해서 만들어 낸다. “지ㄹ하고 살빠졌네”. 엥? 이건 뭐지? 근데 생각해보니 너무 웃기다. 야 이런 다이어트 방법이 있으면 정말 최고겠는걸. 하하하.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존재들인가 보다. 큰 아이의 말처럼 그들은 아마도 천국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랬나? 예수님도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아야 들어가는 거라고.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봄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읽으며 마음이 참 따뜻해졌다. 어린이 독서지도사인 저자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것들과 에피소들을 소개한 에세이인데 우리가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와 그들의 순수한 상상력에 감동하며 읽었다. 한편으로 내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딱딱해져 버렸는지 그들의 말랑함이 나를 자극하는 시간이었다. 교회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 어떠해야 할까? 교회 학교, 이 명칭부터 너무 딱딱하다. 그 말랑한 녀석들에게 딱딱한 교리 교육으로 정형화되고 틀에 짜여진 신앙인을 찍어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이야기는 말랑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그들을 가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상상력이라는 연료를 가지고 비상하게 한다. 우리도 한 달에 한 번은 이 아이들과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 예배때마다 우리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성경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국에 어울리는 그런 존재들로 빚어져 가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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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 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 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 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의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고 가르치시는 

어머니의 두렐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 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정일근의 시,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릴적 둥근 밥상에서 온 식구가 모여 밥을 먹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열 두 명의 대가족이 두 개의 둥근 두레밥상에 나눠 앉아 밥을 먹곤 했죠. 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둥글게 둘러 앉아 밥상을 나누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둥근 달이 뜨는 추석인데도 어머니의 밥상에 함께 하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밥상에 대비해서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으로 묘사합니다. 어머니의 밥상이 누구나 환영해주고 누구나 나눔에 참여하는 평등하고 호의적인 밥상이라면,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라는 뜻의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개들의 밥상으로 인간미를 잃어버린 약육강식의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밥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글과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노라면 어머니의 둥근 밥상이 그리워지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둥근 하나님의 두레밥상이어야 합니다. 이 두레밥상에 모이면 어느 누구 하나 천한 이가 없고 모두가 귀하고 소중해집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 신비한 하나님입니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자기 몸을 뜯어 먹으라 내어 주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몸을 먹습니다. 함께 Communion에 동참하기에 우리는 한 Community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는 두레밥상에 둥글게 모여 사랑을 나누는 한 식구들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한솥밥(communion) 먹는 식구 아이가?” 다하나 밥상공동체에 새식구가 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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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소유가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관계가 주는 만족으로 부유한 교회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아

다른 이들의 존재를 꽃피워주는 햇살 같은 교회

분열과 다툼으로 평화(샬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치유하는 평화의 교회비틀거리더라도 정의의 길을 걸으며

모든 위선과 불의에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한 교회

부한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소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부르짖음에 경청하며 동행하는 쉼터교회크고 성장하는 교회보다

작더라도 유기적이고 건강한 교회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라 핑계대지 않고

습득된 성품으로서 그리스도의 미덕을 추구하는 덕스러운 교회서로의 차이와 다름에 불편해 하기보다

차이와 다름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모자이크 교회

일상과 로컬의 소중함을 알아

지역 사회와 함께 동행하며 공생하는 동네 교회

위로 하나님 사랑, 옆으로 성도 사랑,

바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신음하는 피조세계와 생태계 속에서

온갖 살아 숨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교회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향기나는 인격과 성품으로 세상 속에서 열매 맺는 일상 교회멈춤(샤밧)의 소중함과 안식의 가치를 알고

느리더라도 함께 손잡으며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교회

이곳이 마지막 날에나 보게 될 천국인양

하나님 나라를 맛빼기로 보여주는 맛집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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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46-16

제목: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Where is your brother?)

 

1.

가족을 건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특히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은 무거운 숙제입니다. 한국 어르신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을 농사에 빗대어 자식 농사라고도 부르곤 하셨죠.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녀를 키우는 것은 수고해야 하고 시기 적절한 보살핌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있기에 즐겁고 보람된 일들도 많지만, 자녀들을 키우며 겪는 수고와 애씀은 더 많은 듯 합니다. 또 자녀가 많으면 아이들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요. 아무리 쌍둥이도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특히 형제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들 형제의 이야기는 대부분 갈등의 이야기이고, 그 갈등은 서로가 너무 달라서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형제의 이야기인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만 형제라는 히브리 말 아흐(אָח)’6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아담의 삶에 분명 이 두 아들의 탄생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큰 아이를 낳은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얻다, 생산하다라는 뜻의 가인이라 짓습니다. 곧이어 둘째 아들 아벨이 태어났으니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적잖은 위로가 됐을 겁니다. 큰 아들 가인과 둘째 아들 아벨은 서로가 너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밭을 가는 농부와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목자의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스스로 먹이를 찾고 자라는 양을 키우는 것에 비하면 척박한 땅을 가는 농사가 훨씬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힘들게 농사를 지어본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갈등은 그들의 제사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각자가 생산해 낸 것에서 취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제물과 제물을 드린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에서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해석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제물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알아내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곡식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신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깔뱅주의적인Calvinism 전통에서는 그 이유를 가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중에 동생을 돌로 쳐죽인 것을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아벨은 제사를 더 정성스럽게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신약의 용어를 가져와서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요한복음 4)’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합리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의 자유를 우리의 좁은 견해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가인의 제물과 그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했는지 솔직히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 이후에 나타난 가인의 반응입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반응이라면 가인은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무엇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즐거워 하지 않고 자신의 제물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받지 않는지 성찰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가인의 마음을 아시고 따끔하게 충고하시죠. 7절 말씀입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이 가인의 행실을 가지고 평가하며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르지 않은 태도와 행동으로 반응하고 있는 가인에게 경고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도 가인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져버리고 오히려 죄에게 주도권을 넘겨 줘버립니다. 동생을 죽이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3.

