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46

제목: 예수 따름의 삶

 

1.

교회 옆의 큰 밭에 드디어 싹들이 움트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씨앗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사이 농부는 벌써 이 밭에 씨앗을 뿌려 놓았더군요. 그리고 삼 센치 정도 씨앗이 자랐는데 제가 판단하기로는 싹을 틔운 씨앗의 정체는 콩인 것 같아요. 작년에는 분명히 옥수수 밭이었는데 올해는 콩밭이 되려나 봅니다. 교회 길 건너 밭에도 싹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요 거기에는 아마도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류의 씨앗을 뿌려 놓은 것 같아요. 제 말이 맞는지 틀린 지 가을에 한 번 지켜 보기로 하시지요. 어린 시절 이맘 때 초여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밭에서 깨를 심었던 것 같아요. 세 손가락으로 깨를 대여섯 알 정도 집어 들고 땅속에 손가락을 푹 집어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며칠이 안되어 깨의 싹이 돋아 납니다.

 

농부들은 씨앗을 뿌리는 시기에 매우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제때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절대 가을에 추수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하시기도 했죠. 여러분의 삶에 어떤 씨앗을 준비하셨고 어떤 씨앗을 심으시렵니까? 이왕이면 절망의 씨앗보다 소망의 씨앗을 심는 것이 좋고, 미움의 씨앗보다 사랑의 씨를 심는 것이 좋겠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준비해야 하고 파종해야 할 씨앗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으실 수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이런 말이 나오죠.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할 때 비기독교인들에게 들이미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란 어떤 변수에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들이밀면 그 사람들이 오호 정말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군요. 이 예수를 내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던가요? 십중팔구는 그래서 뭐?”라는 반응을 보일 겁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 소위 말하는 복음전도라는 것을 캠퍼스에서 많이 해 봤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비그리스도인들의 저런 반응을 수 없이 많이 접했습니다. 그때는 저런 반응을 상대방에게 들으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것이 맞고,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맞는데 왜 인정을 않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여러분 왜 비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거나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고,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운 좋게도 예수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 가운데 자라오셨든지, 아니면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어떤 사람이나 그룹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믿으라는 분위기에서 일단 믿고 시작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믿는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경험되어져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인정합니다. “저분이 너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야. 너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어.”라고 어떤 사람이 말해 주어서 여러분을 부모로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무조건적인 여러분의 사랑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엄마 아빠로 인정합니다. 꾸준하게 엄마 아빠의 변함 없는 사랑을 경험한 아이라면 의심하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곳에서 부모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참여함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는 그 사람이 부모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적이고 참여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죠. 예수가 어떤 분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경험해보고 참여해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3.

로마서 1013-15절 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경험하게 해주고 예수의 은혜 안에 참여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오해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이고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런 성경구절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읽어주기만 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거라구요. 물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진리가 진짜 진리로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 주장은 지극히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배타적이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딱 한가지 찬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배타적인 주장으로 만민이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인 주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통해 만민이 혜택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예수님의 이 배타적인 주장이 용납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만민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시지도 않으면서 이런 주장을 말로만 했다면 이 주장은 하나도 설득력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요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앗시리아의 수도로 선교를 보냅니다. 니느웨의 악이 넘쳐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야만 하는데 요나 니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 회개 좀 시키라고 하신 거죠.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니느웨의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 탑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을 보내십니다. 그때 요나는 배의 맨 아랫 칸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풍랑에 다 죽게 생겼기 때문이었죠. 배의 짐을 던지고 자신의 신들께 기도를 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잠자던 요나를 발견했죠. 이 때 요나는 그들에게 배타적인 주장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신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이 재난은 그런 거짓 신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재난은 나를 부르신 이스라엘의 신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배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거 맞죠? 그런데 그 주장이 용납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요나의 배타적인 주장이 기분 나쁠 지 모르지만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에 던져야만 이 재난이 그칠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긴가 민가 하는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집어 던지자 곧 바로 풍랑은 잔잔해 졌죠. 요나가 던져짐을 통해 선원들이 그의 배타적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언제 배타적 주장을 해야 하는지 요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기독교가 배타적 주장을 해서 세상의 광풍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주장이 용납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는 주장이 용납되려면 그 주장을 통해 세상의 광풍이 잠잠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배타적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배타적 주장 뒤에 이타적인 행동과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없이 그 진리는 결코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이타적인 삶을 먼저 보여주셨죠. 예수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그런 주장이 있기 전에 지극히 이타적인 삶을 만민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 핵심적이고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죠. 십자가는 죄인 중에도 가장 중범죄자들에게 내려진 로마의 사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거룩하고 순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왜 지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죄와 어둠의 권세를 이길 길은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는 이가 다른 이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의 이타적인 삶의 결정체였던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 지는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 볼래?”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부를 때 항상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같은 삶에 너를 초대한다는 것이죠. 내가 가는 길로 너를 초대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 진리가 됨을 직접 보여주셨죠. 그리고 그 사랑이 씨앗이 되어 생명을 자라게 함을 부활을 통해 증명해 주신 것이구요. 그래서 예수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자신있게 말씀 하신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

