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옆교회에서 주일마다 모이는 중국인 교회 리더를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설날인데 중국교회는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 았습니다. 금요일에 모여서 꿔니엔(過年)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중국인들 은새해첫날보다그전날저녁에모여서한해를보내는데에더큰의미 를 두죠. 그래서 한 해를 보낸다는 표현으로 새해를 맞습니다. 우리는 새 해아침에서로문안하며한해를축복하는것이그들의문화와조금은다 르죠. 중국인들은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언어를 지키 기 위해 노력하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중국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민족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받아들였습 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딜 가든 회당을 결성하여 안식일마다 모이기를 힘 썼죠. 회당의 가장 큰 기능은 다름 아닌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역 만리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지만 회당에서 만 큼은 히브리말로 말씀을 듣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히브리말을 노출시켰습 니다.그렇게하지않으면그들의정체성은몇세대가지나면온데간데없 이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이국의 언어에 익숙하고 히브리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히브리어 교육을 고수한 것이죠. 안식일마다 히브리 성경을 들려주고 히브리식 교육을 시켰습니다.

저에게 가끔 이민 교회 교육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땅에서 이민자로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민족이라 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인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물론 영어가 편하고 영어가 모국어인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어는 정체성이자 정신을 담는 그릇임을 믿습니다. LA에 있을 때 많은 이민 23세의 Korean- American들을 만났었습니다. 그들의 세대에 부모님은 영어만 강요했고 한 국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중에 미국인들의 커뮤니 티에도 한인들의 커뮤니티에도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과 방황이 그들에게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인후예들에게서 한국어 를 거세해 버린 댓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반면에 뉴질랜드나 호주같은 이 민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교회가 한국어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좀 불편하더라도 한인교회 안에서는 한국어 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이민 생활이 훨씬 장구 하신분들앞에서모르는리일지모르나저는역사를겨봐야한다 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과 중국인들의 역사가 말해주는것은 언어와 정체 성은 우리 을 지하고 유지하게 해주는 핵심가치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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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되면 군대시절이 가끔 생각납니다.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하던 저는 영하 20도를 넘는 추위를 난생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추우면서도 고립된 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회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죠. 어떤 이들은 공중전화통을 붙들고 외로움을 달랬고 어떤 이는 지인들을 부대로 불러 외박, 면회 등의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죠. 시절 저는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를 쓰는 즐거움보다 편지를 받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던 같습니다. “김이병 편지왔다.” 고참이 건내주는 편지 통에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같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마음 써주고 있다는 것을 편지로나마 느끼고 싶었던 같습니다. 편지도 편지지만 소포보다 기쁨은 없었습니다. 종이 상자 가득 과자를 담아 보내 친구의 마음이 따뜻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열자 마자 고참들에게 뺏기고 내무반 전우들과 함께 순식간에 먹고 없어지지만 소포의 여운은 오래 갔었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소포를 통해 그렇게 연결되는 기쁨을 누렸던 같습니다. 번은 동아리 선배들과 친구들이 카세트 테이프에 노래도 녹음하고 시도 녹음하고 돌아가며 저에게 마디씩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녹음한 테이프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듣고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 군대 시절에 느꼈던 소포의 추억과 희열을 오랜만에 느껴보았습니다. 월요일에 갑자기 울타리 몰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저는 울타리몰에 가입한 적도 없고 물건을 시켜 적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실은 군대 시절에 함께 성가대 봉사를 하던 옆집 중대 아저씨가 LA 이민 20년이 넘어가는데,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저에게 전화를 것이었습니다. 