가인은 인류 최초의 판사가 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는 사법시험을 치르지도 않았고 누가 그를 재판관으로 세우지도 않았는데도 동생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합니다. 가인의 법정에서 내려진 동생 아벨에 대한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가인의 법정은 공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긍휼과 자비 또한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인데도 그에게 베풀 자비와 사랑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가인의 법정을 지배하는 원리는 시기와 질투였습니다. 동생의 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시기심이었고 그를 사형에 처하는 기준 또한 시기심과 같은 뿌리를 둔 질투였습니다.  결국 시기심과 질투는 가인의 마음의 문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를 통째로 삼켜버린 뱀과 같이 폭력적이었습니다. 가인의 판결의 칼날은 아벨을 향한 것 같았지만 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하나님에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인은 동생을 죽여 하나님에게 분풀이 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벨이 뭔 죄라고 아벨이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은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를 찾아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집에 돌아온 아빠가 엄마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아빠의 이유 없는 화풀이에 짜증이 난  엄마는 잘못도 없는 아들에게 큰 소리 칩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화가 난 아들은 밖으로 나가 강아지에게 발길질 하지요. 풀리지 않는 분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이어져 내려갑니다.

 

가인의 모든 폭력적인 결정의 뿌리는 비교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벨과 자신의 제물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를 비교했습니다. 가인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자신은 늘 동생보다 앞서야 했고 동생보다 좋은 결과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강요당한 삶의 습관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만들어 낸것인지는 모르지만 가인은 비교했고 괴로워했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비교하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비교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합니다. 비교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가인의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는 어리석은 판결을 내리게 했고,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부메랑으로 돌아온 하나님의 판결문을 보십시오. “니가 흘리게 한 동생의 피로 인해 땅이 더럽혀졌다. 그리고 이제 동생의 피를 받아 마신 땅은 너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니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수확은 보잘 것 없을 것이다. 너는 객이 되어 떠돌아 다니며 살게 될 것이다.” 아벨을 죽인 저주의 결과는 농사꾼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인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일 때는 그렇게 폭력적이더니 이제는 마치 자기가 피해자라도 되는 것 마냥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죠. 내가 하면 로멘스고 다른 이가 하면 불륜이다. 가인은 동생에게 스스로 내린 판결은 정당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판결은 부당하다고 따지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가인이 아벨을 향해 내린 판결보다 더 이상한 일이 가인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항변에 반응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인이 이제 자기가 떠돌이가 되고 객이 되어 살아가면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을 품으로 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15)”

형제를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할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예상하며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토록 자기 중심적인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동생을 쳐죽인 죄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을 죄인인 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놀랍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스스로 위험에 빠진 인간을 부둥켜 안으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4.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이야기에 바로 잇대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한 가족이자 친구처럼 지낸 자신의 형제를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 연약한 인간을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대조시킵니다. 형제를 죽인 죄인의 살길을 염려하시고 그의 보호자로 자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놀랍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가인 나쁜 놈, 가인과 같이 살면 안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서로의 다름과 차이을 인정하지 못할 때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형제가 여섯 번 반복되는 것은 형제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시편103).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첫걸음은 형제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314절도 시편 103편 말씀과 마찬가지로 형제 사랑을 영원한 생명과 연결시켜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줍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5.

아우 아벨은 나보다 더 연약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들의 판결자가 되어서 판단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어주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죠.

지금도 하나님은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심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형제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비교에서 시작된 시기심과 질투의 노예에서 벗어나 아우 사랑 또는 이웃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질투 또는 시기심의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아우와 이웃들의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됨은 내 옆에 있는 이들로 말미암는다는 이 놀라움을 깨닫는 사람만이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신비로 다가옵니다.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 신비로워 하는 자만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아우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그들을 도우며 살 때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가인을 위해 보호자로 자청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Vulnerable한 존재가 되어버린 가인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잖아요. 그의 몸에 잘 보이는 곳에 표시를 해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 또한 시기심과 질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vulnerable한 존재들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vulnerable한 아우들은 누가 있을까요? 여러분의 사시는 동네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미네소타와 로체스터 안에는 많은 난민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낙인 찍힌 가인처럼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네소타에 와서 히잡을 한 여성들이나 무슬림 복장을 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눈에 띄더군요. 솔직히 다른 종교와 피부색,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이 낯설기도 하고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사는 집 주변에도 여러 아프리카계 난민으로 보이는 이웃들이 있더라구요. 그들에게 미소지으며 이야기를 걸어주고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이 받는 위로는 클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이 미국 땅에 이주해 왔을 때 미국사람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주고 웃어줄 때 느꼈던 우리 마음의 평안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vulnerable 한 존재들이 있지 않은지 살피고 서로 돌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로체스터에 온지 1년 미만인 분들은 모두 취약함 가운데 계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라를 이주해 온 분들은 더더욱 그렇구요. 어느 누구나 낯선 땅에 들어가면 취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이야기 나눌 상대도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편안하게 느꼈던 안정적인 곳을 떠나 왔기에 모든 것이 불안합니다. 한국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합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정말 바보 같아 보이고 자존감이 확 떨어집니다. 이런 분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시고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냥 웃어주고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큰 격려가 될 겁니다.  진로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 임산부들도 정서적으로 돌봄이 필요하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아우네요.