 

왜 예배당의 중심에 항상 십자가가 위치해 있습니까? 십자가는 멋스런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 따름의 삶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이도 예수 앞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예수의 사람으로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고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겸손하게 해야 하고, 절대적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5.

저는 가끔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열매의 씨앗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곤 하였습니다. 여기 복숭아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색깔입니까? 피치색입니다. 복숭아를 먹을 때 우리는 맛있는 과육만 먹고 씨앗은 내다버립니다. 씨앗은 맛도 없고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씨앗 안에 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방법으로, 생명을 씨앗이라는 참으로 볼품 없고 부담스러운 것에 담습니다. 복숭아씨는 쭈글쭈글 주름살 투성이입니다. 망고씨는 오징어 뼈다귀 같아 보이구요.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들은 한결같이 볼품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면 너무나 맛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을 싹 틔우게 만드는 신앙의 결정체이자 씨앗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십자가에 다 녹아져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는 삶을 살면 예수가 길과 진리요 생명입니다라는 주장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삶을 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질문해 옵니다. “당신 안에 무엇이 있길래 당신의 삶은 우리와 다른 겁니까?”라구요.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은 반드시 다른 이의 삶에 임팩트를 줄 수 밖에 없고 열매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드디어 다섯 권짜리 소설 레 미제라블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소설이죠. 소설 1권에서 미리엘이라는 주교가 소개됩니다. 겉모양은 볼품 없는 사람입니다. 키도 작고 머리도 벗겨지고 매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속사람은 매력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는 따뜻하고 인자하고 낭만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장발장은 29살에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투옥됩니다. 여러 번의 탈옥 시도로 그의 형량은 19년이나 늘어나게 됩니다. 미리엘 신부의 호의로 잠잘 곳이 없었던 출소자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지만 그의 은촛대를 훔치게 되죠. 경찰에 잡혀 주교 앞에 끌려 온 장발장에게 주교는 형제여 은쟁반까지 함께 가져가라고 했더니 가져가지 않은 겁니까?”라며 그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죠. 그 사건은 장발장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아버립니다. 소설 후반부까지 줄기차게 장발장의 삶을 놓지 않고 좇아 온 것은 바로 주교의 사랑과 용납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장발장은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장발장은 소설의 5권에서 자베르라는 형사를 죽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자베르는 그가 출옥한 후에도 그를 다시 투옥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쫓아 다니며 괴롭혔던 사냥개와 같은 경찰였습니다. 자베르는 혁명을 일으킨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현장에 침투해 들어가 있다가 시민들에게 잡혀 죽을 신세가 됩니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자신이 죽이겠다고 하며 그를 끌고 가죠. 그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그를 죽인 척하여 살려 보내줍니다. 자베르는 자신이 한 짓을 알기 때문에 장발장의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베르는 직선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장발장의 부드러운 곡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죠. 너무나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인 자베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죠.