지금 울타리몰 사장님이 옆에 계시는데 아는 사람 중에 울타리 먹거리를 주고 싶은 사람 있냐고 하시면서 당장 전화 걸어 주소를 물어 보라 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배송 선물꾸러미를 받아들고 항공 익일 배송의 속도에 대한 경탄과 함께 감동이밀려왔습니다. 이건 사회의 어떤 분과의 연결을 넘어 하늘 위에 계신 크신 어떤 분과 연결되는 그런 기쁨이었습니다. 당장 울타리몰 신사장님께 손편지를 보내 그분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군대시절 성가대의 인연이 울타리 몰까지 연결되는 플로우를 보며 인생의 신비와 해학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호의들이 다른 호의를 만들어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포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생깁니다.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상대의 존귀함을 꽃피워주고 깨닫게 하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작은 소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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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하는 구약 성경의 한 줄 요약은 출애굽에 실패한 이스라엘입 니다. 출애굽(Exodus)이란 애굽, 즉 이집트(Egypt)를 탈출한다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나가다는 뜻의 ‘ex’이라는 뜻의 ‘hodus’가 합쳐진 말입니다. 길이란 삶의 방식을 의미하죠. 출애굽의 2차적 인뜻,그러니까속뜻은기존의삶의방식에서벗어나새로운삶의방식으 로 들어가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파라오의 체제에서 순응하며 살던 방식 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결단이지요. 이 스라엘은 몸의 탈출과 함께 정신의 탈출을 이뤄내야 했는데 실패했습니 다. 몸의 탈출은 이집트를 벗어나는 것이었겠죠. 정신의 탈출은 파라오의 가치간과 세계관과 문화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인들 은 몸은 이집트를 나왔지만 정신과 가치관과 문화는 이집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출애굽을 살아가는 것이라 이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출애굽적인 삶은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 그 리고 문화를 장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세계관과 가치를 과 감히 버리고 대안(代案)적이고 대항(對抗)적인 성경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 야말로진정한출애굽이라할수있습니다.기독교인들은어느시대나그 시대의 주류 문화와 지배세력들에 대항하는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왔습 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가나안의 문화, 그 후손들 세대에는 이집트, 앗시 리아, 바빌론, 헬라, 로마라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날의 주류 문화는 무엇일까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자본주의 (capitalism)라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고 다른 말로 이윤의 창출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를 위해 효율성이라는 중요 한 가치 판단을 기준으로 활용합니다. 나아가 효율성을 표현하기 위해 숫 자, 다른 말로 샘을 사용합니다.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 사회에서 디지털사회의 탈역사성과 탈서사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디지털 은 숫자를 새기 위한 손가락이란 뜻의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합니다. 우정, 사랑, 관계와 같은 가치들은 원래 이야기이며 서사적(narrative)인데 디지털 사회는 이런 가치들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페이스북 이나 인스타 같은 곳에서 친구도 애정도 호감도 모두 숫자로 표현됩니다. 모든것이셀수있게가공되어버리죠.디지털사회에서서사적인것은급 격히 의미를 상실해 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야기입니다. 출애굽도 이 야기이죠. 교회의 건강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이야기 여야 합니다. 진리를 숫자에 가둘 수는 없습니까? 교회는 지진리를 라가기 위해 이 숫자와 우고 있는지도 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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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나교회주보(12:25)

지난주설교를통해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라는 말씀을 나눴었죠.설교를한지딱닷새가지나고교회카톡방은모형제님가족과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에 뜨겁게 달궈졌습니다. 하필 한국 방문 기간에 형제 님의난방시스템에문제가생기면서그댁의동파를막기위해다들발벗 고 나서준 아름다운 일이 벌어졌죠. 화씨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추운 날씨 에벌어진참으로가슴따뜻한일이아닐수없었습니다.제개인적으로도 날씨가 추워진다고 침구나 전기 기구들을 나눠주시고 그 외에도 여러 모 로 많은 분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해 받은 한 주였습니다. 로체스터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고 실제로 혹독한 추위이지만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따뜻함이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과 만나고 싶 다.”는예전커피광고카피처럼실제로가슴이따뜻한이들과함께하는 것이 눈물 겹게 감사로 다가온 한 주였습니다.