 

요한 일서 3장 말씀에서 말하듯,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아우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아우 또는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들과 나를 비교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연약함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신비함으로 대하십시오. 그가 있음으로 나됨이 이뤄진다는 신비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비감이 우리 삶에 사라질 때 인생은 버거워지고 다른 이들을 향한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지금도 묻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의 아우는 누구이며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자가 아닌 형제이자 이웃으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길 우리 주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설 곳이 없는 이들의 설 자리가 되어주시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Text: Genesis 4:6-16

Title: Where is your brother?

translated by Myunha Kim

 

1.

Taking care of a family is not an easy journey. Raising children is a particularly difficult task. Korean elders often used to refer to raising children as farming and thus, called it “child farming.” Because raising children, like farming, requires hard work and timely care. Several aspects of having children are enjoyable and worthwhile, but it also seems that many times there is more hard work and effort in raising children as well. Additionally, if you have multiple children, you will need to provide adapt the way you care for each child. I've heard that even twins are very different from each other.

We must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story immediately following Adam and Eve after they were expelled from the Garden of Eden is the story of the brothers. Only in Genesis 4, the Hebrew word for brother, ‘Ah (אָח)’, is used six times. The birth of these two sons must have been a great comfort in Adam and Eve's life. The joy of giving birth to their firstborn was so great that they named him Ga-in, which means “to obtain, to produce.” Soon after, when their second son, Abel, was born, it must’ve been very comforting for Adam and Eve to have two sons. Cain, the eldest son, and Abel, the second son, seem to have been very different from one another. This is evident when you look at their career choices. Cain became a farmer, and Abel became a shepherd. The life of a farmer plowing the fields and the life of a shepherd tending sheep are completely different lifestyles. Farming in a barren land where thornbushes and thistles grow must not have been easy. Of course, the life of a shepherd was also difficult, but I think farming in barren land was much more difficult than finding food for oneself and raising sheep. This is my opinion purely from my experience in farming.

2.

The conflict between Cain and Abel arises from their different sacrifices or offerings. Cain and Abel took what they each had produced and offered these things as sacrifices to God. However, the problem arises from the different attitudes of the two people who offered it. Until now, many interpreters have made great efforts to find out what the difference was between Cain and Abel's offerings. Some even make the ridiculous claim that God prefers animals to grains. The Calvinist tradition interprets the reason as Cain having a problem. You can assume what kind of person he was by observing that he later stoned his younger brother to death. Some interpret it because Abel offered sacrifices more carefully. Referring to the New Testament terminology, Abel says that God accepted the sacrifice because he offered it “in Spirit and truth” (John 4). Any interpretation is reasonable, but we honestly cannot judge God's will from our narrow views. Frankly, we do not know why Cain's offering did not please God. It was simply God's will.

An important factor is Cain's reaction after making his sacrifice. If it was a humble and honest response, Cain should have reflected on himself. He would have thought to reflect on why God did not accept him and if there was a problem with his offering that God did not like. However, Cain tried to find the reason for someone other than himself. God knew Cain's heart at that time and gave him harsh advice in Verse 7.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rule over it.” It seems that God was evaluating Cain's heart and conduct, He is warning Cain, who is reacting with a wrong attitude and action. Even after hearing these words from God, Cain did not change his mind or his heart. No, rather, he didn't understand God even more. He forgot God's Word that he had to rule over sin, and instead gave the initiative to sin and decided to kill his younger brother.

3.

Cain decides to become mankind's first judge. He decides to pass judgment on his brother even though he has not taken the BAR exam, and no one has made him a judge. Cain's court sentenced his brother Abel to death. Cain's court was not only without justice, but it was hard to find any sort of mercy. Even though Abel is his brother who shares the same blood, there seems to be no mercy or love to be given to him. The principles governing Cain's court were envy and jealousy. The criterion for judging Abel's sin was envy, and the criterion for Cain punishing him was jealousy, which also had the same root as envy. In the end, envy and jealousy were as violent as the snake that coiled around the door of Cain's heart and swallowed him whole. The blade of Cain's judgment seemed to be aimed at Abel, but it was pointed at God. Cain wanted to take his anger out on God by killing his brother, but he couldn't take out his anger on God. What sin did Abel have to die for? People try to relieve their anger by finding a weaker being than themselves. After being fed up with the boss at work, the dad comes home and yells at his spouse out of anger. The wife, annoyed by her husband’s unprovoked anger, yells at her son without any plausible reason. Angry at the mother's nagging, the son goes outside and kicks the dog. Unresolved anger bites its tail and passes on to those who are weaker.