 

소설이 말하려는 핵심은 호의와 사랑이 만들어내는 임팩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것이죠. 사랑은 말랑말랑하고 바보스럽고 손해 본 듯하고 느려보이지만 그 사랑이 결국 혁명보다 더 강력한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빅토르 위고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엘 주교의 호의와 사랑에 감동을 받은 장발장은 어느덧 자신도 미리엘 주교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담스러운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용납을 직접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예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6.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분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분의 길의 방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삶에 다가가야만 합니다. 왜냐면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보다 더 강력한 전도의 도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씀이 끊임 없이 우리를 다그쳐서 우리를 겸손한 삶으로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예수 따름의 신앙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 볼품 없어 보이는 것일지 모르나 그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만민을 살리는 놀라운 비밀이 그 십자가의 길, 그러니까 예수 따름의 삶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들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곳입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서로 서로에게 선한 임팩트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다 같이 동참하는 가족의 삶과도 같습니다. 이곳에서 만큼은 빈부귀천을 묻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겉모양과 스펙에 상관 없이 존중 받고 사랑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도 생전 교회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천국의 삶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지 않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다리가 되어 많은 이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Posted by speramus

본문: 창세기 23:1-20

제목: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1.

1945년에 미군 정보장교인 Carl Ferris Miller라는 군인이 한국으로 파견이 됩니다. 그는 한국전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갑니다. 그는 1962년 우연히 충남 태안에 들렀다가 땅을 사달라는 어느 노인의 간곡한 부탁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해변의 절벽 땅을 구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나무들과 식물들을 심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의 천리포 수목원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밀러 박사는 1979년에 아예 한국인으로 귀하했고 그의 이름을 민병갈로 개명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끊임 없는 친환경적인 노력으로 천리포 수목원은 2000년에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인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얼마전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나무는 천 년을 삽니다. 내가 하는 수목원은 이제 겨우 30년 됐지만, 적어도 300년은 내다보고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죽더라도, 이곳 천리포 수목들은 몇 백 년은 더 살 것입니다.”

이것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의 마음인가 봅니다. 당장 그 열매와 성과는 볼 수 없지만 후대를 위한 더 큰 그림 안에서 나무를 심는가 봅니다.

 