종소리는 귓가에 들리기 전까지 종소리가 아니고, 사랑은 느껴지지 전까 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말만 하시지 않고직접그의아들을이땅에보내셨습니다.그리고그아들이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지켜보셔야 했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만져지는 (tangible)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은 것만큼 확실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성탄은몸을입고이땅에오신하나님의사랑을기념하는날입니다.그러 기에성탄만큼세상에사랑이가득한날도없죠.세계대전이벌어질때도 성탄절만큼은휴전을하며적과함께성탄캐롤을부르며이날을기념했 다고 합니다. 성탄을 통해 우리는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만져지는 사랑말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머리 좋은 것 이마음좋은것만못하고,마음좋은것이손좋은것만못하고,손좋은것 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발로 행하는 사랑을 피력하셨습니다. 그는 이 뜻을 풀이하며 관찰보다 애정이, 애정보다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 태입니다.”라고 말씀하셨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함께 서보는 것이 입장(立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사랑이 바로 입장의 동일함에서 발로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입 장에서다가오는사람들을통해참사랑을느끼게됩니다.함께한다는것 은다름아닌입장의동일함입니다.아기예수를생각하며한없이낮아지 신그분의크신사랑을느니다.우리도아기예수처럼다이들과함께 하기 위해 발 좋은 성탄을 보내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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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상선약수-上善若水). 첫째, 만물을 이롭 게 하기 때문입니다(선리만물-善利萬物). 둘째,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 에 자신을 두기 때문입니다(처중인지소학-處衆人之所惡). 셋째, 다투지 않 기 때문입니다(부유부쟁-夫唯不爭).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분지를 만 나면 그 빈곳을 가득 채우고 돌아갑니다. 마음을 비우고(심선연-心善淵) 때가 무르익어야 움직입니다(동선시-動善時). 결코 무리하는 법이 없기 때 문에 허물이 없습니다(고무우-故無尤). 그렇기 때문에 물은 도(-진리)에 가깝습니다(고기어도-故幾於道).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8장 중에서 (신영복, 처음처럼, 28) -

물은진리가갖고있는특징을많이갖고있습니다.자연안에서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노자(老子)는 그래서 물은 최고의 선을 닮았다, 즉 진리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물은 진리이신 주님을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만물을 이롭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이 세상 속으로 친히 내려오셨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시고 만인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그의 자리를 두셨습니다. 사랑이신 그분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주님께서는 물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죠.

새해가밝았습니다.올 한 해 우리의 삶이 물과 같은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상처 받고 깨진 마음 을가진사람들을감싸안으며머물러주는물과같은여유가우리에게있 으면좋겠습니다.빈곳을가득매우며공허하고허탈해하는이들의마음 을 부요하게 해주는 그런 한 해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때를 분별하고 움직일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우 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모두의 삶이 물댄 동산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너를늘인도하시고,메마른곳에서도너 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물 댄 동산처럼 , 물이 어지지 않는 처럼 것이다(이사야 5811 ).” 같은 나그을 사는 우리지만 물이 어지지 않는 삶이 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겸손하게 기도해 니다. 주님 물과 같은 삶 을게하소서.새해에는주님을닮게하소서.신의성에참여하는 삶이게하소서.더겸손하게하시고낮아많은이들의 삶을 어주고 감싸안아 주는 바다같이 은 인생 되게 하소서.바다가 백개의 내()를 받아들여 것은,세상에 가장 낮은 곳에 있기때문 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더 겸손한 한 해의 삶이 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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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께서 저희가 파송찬양으로 부르는 <우리는 움직이는 교회>의 후 렴부분에 나오는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이 무슨 뜻인지여쭤 보셨습니다.그분의 용기에 감사를 드리고 혹시 궁금하신 분이 더 계실 것 같아 이 자리를 빌어 그룹 날개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룹(Kerub)은 천상의 존재(celestial being)로 알려져 왔습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이 되어졌죠.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천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세기 324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신 후 그룹들을 세우시고 동산을지키게하셨죠. 