The root of Cain's violent actions stemmed from the act of comparing. He compared his offering to Abel's and God's evaluation of them. Cain did not want to admi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rothers. He always had to be ahead of his brother and outperform his brother. I don't know if it was enforced by his parents or if it's something he created himself, but Cain compared and suffered. As we discussed last week, a life of comparison is an unhappy life. The results of comparing are truly devastating. Comparison is a self-defeating, foolish act. The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ain's comparison led to a foolish judgment and returned to him like a boomerang. Look at God's sentencing that came back as a boomerang. “Now you are under a curse and driven from the ground, whic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your brother’s blood from your hand. When you work the ground, it will no longer yield its crops for you. You will be a restless wanderer on the earth.” The curse of killing his brother Abel was fatal for Cain, who had to live as a farmer.

Cain was so violent when he killed his younger brother, but now he is arguing against God as if he was the victim. Humans are such fragile beings. There is a saying that it is a “fire within me”. If I do it, it's romance, but if someone else does it, it's an affair. Isn't Cain arguing that the judgment he passed on his brother was just and that God's judgment against him was unjust?

However, it was at this moment that something stranger than Cain's judgment toward Abel was happening to Cain. It means that God is responding to Cain's protest. Cain complains to God that if he continues to live as a wanderer and a stranger, everyone will try to kill him. God takes such a sinner into his arms and speaks. "It will not be like that. Anyone who kills Cain will be punished sevenfold." The Lord put a mark on Cain so that no one who met him could kill him (v. 15)."

When Cain unleashed his merciless judgment on his brother, he was unaware. But now as he anticipates the dangers approaching him, Cain realizes the seriousness of his circumstance.

It is amazing the mercy and compassion of God, who takes himself as the protector of Cain, a sinner who deserves punishment for the sin of striking and killing his brother. We can observe God's love to embrace human beings who are in danger due to disobedience.

4.

Why does the story of Cain and Abel appear right after Genesis 3 which is the story of the fall of humanity? First, it is to show the reality of humanity that has left God. It is to accuse the human weakness and sinfulness which led to killing a brother, who was like a family member and friend, due to envy and jealousy. Then, the Bible contrasts the love and mercy of God who embraces the weak, sinful human being. The mercy of God who cares about the life of the murderer and being his protector is amazing.

The story of Cain and Abel does not convey the message that Cain is a bad guy and that you should not live like Cain. Rather, it wants to show us how destructive humans can be when we compare ourselves to others and fail to acknowledge each other's diversities and differences. Brotherhood repeated six times is meant to tell us how valuable brotherly love is. It was meant to be paradoxical to show how good and beautiful it is for brothers to live together in unity (Psalm 103). The first step in living as a child of God is brotherly love.

Like the words of Psalm 103, 1 John 3:14 connects brotherly love with eternal life.

“We know that we have passed from death to life because we love each other. Anyone who does not love remains in death.”

5.

The younger brother Abel represents those who are weaker. God did not call us to judge as judges for those who are weaker than ourselves. Rather, He called us to be protectors of the weak and to love them.

Even now, God asks us, “Where is your brother Abel?” He invites us not to be judges but to be brothers. He calls us to get out of the slavery of envy and jealousy that started from comparison and move to the place of brotherly love or neighborly love.

Is there any way to escape from the sin of envy or jealousy? There are two ways. First, I must not be the judge of my brother and neighbors. To do so, we must not forget that we are nothing more than a ‘day-living’ creature. Only those who realize the mystery that my ‘identity’ comes from the people next to me. Only those who are mystical about the existence of others can advance to loving others.

Second, when we feel responsible for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and live by helping them, we can become true people of God. The fact that God volunteered to be a guardian for Cain, who became a murderer, showed us what kind of life we should lead. God won't just leave Cain who has become a vulnerable being. He puts a mark on his body where he can see it, revealing that he is protected by God. We also must embrace vulnerable beings to escape from the bondage of envy and jealousy.

Who are the vulnerable brothers around us? It may be different depending on where you live, but many refugees live as our neighbors here in Rochester and greater Minnesota. They left their homes and came to this strange land for a better life, yet many times they are discriminated against like Cain who was stigmatized. When I first came to Minnesota, I noticed women wearing hijabs and Africans wearing Muslim attire. To be honest, it is true that people with different religions, skin colors, and cultures feel unfamiliar and strange. Around the house where I live, several neighbors appear to be African refugees. The consolation they receive will be great just by smiling at them, talking to them, and saying hello. We all remember the peace of mind we felt when we first immigrated to this land and the Americans were kind to us and smiled at us.

We will have to take care of each other to see if there are vulnerable brothers in our church. For instance, if you have been to Rochester for less than a year, you can think of it as vulnerable. This is especially true for those who have immigrated to the country. Everyone is vulnerable when they enter a foreign land. Emotionally unstable. There aren't many people to talk to. Everything is unstable because he or she has left the stable place where they or felt comfortable. I sometimes make absurd mistakes here in a foreign land that I would never make in Korea. Then I realize how foolish I probably looked and my self-esteem plummets. However, telling those people it's okay and warmly encouraging them will be greatly comforting. Simply, sharing a smile or asking them how they're doing will add a lot of encouragement to their lives.

