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과 주일 우리는 사경회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뉴저지에서 오신 허봉기 목사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 토요일 저녁에 우리는 교회됨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을 통해 1세기 예루살렘에 형성된 ‘다른 세상’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점에서 세상과 달랐고 어떻게 세상에 충격을 주었는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던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달랐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다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을 통해 제자도의 핵심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죠.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무척이나 추상적인 개념이죠. 목사님께서 “사랑하지 않고도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엄청 사랑하는데 건너가는 것이 없다면 사랑하는 것이 맞을까 질문하시기도 하셨죠. 1세기 예루살렘 교회는 식민지 상황에서 주인과 노예가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었고, 지갑을 열고 재산을 팔아 필요한 자들에게 나눠줌으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행4:33-35).”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표지로서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말씀이고, 그 사랑의 실천으로 가난한 자가 없어졌는데 그것이 세상과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특징이었다는 요지의 말씀입니다. 말그대로 교회는 신천지(新天地)였습니다. 

  다하나 교회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예수그리스도를 피와 살을 나누는 형제 자매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나요? “당신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는 믿지 않겠소” 냉소하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나도 당신들의 무리에 끼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다하나교회 성도들 처럼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라는 말을 교회밖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상과 다른 대안적이고 대조적이며 대항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른 세상’을 경험하면 좋을텐데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이만 저만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을 이뤄갈 꿈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함께 만들어가 보실래요? 다른 세상!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