그룹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출애굽기 37장의 성전을 만드는 이야기에서 입니다.  출애굽기 37장에는 성전의 갖가지 성구들에 대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이동식 성전인 성막(Holy Tent)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눠져 있습니다. 성전 뜰, 성소, 지성소가 그것입니다. 각각의 장소가 거룩한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을 했죠. 성전 뜰, 성소, 지성소 순으로 거룩함이 더해 진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제사의 절정은 바로 지성소 가운데서 이뤄졌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져 있는데 언약궤의 덮개를 일컬어 시은좌(은혜가 내려지는 곳)’ 또는 속죄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Yom Kipur)에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판에 제물의 피를 뿌립니다.이 속죄예식은 너무나 거룩한 예식이었기에 뭔가 흠이 있는 제사를 드릴 경우 대제사장이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Holy of Holies)의 중심에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덮개에 이 그룹 형상이 만들어져있습니다. 두 그룹이 양쪽편에서 날개로 덮개를 덮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룹이 둘이어서 복수 형태인 케루빔 '(Kerubi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제사 가운데 이 그룹 날개 위에 임하셨는데 이 때 임하는 영광을 쉐키나라고 불렀습니다. 성막 안에 케룹(복수-케루빔)들이 놓여진 것은 에덴동산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하는 신학과 연결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의 성전이 땅과 연결되는 지점이 에덴 동산이었고, 그것이 발전되어 땅의 성막의 가장 깊은 곳 안에 놓여 있는 언약궤와 그 언약궤를 덮고 있는 그룹들은 에덴 동산을 지키고 있던 그룹들에서 고안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덴이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성막 또한 하나님의 우주와 우리가 연결되는 곳이라는 개념을 이 그룹의 형상이 상징하며 에덴과 성막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죠. 마이클 하이저라는 구약 교수님은 그의 책 "보이지 않는 세계- 좋은 씨앗"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성소 내부의 그룹 역시 에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언약궤 덮개 위에 그룹이 위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막의 가장 내밀한 지성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장소였다. 그룹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보좌를 형성한다. 훗날 지성소 장막이 성전 내부로 옮겨졌을 때 두개의 거대한 그룹이 여호와의 보좌로 장막 안에 설치되었고, 이로써 언약궤가 여호와의 발등상이 되었다(위의 책 308-09쪽)."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한층 더 나아가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곳으로 그룹날개가 있는 지성소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이란 가사는 지성소 가운데 가장 거룩한 시은좌또는 속죄판을 덮고 있는 천사 모양의 그룹들 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임하였던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지상의 세계를 다스리는 천상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그룹 날개 위에 임하신 것처럼" 이란 가사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임 하소서라는 가사를 부를 때 하나님의 영광이 더 강력하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다하나 교회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대제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공동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바라니다.

 

언약궤의 덮개에 형상화 되어 있는 천사적인 존재인 케루빔, 그룹은 그의 날개로 언약궤를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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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대림절기간에눈을보게됩니다.눈쌓인사무실밖풍경을보 고있노라니어릴적이맘때느껴졌던그설렘이되살아납니다.어린시절 대림절이 설렜던 가장 큰 이유는 성탄과 함께 기나긴 겨울방학이 시작되 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2월이 시작되면 매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예배당의 난로에 불을 지펴 열기를 한껏 끌어올린후주일학교선생님의인도에따라성탄절연습을시작했죠.성 탄캐롤 합창, 연주, 성극, 시낭송, 율동 등등 우리가 연습할 목록들은 참으 로다채로웠습니다.해가뉘엇뉘엇지기시작하면그때아이들은각자집 으로 흩어졌죠. 드디어 성탄절 이브날이 되면 아이들은 선물 구입과 포장 에분주해집니다.성탄이브에온교우가함께하는성탄발표행사가끝나 고,교육관에서따로있게될우리들만의선물교환잔치와2부순서를위 한준비때문이었죠.어떤아이들은선물살돈이없어서달력뒷면의하 얀종이를포장지삼아다이알비누를포장해오기도했습니다.그런아이 들이 선물교환에서 큰 앨범이라도 뽑게 되면 정말 횡재하는 것이었습니 다. 성탄 발표가 끝나고 선물교환까지 끝나면 본격적으로 성탄 2(eve 인 지2부인지구분이잘안가네요지금도)행사가시작됩니다.이때별의별 게임과 놀이들이 시연됩니다.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불을 덮고 온갖 게임 들을 즐기며 날 새는지도 모르고 놀았죠.