As the words of 1 John: 3 say, those who do not love their brothers and sisters remain in death. Loving our 'brother' is evidence of our faith. If you are a man of faith, love your brother or your neighbor. Treat those around you mystically so as not to fall into the weakness of envy or jealousy by comparing yourself to them. Only those who live with a sense of understanding that “I become who I am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ose around me” can taste true freedom in life. When this sense of mystery disappears from our lives, life becomes burdensome and the room for others disappears. The Lord still asks us who want to live a life of faith. “Where is your brother?” Who is your brother and where is he now? Our Lord desperately wants you to respond to His call to live as a brother and neighbor, not as a judge. I bless you to live a blessed life that provides a place for those who have no place to stand.

Posted by speramus

본문: 마태복음 2020-28

제목: 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

1.

여러분의 인생에 목표가 있으세요? 어린이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인생의 목표가 있나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질문이 어려운 것 같으니까 쉬운 질문을 드려볼게요. 여러분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왜 공부하세요? 무엇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좋은 대학에 가려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좋은 대학은 왜 가야하나요? 좋은 대학에 가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구요? 그렇다면 좋은 직업을 가지면 뭐가 좋나요? 좋은 직업을 가지면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이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니까요. 그럼 돈을 많이 벌면 뭐가 좋나요?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살 수 있다구요? “목사님 저는 멋진 자동차를 타고 싶어요. 돈만 있으면 멋진 집도 사고, 제가 원하는 뭐든지 다 살 수 있다구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1등이 되는 것이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부를 잘 하고 1등이 되면 물론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을 자랑스러워할 테니까요. 목사님 친구가 스텐포드 대학교 후디를 선물해 주었어요. 스텐포드 대학교 후디를 입었더니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당신 부모님은 분명히 당신을 자랑스러워 할거예요.”

 

이제 부모님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에 대한 목표가 있으신가요? 이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좋으시겠어요? 많은 부모들의 자녀들을 향한 소원은 비슷합니다. 우리 아이가 top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가 큰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아이들의 삶을 향한 목표는 높은 지위와 풍부한 재력을 통해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아이들과 상관 없이 성인 여러분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셨고 목적을 발견하셨나요?경쟁에서 살아남고 남보다 높은 위치에 앉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은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그걸 놓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2.

세베대의 부인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어요. 그녀는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큰 사람이 되길 바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는 아들들이 가장 높은 지위를 갖길 바랐죠.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죠. 자기 아들들이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예수님이 갈릴리 근처에서 3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왕이 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엄마는 큰 맘 먹고 예수님을 찾아가서 직접 부탁해 보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부탁했을까요? 예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장 높은 벼슬(position)을 달라는 것이었죠. 이것은 엄연한 반칙이었죠.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너무나 화가 났어요. “누구는 엄마가 없어서 안 부른 줄 알아?”, “너희 정말 못됐구나. 그렇게 살고 싶냐?”, “야이 삐리리야~” 이제 욕까지 오고 가며 서로 싸움이 일어났죠.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서십니다. “워워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얘기해 주고 싶었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는 목적을 제자들이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이 무엇인 것 같나요? 목사님이 두 개의 보기를 드릴테니 맞춰보세요.

1) 예수님은 1등이 되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

2) 예수님은 꼴찌가 되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정답은? 2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죠.

 

자 부모님 여러분.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자녀의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뒤쳐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servant가 되는 것이라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 큰 사람(Mega)이 되고자 하는 자는 헬퍼(diaconos)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 1(protos)이 되고 싶으면 종(dulos)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자녀가 헬퍼가 되고, 또한 그들이 servant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돕기만 하는 사람이 되면 좋으시겠습니까? “네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뭔가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가 꼬리보다 머리가 되는 게 좋아 보이니까요.

 

3.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의미가 없는 일을 하는 것 만큼 사람을 힘 빠지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힘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삽을 주면서 웅덩이를 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웅덩이를 2 피트까지 팠더니 다시 그 웅덩이를 메꾸라 한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기운 빠지겠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왜 이런 생각이 듭니까? 웅덩이를 팠다 메우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여러분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1등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얻었어요. 그런데 인생의 의미를 못 찾는다면 그것만큼 불쌍한 삶이 있을까요? 꼴찌를 하더라도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것만큼 값진 인생도 없을 거예요. 꼴찌하라는 말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때 의미를 느끼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하는 일들에는 기쁨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만족과 보람을 찾기는 힘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연결될 때 인생의 의미를 찾게 만들어져 있어요. 하나님은 관계적인 분이시기 때문이죠. 큰 사람이 되려면 헬퍼가 되고, 1등이 되고 싶으면 종이 되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뜻이죠.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다른 친구가 넘어졌다고 합시다. 진짜 일등인 친구는 결승선에 맨 먼저 통과한 사람이 아닙니다.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주고 그 친구와 같이 꼴찌로 들어온 친구입니다. 공감하고 함께 아파해주는 친구가 가장 큰 친구인 겁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도와주는 인생이 의미있는 인생이고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걸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4.