오늘은 어머니날입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성장은 나무처럼 참으로 더딥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가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 정도는 한 부모 아래 잘 자라야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고, 그 때에야 부모를 떠나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지게 되죠. 부모라는 토양이 척박하고 메말라 있으면 자녀들의 삶도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분이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우리 자녀들도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건강한 후손을 길러내는 것은 우리 일생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인 듯합니다. 왜냐면 그 후손들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광주에 있을 때 다녔던 모교회가 광주제일교회라는 교회였는데 유진벨(Eugene Bell)이라는 선교사님이 개척한 광주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후손인 Linton가문은 한국에 오랜 세월 정착하여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지금까지 힘써 오고 있습니다. 린튼가의 인요한 박사님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며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시더라구요. 린튼가를 보며 유진벨 선교사님의 믿음의 발걸음이 이제는 한국안에서 숲을 이뤄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민병갈 박사님도 그렇고 린튼가의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나그네로서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바라기에 현재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실천해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삶도 평생 나그네이자 이방인으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본토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걸어온 인생이었죠. 그가 하나님께 받은 약속도 지금 당장 이뤄질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뤄질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자기에게 맡겨준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과 이집트를 헤매는 과정 가운데서 가나안 땅 남단의 브엘세바 근처에 정착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이자 이방인이었습니다. 그와 평생을 함께 했던 인생의 동반자였던 사라가 나그네 땅에서 먼저 죽게 되자 아브라함의 슬픔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슬픔 중에 그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을 위해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땅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그것을 샀다는 이야기 가운데 기나긴 협상의 내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주인이었던 헷(Hittites) 민족의 리더인 에브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의 아내를 묻으려고 하는데, 무덤으로 쓸 땅을 여러분들에게서 좀 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4).” 나그네라는 히브리 말은 게르(foreigner, stranger)”이구요, 떠돌이는 토샤브(resident alien, sojourner)”입니다. 그들과는 다른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하는 의도와 함께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막벨라 굴과 그 주변의 밭과 나무들을 사겠다는 아브라함의 제안에 그땅의 주인인 에브론은 매장지를 위한 땅을 돈을 받지 않고 제공하겠다고 제의합니다. 매장지를 돈을 안 받고 주겠다는 제의는 언뜻 보면 그들의 호의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에게 체류자의 신분으로 묶어 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굳이 매장지를 돈을 주고 구입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제시한 은 400세겔에 대해 흥정하거나 깍지도 않고 제 값 그대로 주고 삽니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땅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땅의 가치를 치를 댓가로 돈을 충분하게 주겠다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밭을 샀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래 계약서가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에브론의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아브라함 가족 소유 매장지로 확정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62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62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살면서도 실제로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이 굳이 막벨라 굴을 가족 매장지로 구입한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제 서서히 마무리 되어갑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약속을 어떻게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겁니다. 사라도 죽고 그도 기력이 다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후손들을 위해 믿음의 근거로 삼을 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작은 밭에 딸린 매장지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실제로 아브라함이 유업으로 상속함으로써 이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방황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을 겁니다. 이 땅에 뼈를 묻고 후손들에게 이 땅을 물려주겠다는 신앙적인 결단과 결의를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현실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foreigner)이자 거류민(resident alien)이라는 거죠. 하지만 그는 현실 너머의 약속을 붙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몇 백 평에 불과한 땅 매입이지만 가나안 땅 전체를 미리 앞당겨 차지해 보는 믿음의 행위였던 겁니다. 성경에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정반대의 행위를 결단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남유다가 멸망을 앞두고 예레미야가 보여준 땅 매입에 관한 이야기는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32장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드기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11년을 즉위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10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해에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2).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체포되어 갇혀 있었죠. 그가 잡힌 이유는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왕인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감옥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던 거죠. 이 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7)." 지금 유다가 오늘 내일 망할 상황에서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밭을 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매입이 어떤 의미인지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해 주십니다. 예레미야 3215절 말씀입니다.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약속이 주어지고 있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결과물로 땅을 매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 매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결단이자 결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된 것이죠.

 

히브리서 1113-14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예레미야의 땅매입 행위가 믿음의 결단이라 해석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간절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고향이라 번역된 헬라말은 파트리아(Patria)’로서 아버지의 땅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며 믿음으로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4.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약속을 붙드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 우리가 받아 든 약속과 전혀 다르더라도 약속을 붙들며 걸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어떤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해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언약 백성의 삶을 통해 온 세상을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약속 받은 땅을 한 뙤기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죽고 그의 후손을 통해 마침내 이 땅 위에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지금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이라도 사들여 그 약속을 이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매우 어둡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며 답답해 합니다. 이 땅 위에 세워지겠다던 하나님의 나라는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셨다고 들었는데 악의 세력은 더 강력해 진 것 같아 보이기만 합니다. 악은 일상화 되었고 보편화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게 세상의 풍조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아가라 부탁하십니다.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고 견지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에브론을 비롯한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사용권을 무상으로 주며 그를 그 사회에 편입시키려 들었습니다. 너는 우리와 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인 것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당당히 살아가고자 하는 기백을 놓지 않았습니다. 400세겔의 거액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고 싶었던 것이죠.  

 