그러다 새벽 330분이 되면 어른들이 교회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십 니다.닭고기로끌인맛난떡국이한상차려지면아이들은게걸스레떡국 을 들여 삼키기 시작합니다. 이 떡국은 다름아닌 새벽송을 위한 참이었습 니다.어떤해에는떡국대신돼지고기와두부가풍성하게들어있는찌개가나오기도했죠.배부르게참을고나면대여섯개으로나눠 져 새벽송을 돌 조가 정해집니다. 어떤 들은 10게 걸어 새벽송 을 기도 했습니다. 교우들의 집 에 도한 새벽송 대들은 캐롤이나 성탄송을한껏아름게부니다.집안에신교우께서는노가다 끝나기다리다가 문을 여시고 나와 간식 꺼리들을 대들에게 건냅니 다.쵸코파이도있고눈도있고따밀병도있고새벽송대 들의 점점 거워지기만 합니다. 새벽송이 다 끝나면 다시 교회로 모여 이라도 나누이 새벽송에서 어 온 간식꺼리들을 분배하기 시작하죠. 이렇게 겨웠던 성탄 이브는 마무리되고 아이들은 교육관에 서졸음이겨어집니다.성탄아이되어예배가있다는종리를 고서야 깨어나 성탄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즐웠던 성탄절은 그 렇게 마무리되었죠. 산골 소년 소녀들에게는 없는 즐움을 선사했던 성탄절, 그 시절이 무나 그습니다. 인적인 성탄 회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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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림절(Advent)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절기를 지키며 기 념하는 것은 시간의 분절화(分節化)를 통해 시간에 중력(gravity)을 부여하 기위함입니다.시간의단락을짓고멈춰선다는것은중요한것에대한의 미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분절화는 시간의 가속화를 막 아줍니다. 멈춤과 단락을 나누고 기념하는 행위들을 통해 시간의 무의미 하게 가속화되는 것을 막고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작업을 하는 것입 니다.목적없이가속화되는시간속에서목적과의미의무게를부여해줌 으로 시간이 중력을 갖게 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절기를 기념하는 중요한 목적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분절과 멈춤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것을구별해주기때문에사소하고하찮은사건에오래머물지않게 해주고 우리를 분주하게 만드는 시간의 가속화를 막아줍니다. 질서 없이 산만해진 시간에 질서를 부여해주고 목적을 부여해주는 것이기에 절기를 지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대림절의 메인 테마(main theme)기다림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 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시겠다 약속하신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리움이나 간절함은 우리로 기다림 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대림절은 이 그리움과 간절함이 불러일으키는 기 다림을 만끽하는 시즌입니다. 그리움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것이 고,간절함은미래를향한갈망으로부터오는것인듯합니다.이미오신 예수를 향한 그리움과 장차 오실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대림(待臨)의 기 조(基調)인 것이죠. 예수님이 만드신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만들어 가 실 이야기를 동시에 상상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절이야 말로 하나 님께서 만들어 오신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 지를 향한 상상력을 키워가야 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망가 졌고, 망가진 우리의 이야기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해 오셨고, 앞으로 어 떻게 회복해 가실지에 대한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기념하는 대림절의 시간에 중력이 생기고 우리의 시간은 원자화 되지않고가속화되지않고하나님이만들어오신이야기속으로수렴되 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소풍 전날에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습니다. 소풍에만 있는 재 밌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소풍이 만들어 온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 며그날을향한갈망이잠못이룰설렘을만들어낸것이겠죠.우리는하 나님이 만들어 오신 이야기와 만들어 가실 이야기를 상상하며 이 대림절 을 설렘으로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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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 홍순관 “쌀 한 톨의 무게”의 노랫말-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기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 감격하는 사람들은 쌀 한 톨을 보면서도 감격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주변의 자연과 주변 환경이 감사로 다가옵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며 들꽃 한 송이에서도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센스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의 길은 조금 더 수월하게 열립니다. 나의 주변의 이웃들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놀라운 걸작품이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 일하신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체스터라는 도시에 머물며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나를 통해 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히브리 말로 창조하다는 말 ‘바라’와 축복하다는 말 ‘바라크’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내 주변의 이웃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 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쌀 한 톨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들꽃 한 송이에서 창조주를 봅니다. 우리에게 이런 감각이 있어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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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8-19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배고픔과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픔의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아도 될 정도로 배고픔은 인간들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 첫 시험이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진로 문제, 이직 문제, 질병의 문제 등 우리 삶에 경험하는 많은 시험들이 결국에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이 되어 우리를 염려 가운데로 인도하곤 합니다. 어릴 적 배고픔이나 결핍의 경험들은 우리의 염려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하죠. 저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와 하나님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결국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비우는 데 있습니다. 나의 욕망을 하나님의 욕망으로 바꾸는 여정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나를 비우는 삶은 영적으로 허기지게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I am who I am) 자라고 자기를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궁극자이이시며 궁극적인 존재(Being)이십니다. 신앙은 궁극적인 존재자이시고 ‘the Being’이신 하나님을 찾는 여정이지요. 그런데 육신의 허기와 배고픔은 우리들로 Being 이 아니라 ‘beings'를 찾게 만듭니다. 피조된 존재인 beings들이 Being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대표적인 수단인 돈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돈은 우리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하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에 들린 봉지만 바라보고 아빠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듯, 우리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대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목적과 수단이 바뀌면 안된다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경고하셨죠. 수단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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