옛날에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호랑애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어요. 이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애벌레는 문득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랑애벌레는 먹고 자라는 것만 하기에 인생이 너무나 따분했어요. 그래서 나무 밑을 내려 왔죠. 그리고 애벌레는 이상한 기둥을 하나 발견했답니다. 그 기둥은 꿈뜰거리고 있었어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애벌레들로 만들어진 애벌레 더미였고 애벌레 기둥이었어요. 그 기둥의 애벌레들마다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어요. 하지만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어요. 애벌레는 저 위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애벌레들이 모두 다 올라가기 때문에 따라서 올라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다른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죠. 밟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밟혀서 떨어지느냐 였어요. 애벌레들은 친구가 아니라 서로가 위협이자 장애물일 뿐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라는 책의 내용이예요. 이 애벌레는 기둥의 꼭대기에 올라갔을까요 못 올라갔을까요? 맞아요 결국에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그런데 그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꼭대기에서 호랑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아.”

조용해 이 바보야. 다른 애들이 듣겠어. 우리는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하는 곳에 있단말이야. 여기가 바로 거기야.”
저기 좀 봐 저기에도 기둥이 또 있어. 사방이 온통 기둥이야.”

호랑애벌레는 화가 났어요. ‘그동안 고생해서 올라온 기둥이 수 많은 기둥 중에 하나라니…’ 호랑애벌레는 탑이 되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갔지만 결국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던 거예요.

호랑애벌레는 어떻게 됐을까요? 호랑애벌레는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준 노랑애벌레가 나비로 변한 모습을 발견하고 기둥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죠. 결국 노랑나비의 도움으로 호랑애벌레는 번대기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리고 나비가 되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책에서 노랑 애벌레와 번데기에 들어가는 늙은 애벌레가 대화를 나누는데, 거기서 나비가 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어요.

나비는 미래의 애벌레 니 모습이란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지. 나비는 꽃에서 꿀만 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준단다. 나비가 없으면 꽃들도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지게 돼!!” 나비는 꽃들에게 희망을 날라다주는 존재였던 겁니다.

 

5.

다른 이들을 섬기고 다른 이들의 종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높은 곳에 있으면 솔직히 좋은 것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 하며 비교하는 경향이 있죠. 다른 사람과 똑같아 지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나도 안 하면 자꾸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하죠. 다른 사람보다 좋은 물건을 쇼핑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구요.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못 가진 것을 내가 갖고 있으면 내가 더 특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인생은 정말 어리석은 인생이랍니다. 비교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을 사세요. 다른 사람이 좀 앞서가더라도 그냥 보내주세요. 사람들마다 다 인생의 속도가 다른 거예요. 책을 좋아하게 태어난 친구가 있고, 책은 싫지만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게 태어난 친구도 있어요. 사람들은 다 다르기 때문에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인생의 참 의미와 행복은 다른 이들과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손잡을 때 얻게 되죠. 우리의 도움을 받은 이들의 웃음을 보며 우리는 큰 보람을 얻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답니다.

 

호랑애벌레는 나비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죠. 애벌레는 번데기로 들어가 죽어야만 새롭게 태어남을 알았어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결코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목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죠. 비교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고 꼴찌가 되어도 행복한 법을 알게 된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꼴찌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행복해 하셨어요. 왜냐면 이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참 자유를 얻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하는 삶을 살라고 부탁하신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꽃이 될 수 있어요.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러주고 손 잡아줄 때 그 사람은 꽃이 된답니다. 여러분은 그 꽃들의 삶에 의미를 실어 날라주는 나비로 부름 받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앞서 가려고만 하죠. 우리가 애벌레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비처럼 그들의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준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26-28)."

 

Scripture: Matthews 20:20-28

Sermon title: <Hope for the flowers>

translated by Min-Jun Hur

Do you have a goal in life? Let me ask our children here. Do you have goals in life? What kind of person do you want to be? Let’s make it simple. All of you are studying so hard. Why are you studying? Why do you read books? Many people study to get into a good university. So why do we have to go to a good university? Do you need to go to a good college to get a good job? So what's the point of having a good job? People say when you have a good job, you are more likely to make a lot of money. So what's the point of making a lot of money? To buy whatever I want?

You may say, “I want to ride a nice car. When I have a lot of money, I can buy a nice house and anything I want.” So, can you say that your goal in life is to be number one and to make millions of dollars? Of course, many good things will happen to you if you study well and be number one.

Most of all, your parents will be proud of you. Once I was walking around with a Stanford University hoodie that my friend gifted me. Someone came up to me and said, “Your parents must be proud of you.”

Now let me ask our parents here. Do you have goals for your children? Who do you want your kids to be? Many parents wish similar things for their children. “I want my child to be at the top. We want our children to grow up and become influential in the world.” We want our children to influence others by achieving high social status and accumulating wealth.

Adults in the crowd, have you found a meaning and purpose in life? Surviving the competition to reach a higher position may not be that meaningful, but we certainly do not want to lose the competition either.