우리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나그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시고 이 땅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하고자 모이는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잘 못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돌려드리기 위해 우리는 찬양하며 기도하며 우리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안정감과 유사전능성에 대항하고자 우리는 헌금을 하며 그 헌금을 통해 사랑을 흘러보내는 결단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만이 이 세상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로 함께 모여 사랑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현실과 악이 평범화 된 현실 때문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는다는 믿음의 결단을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내일 유다가 멸망하더라도 아나돗의 밭을 샀던 예레미야처럼, 고향(아버지집)을 찾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표현한 선진들처럼, 약속한 것을 지금은 받지 못할지라도 그 약속을 잊거나 저버리지 말길 바랍니다. 오히려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 행동들을 결단하시고 실행해 옮겨 보십시오. 작은 것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실천해 보십시오. 교회에서는 너무나 신실해 보이는데, 교회 밖을 벗어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의심하게 만들게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라면 교회 밖 현실에서 우리 태도는 분명히 달라야만 합니다. 세상에 발 딛고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더 사랑하고, 더 친절하고, 더 긍정적이고, 더 소망으로 가득하고, 더 인내하고, 더 절제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품위 있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5.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더라도 우리는 밭을 사고 땅을 경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속과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도 오늘이라는 일상을 우리는 묵묵히 살아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지난 겨울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그렇게 외롭게 서 있던 겨울나무들도 이제는 푸르른 신록의 잔치에 하나같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무들은 이파리를 이르게 틔우기도 하고 어떤 나무들은 아직도 앙상한 채로 있지만 언젠가는 푸르른 잔치에 동참하겠죠. 우리의 신앙도 나무들에게서 배웁니다. 약속이 더디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버텨서서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묵묵히 뿌리를 내릴 마음으로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인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부인들과 요셉은 막벨라굴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요인이되어 400년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의 땅인 약속의 땅을 잊지 않고 돌아오죠. 그런 면에서 우리의 일상 안의 믿음의 실천들은 우리 삶에 귀한 열매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의 부모님은 경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인 연천 마을이라는 곳에서 유일한 광산 김씨로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제 생각으론 꾀나 녹녹치 않은 현실 속에서 조상 중 한 분이 이씨 집성촌으로 들어가셔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시골의 집성촌의 분위기를 아시는 분들은 그 텃세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이씨 마을의 나그네처럼 살아가던 아버지께서 큰 결정을 내리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면소재지로 이사를 결심하셨죠. 면사무소와 교회 사이에 낀 집을 사셨고 지금도 그곳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이웃에 위치한 겁니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믿음이 없는 분들이셨지만 그 이사의 결정이 저희 집안의 운명을 좌우했던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보다 앞서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발들이게 된 것이죠. 자녀들이 교회가니 어머니 아버지도 교회에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질 수 밖에 없는 격이죠. 교회 가까이 살다 보니 가족들의 신앙은 깊어지면서 따라온 복들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의 이사는 정말 귀한 선() 투자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지금 내려지는 신앙의 결단과 행동들은 반드시 여러분에게 열매가 되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은 선물임과 동시에 돈으로 매입해야 하는 땅, 곧 믿음의 선() 투자를 요구하는 땅임을 기억하십시오. 가족의 달을 맞아 우리가 만들어갈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정체성에 대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길어야 백 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시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 답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에 선() 투자하는 이들의 삶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믿음의 투자는 더디더라도 반드시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백 세겔을 투자하여 나중에 후손들이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했잖습니까?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는 길손으로 살아갈지 모르지만 우리는 참 고향(파트리아, 아버지 집)을 사모하는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귀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때론 아브라함처럼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이 다가올 지 모르지만, 때론 예레미야처럼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대재앙이 임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인생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투자하는 삶은 어떤 투자보다 수익률이 높고 보장성이 높은 투자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이 아브라함의 가문처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이뤄드리는 믿음의 명문 가정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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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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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산이나 재물을 뜻하는 재()에 Thechnology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재무를 효과적으로 관리 운용하여 최대 이익을 창출해 내는 방법을 일컫는 말이죠. 이 재태크를 이용한 신조어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금(gold)테크가 그 중 하나죠. 돈보다 가치가 있는 금()에 투자하여 자산을 불리는 방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금테크의 아류인 근()테크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근은 근육의 줄임말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몸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고, 몸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늘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라는 취지에서 ‘근테크’라는 말이 만들어 진 듯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와 이익을 창출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이 이런 말씀해도 되냐구요? 한 번 들어보시죠.