Zebedee's wife had two sons, James and John. She wanted her sons to become great men and hold the highest positions. But her sons didn't go to a good college. Instead, they were fishermen at the Sea of Galilee. When she heard that Jesus was going into Jerusalem after three years of ministry in Galilee, she thought that finally Jesus was going to become a king. She became very excited and decided to go to Jesus and ask, “When you become the king, could you let James and John have the next two highest positions?” This was an outright foul. The other ten disciples got furious. They started to swear and fight with each other.

Jesus intervenes here and decides to tell his disciples something important, since the disciples did not seem to understand the purpose of Jesus’ going to Jerusalem. What do you think is His purpose in entering Jerusalem? I will give you two choices.
1) To be number one and to sit in the highest place.
2) To be the last out of all people and become a servant of others.

Choice number 2 is the correct answer. This was also the purpose and meaning of Jesus' entire life. This was why Jesus came to this earth.

I will ask the parents here. If the purpose of your child's life is to fall behind others and become a servant to others, how would you feel? Jesus says, “Whoever wants to be a great man (Mega) among you must be a helper (diaconos). If anyone wants to be number one (protos) among you, he must be a servant (dulos).” Will you feel great if your children become helpers and servants of others? Deep down we might feel like it is our loss. Still we prefer our children be the head rather than the tail.

We humans get our energy from finding a meaning. Nothing makes people more depressed than doing meaningless work. Let’s say someone gives you a shovel and tells you to dig a puddle. How would you feel if that same person tells you to fill the puddle up again after you dig about two feet? Are you going to lose your temper? You might be disheartened, since digging and filling it again do not seem to make any sense!

Let’s say you study really hard and go to a good college and get a good job. But if you do not find the purpose of your life, wouldn’t that be a miserable life? In contrast, if you realize the meaning of life, your life will be more valuable than anyone’s. 

So, when do we find purpose in our lives? We are made to find this when we help and serve others. When we do things for ourselves, there may be joy, but it is difficult to feel fulfilled and satisfied. Man is a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Since God is relational, we are created to find the meaning of life when we connect with other people. 

To our youngest crowd, your moms went through tough times when giving birth to you. They went through even tougher times when they were raising you. Although you didn’t follow the directions, your moms were happy raising you. They felt rewarded and found their lives’ meanings as they helped and served you. The same goes for your lives. When we help and serve others, we find our purpose in life. 

Let me tell you a story.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tiger caterpillar who was eating the leaves and living happily. One day, the caterpillar thought, “maybe life is not all about eating and growing.” Life was too boring. So he went down under the tree. And he found a strange column. It was wriggling. Looking closely, he saw that the column was a pile of caterpillars and everyone was trying to climb to the top. But the top was obscured by clouds. He did not see anything up there, but since all the other caterpillars were climbing it, he decided to climb it also. But that was not as easy as he thought. He had to step on other caterpillars to climb. It is either he steps on others or he would be stepped on. The caterpillars were not friends. They were just threats and obstacles to each other. 

This story is from the book called "Hope for the flowers." Do you think this tiger caterpillar climbed up to the top? Yes, he finally made it. But what was at the top? There was nothing. At the top, the caterpillar heard the other caterpillars talking.
“There is nothing here.”
“Quiet, you idiot. The other kids will listen. We're where they want to be. We are here.”
“Look over there, there’s another pillar over there. There are pillars all over the place.”
Listening to this, the tiger caterpillar got upset. He got ahead of others, but in the end, he didn't find any meaning. However, he found that his friend, the yellow caterpillar, who cared for and loved him, transformed into a butterfly. He decided to go down the pole. Eventually, with the help of the yellow butterfly, he became a cocoon. And as a butterfly, he discovered the meaning of life. 

This is how the yellow caterpillar described what becoming a butterfly is.
“Butterflies fly with their beautiful wings, connecting the earth and the sky. Butterflies drink the nectar from flowers and carry seeds of love from flower to flower. Without butterflies, the flowers will soon disappear from this world!” Butterflies were the ones that brought hope to the flowers.

We realize our meaning of life when we serve others. The word “servant” may make some people uncomfortable. When you're ahead of others, honestly, there seem to be a lot of good things that come with that status. We tend to compare ourselves to others and feel like we are falling behind if we do not do the things others do. At the same time, we want to be different from others in some ways. We want to have something better or go to a better university. We want to look more special by having what other people do not have. 

However, comparing our lives to others’ is foolish. Don't compare, live your life. If someone else is a little ahead of you, just let it go. Everyone's pace of life is different. There is someone who loves books, and there is someone who hates books but is born to love sports. There is no need to compare because everyone is different.

The true meaning and happiness of life cannot be obtained by comparing ourselves with others. Rather, we get this when we connect with and hold hands with others. Seeing the laughter of those who have been helped by us makes us feel truly rewarded.

As the tiger caterpillar was reborn as a butterfly, he realized the meaning of his life anew.
He had to go into a pupa and die, in order to be reborn. We also need to believe in Jesus Christ and die with Jesus. Otherwise, we can never be born again into a new person. If we do not die with Jesus and do not live with Jesus, we will lead our lives in the same way as the rest of the world does. When we are born again as children of God, we will gain different perspectives. We will be able to live freely without comparing ourselves to others. We will also learn how to be happy even at the bottom. While carrying the cross, Jesus was happy since he knew many people would find true freedom through the cross. He asks us to live a life that sets others free.