   우리 삶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재물로 절대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를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왜냐면 재물(맘몬)이 갖는 신적인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갖는 아이러니는 가지면 가질 수록 허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에릭시톤의 형벌’과도 같습니다. 에릭시톤은 신을 경멸하고 신성하게 여기지 않은 불경죄로 기아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평생 배고픔을 느끼는 ‘허깃증’ 갖고 살아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중엔 하나뿐인 딸을 팔아 먹을 것을 사고, 자신의 팔다리까지 잘라 먹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재물이 갖는 파워는 에릭신톤에게 내려진 ‘허깃증’과도 같습니다. 반면 관계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할뿐 아니라 허기를 잠재웁니다. 우리의 삶을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촛점을 맞춰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헤세드’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헤세드는 언약적인 관계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언약적인 신실함과 자비를 일컫는 말입니다. 헤세드를 소유하고 헤세드를 넓혀가는 ‘헤텍’(Hesed Tech)에 우리 삶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왜냐면 헤세드는 그것을 받는 이 뿐만아니라 주는 이의 삶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주는 이의 삶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헤세드를 행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헤세드로 갚아주십니다. 나오미에게서 시작됐던 헤세드는 룻에게서 행해지고, 룻이 행한 헤세드는 보아스를 통해 행해집니다. 헤세드야 말로 돌고 돌고 돌면서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금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멤버십 서비스를 받아 혜택(惠澤)이 쏟아지는 헤텍이야 말로 최고의 재태크라 할 수 있으니,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부유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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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주말에 가족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다 참석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많은 고민들을 나눴습니다. 근대 이전에 교회는 항상 세상의 중심에 있었고 그에 따라 교회의 존재 목적은 조직을 유지하고 교구를 관리하며 교구를 확장하는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후기 사회인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교회는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더이상 교회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지요. 교회가 주변부로 밀려나자 교회는 잊고 있었던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세속화 된 세상 속으로 보내진 존재라는 깨달음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생존하느냐 마느냐의 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선교라는 잃어버린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죠.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몸이니 천년만년 유지될 거라는 착각 속에 지낼 때가 많습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은 술집으로 변하든지 다른 종교의 예배당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 목적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다하나교회는 설립된 지 5년이 된 신생교회입니다. 다하나교회가 로체스터라는 이 도시 안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한인교회가 없이도 미국교회를 잘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오고 있었는데 왜 한인교회를 세우고 한인들을 이곳에 불러 모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는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이 교회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었을까요? 이미 있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조직이 필요하고 목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주객이 바뀐 격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을 먼저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로체스터라는 작은 타운에 있는 한인과 한인 이세들을 향한 부르심에 우리는 헌신하여 모였습니다. 아무래도 한인은 한인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문화적 장벽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번 캠프에서 우리는 선교적, 사도적, 성육신적 교회의 비전을 함께 나눴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선교입니다. 선교하면 해외선교부터 생각하는데 그보다 훨씬 큰 개념입니다. 선교란 보내졌다(mission의 어원인 라틴어 mittere는 보내졌다는 뜻)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구속하시기 위한 모든 노력과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일상과 이웃들 속에서 그분의 선교를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 보다 앞서가시며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분별하고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흩어져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사명을 가지고 모입니다. 교회는 흩어짐을 전제로한 모임이죠. 선교가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앞으로 나눌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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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아픕니다. 로체스터라는 도시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유입이 되어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떤 이들은 떠나 갑니다. 떠나 가는 이들도 서운하겠지만 떠나 보내고 남아 있는 이들의 아픔은 오래 남는 같습니다. 계속 떠나 보내야 했던 기억들이 쌓이다 보니 이별의 아쉬움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이별을 맞이 하게 되어 아픈 것이겠죠. 이번 여름에 로체스터와 다하나교회를 떠나는 교우의 가정이 적잖습니다. 다하나교회같은 이민 교회에서 정들었던 교우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정들었던 형제 자매들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어쩌면 떠나 보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지도 모릅니다. 이별이라고 생각하면 아쉬움과 아픔이 크겠지만 파송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기쁨으로 보낼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사역을 하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자의식이 가득했죠. 보내는 행위를 선교(mission)라고 칭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다하나 교회를 떠나가는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남아 있는 교우들로부터 파송을 받고 떠나가는 선교사 가정이라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이들이 이제 곳곳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교사로 살아간다면 떠나보내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룻기 1장을 묵상하며 떠나보내는 것도 사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룻기 1장에서 나오미, , 오르바 라는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여인들은 보금자리를 찾아 정든 곳을 떠나가야 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입니다.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모압에 남기로 하고 맏며느리와 시어머니만 모압을 떠나 유다로 가게 됩니다. 오르바의 관점으로 보면 홀로 남아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르바의 결정을 탓하거나 비아냥 거리지 않습니다. 오르바의 결정 또한 아름답습니다. 나오미와 룻도 오르바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그녀의 안식을 빌어줍니다. 오르바는 룻과 나오미의 진심 어린 축복을 받으며 마음 편히 그들을 보낼 있었을 것이고, 그녀 또한 자신의 어미 집에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됐을 겁니다. 떠나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닐곱 가정이 꺼번에 교회를 떠나게 되니 걱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룻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서로를 향한 진정한 축복과 공감이 전제된 이별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우리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위기일 있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곳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주의 교회의 아름다운 향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펼쳐질 다하나교회의 이야기의 쳅터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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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절과 절기가 되면 생각나는 책이나 문학작품들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읽어줘야 합니다. 7월이 되면 웬지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떠오릅니다. 가을이 시작되고 찬바람이 불면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절기와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하는 성경 말씀이 있었다고 하죠. 유대인들은 그들의 5대절기에 각각 절기에 맞는 성문서(시가서) 책들을 낭독하였습니다. 성문서 중에서도 다섯 개의 성경을 따로 모아서성문서 오축(五丑, Five Megilot)’ 불렀습니다. 다섯 개의 두루마리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에는 아가서, 오순절에는 룻기, 솔로몬 성전 파괴일인 아브월 구일에는 예레미야 애가, 장막절에는 전도서,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자 오순절을 기념하는 주일이니 룻기를 낭독해야겠군요. 먼저 룻기가 어떤 책이고 룻기를 오순절에 읽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면 룻기 낭독이 흥미로워지겠죠?

 한글 성경은 구약성경의 헬라어버전인 ‘70인경(Septuaginta)’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의 순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헬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는 구약성경의 순서를 시간 순서로 배치하려고 하다보니 히브리 성경과 순서가 달라지게 겁니다. 히브리 성경에 룻기는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31장에는지혜로운 여인 소개 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현숙한 여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란 히브리말에쉐트 하일인데 능력있는 여인이란 뜻입니다. 가솔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돌보는 그런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죠.  그리고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사이에 룻기가 끼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기가 현숙한 여인의 표상으로 룻을 소개하고 있고, 룻과 보아스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는 면에서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죠. 룻은 실제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부양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남성들이 즐비한 타작마당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룻이야말로 현숙한 여인의 표상이 있습니다. 룻기를 오순절에 읽는 이유는 룻기의 배경이 오순절에 이뤄지는 밀의 추수시기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인정과 친절이 강조되는 절기입니다. 룻기야 말로 절기와 매우 어울리는 책입니다. 룻기는 인애(헤세드) 보여주신 하나님과 인애를 베푸는 사람들(, 나오미, 보아스) 이야기입니다. 룻기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돌봄과 사랑, 우정, 다른 사람에 대한 비상한 배려와 책임감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과 만나 상실과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치유된다는 복음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성령강림절에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인애와 이웃 사랑의 가치를 느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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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좋아하세요?  많은 분들이 드라마를 즐깁니다. 드라마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허구이지만 우리 삶에서 그리고 우리 이웃들의 속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연기자가 연기하고 그것을 영상을 통해 전달합니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이라는 일반적인 문학장치를 사용하여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현실에 있지도 않았던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하며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하면서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이야기는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살아가는  이민자의 이야기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민자로 살아가는 미국은 오랫동안 그들의 배경이 되어온 기독교를 바탕으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야기야말로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을 가장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드라마다라는 책을 가지고 지난 8 동안 함께 공부를 왔고 어제 종강했습니다. 책은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과 움직이는 방향성에 대해 이해했습니다. 성경이야말로 세상의 보편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아우르는 세상 전체에 대한 이야기라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성경을 파편적으로 이해했던 것을 탈피해,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분명하게 일러주는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성경을 이야기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드라마라는 틀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드라마는창조-타락-구속-새창조라는 플랏을 가지고 있으며 6(acts)으로 구성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택된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속하실 위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고 그의 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예수가 보낸 성령과 교회를 통해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갑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행 중인 이야기와 결말 사이에 놓인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혀 허구가 아닌 실재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이야기 속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발견해야 합니다.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의 무대(stages) 되는 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안에 이미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함께 배우이자 주인공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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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이라는 나무는 매우 볼품 없는 나무입니다. 한국의 학교나 관공서의 울타리로 주로 심겨진 나무가 회양목입니다. 회양목이 볼품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무리 크게 자란다고 해도 나무의 직경이 뼘을 넘기지 못하고 키도 짤막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회양목이 정도의 직경으로 자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10? 50? 아닙니다. 5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양목에게는 느림보라는 별명이 붙어 있나 봅니다. 하지만 회양목은 더디게 자란 만큼 단단함과 내구성은 다른 나무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어떤 나무보다 단단한 회양목은 예부터 도장을 사용된 나무여서 도장나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회양목 입장에서 볼품 없다는 자기에 대한 평이 못내 불만스럽기만 합니다. 자기보다 단단한 나무도 없기 때문이죠. 하늘 높이 자라고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좋아 보일지 몰라도 단단함음 보잘 없는 회양목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런 나무들은 성장하고 꽃피우는데 모든 것을 소진한 나머지 내실을 다질 여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양목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합니다. 그래서 그의 성장은 백년이 걸리고 더딘 것이지요. 더딘 성장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기 그지 없는 회양목의 가치는 단연 나무중에 으뜸입니다.