Everyone in the world can be a flower. When we approach someone, call his name and hold his hand, he becomes a flower. All of us are called to be butterflies. We are called to bring meanings to the lives of the flowers. Those who do not know Jesus yet do not know where they are going, and they only try to get ahead and trample other people. If we as butterflies connect their lives with God, they will be able to find purpose and meaning in their lives just like we do. We will close with verses Matthews 20:26-28.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Posted by speramus

나는 2015년부터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중국, 미국 서부, 이제는 미국 중부에 거주하며 고향을 떠난 이민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경계선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중심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경계선에 서 있고 marginalized된 이들의 고충을 절대 모른다.나는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으로서 작가였던 서경식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글에는 경계선에 선 자로서 갖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있었고  우울하지만 애수에 찬 삶을 향한 동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마지널라이즈드 되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예술을 해석했고 작품들을 해석했다. 그의 글을 통해 나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갖게 되었고 경계선에 선 자로서의 시선을 장착할 수 있었다. 

이민진의  파친코는 이민자, 나그네, 순례자, 디아스포라와 같은 비슷한 단어들에 많은 노출을 한 내 삶을 끌어 당기기에 매력있는 소설이 분명했다. 왜냐면 일본 사회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한국 사회에서 조차 일본인으로 취급되는 자이니치 조센진들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경계선에 선 자들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 내고 독자들에게 전달해내는 지 그 방법과 분위기가 사뭇 궁금했다. 

소설을 읽기 전, 애플티비를 통해 드라마 "파친코"를 본 것은 실수였다. 소설부터 보았어야 했다. 왜냐면 드라마는 이민진 작가의 의도를 많이 왜곡했고 많은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지 않고 소설만 읽었어도 좋았을 뻔 했다. 드라마에는 없고 소설에는 있는 이야기 중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노아"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드라마에는 노아의 어린 시절이 나온 후 그의 삶이 통째로 삭제 되었다. 파친코 소설에 있어서 노아의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존재감이 없는 드라마는 주제면에서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작가는 노아를 통해 자이니치 조센진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을 건드리고 싶었다. 노아는 선자가 한수의 씨를 받아 생긴 아들이지만, 30년 넘게 자신의 아버지가 이삭으로 알고 자라온 인텔리 청년이다. 인텔리면 뭐하나? 그는 자신의 신분적인 배경 때문에 일본 사회의 주류에 낄 수 없는 한계를 어린 시절부터 직시한다. 그의 그러한 민족적인 정체성을 심화시키고 갈등을 증폭시킨 것은 그의 삶에 조용히 드리운 한수의 그림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마저 부정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나가노라는 제 3의 장소를 찾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로부터 뽑혀 살 수 없는 식물과도 같았다. 16년을 숨어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 선자가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신의 생을 통째로 도려 내버린다. 이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란 것, 인생의 으미라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결국 정체성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선자가 이삭의 묘지에 갔을 때 묘지 관리인으로부터 노아가 나가노에 있을 당시에도 이삭의 묘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결국 노아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본을 향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연약한 존재였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결국 정체성, 뿌리, 근본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에 이 정체성이란 것은 호흡과도 같은 소중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60-80년대에 이민와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주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만 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것은 너무나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자녀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켜 본 이들은 이 고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갔을 때 미국 주류 사회는 아무리 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도 그들을 끼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인과 미국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나그네들에게 정체성이란 호흡과 같다는 것을 새삼스레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이민자들의 삶의 현실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친코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업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야쿠자이거나 야쿠자와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파친코였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그런 시선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이면 어떤가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왜냐면 일본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돈으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돈은 신적 유사성을 가진 물건이다. 돈이 있으면 신이 가지고 있는 전능성을 발휘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돈을 소유하고 거부가 된다면 그들은 그 사회 속으로 편입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민감한 사회였다. 백이삭 목사의 아들 모자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정직하게(?) 파친코 사업을 해가며 부를 축적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유일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자기와는 다른 고상한 직업을 갖고 일본의 상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아들 솔로몬도 결국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사회의 높은 벽을 통감한 것이다. 모자수가 그렇게 존경하고 따랐던 그의 형 노아도 와세다 대학까지 나온 수제였지만 그 또한  파친코 사업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자 했고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구원이 되어주었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조선인들이 꿈꿔 왔던 야망과 열망 그리고 욕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파친코를 통해 일본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의 한인 이세 삼세들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경험한다고 익히 들어왔다. 유색인종으로서 이 사회 상류까지 진출하는 데 느끼는 한계가 많이 있다고 들었다. 이민진 작가는 본인 스스로가 7살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와서 살아온 경계인으로서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는 파친코를 통해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을 조명했지만 그 깊은 동기에서는 미국내에서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빗대어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파친코를 단숨에 읽으며 가장  충격이 됐던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노아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그의 아버지 이삭의 묘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부분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 이민 이세 이민 삼세들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아들들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배타적인 일본사회 그리고 일본인들이 더 싫어지는 것은 나의 잘못만은 아니겠지? 일본사회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열린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나의 헛된 기대이자 바람일까? 소설 파친코는 경계선에 서 있는 순례자로서의 나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다.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