 회양목을 떠올리며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화려함을 좇아 가는 사람이나 교회는 내실을 다질 여력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과 양적 성장에 집중하다보면 내실을 다질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속도와 겉모습의 화려함에 결코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설정하고 방향을 향해 묵묵히 흔들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회양목의 더딘 성장에 비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딘 이유는 인격의 성장속도에 맞추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내면이 성장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도 성장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회복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인격의 형성은 부단한 내면의 살핌과 성찰을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머무르며 성찰하고, 성찰한 것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실천에 대해 성찰하는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지난한 훈련을 통해 인격은 만들어져 갑니다. 이런 인격형성과 인간성의 회복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과는 더더욱 거리가 멉니다. 매일매일의 사랑의 실천과 성찰이 켜켜이 쌓여야 단단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만들어질 있습니다. 단단함은 어떤 시련과 환란이 와도 꺽이지 않는 내적인 힘을 제공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교회의 성숙은 회양목과 같아야합니다.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고 성장이 더디다고 불평 말아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머물러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단단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형성되어진 인격의 가치란 어떤 것과도 바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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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살림을 중곡동에 마련했었습니다. 주일 어느날 아차산역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가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고구맛순을 다듬으시며 바구니에 쌓아 팔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고구맛순을 다듬던 기억에 고구맛순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께서 다듬어 놓신 고구맛순을 다 사들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즐겨 해주시던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고구맛순 반찬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손맛이 그리워 요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후로 몇 번 나물을 다듬어 파시는 할머니들만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사드리곤 했죠. 저는 나물 반찬과 특정한 음식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소환해 내곤 했습니다. 아이들을 세 명이나 키우며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는 하지만 아직 어머니의 내공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는 자기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만큼 값없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려 온 것이겠지요. 5월이 되고 고무맛순이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시절이 되니 어머니 품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형제들이 고향집에 내려갈 때에만 영상통화를 통해 어머니의 얼굴을 뵙게 되지만, 화면 너머의 어머니의 주름이 더욱 깊어만 보입니다.

 

어머니의 주름을 보며 저 주름 고랑 중 하나는 내 몫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 품을 떠나 형제들과 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유학을 하게된 저는 주말이 되면 의례적으로 시골 집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입시준비와 대학생활로 바쁜 형 누나들 대신 늘상 저는 쌀과 반찬들을 공수해 나르는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주일 오후 다섯 시에 광주로 떠나는 버스에 올라타기 전, 의례껏 저는 어머니와 실갱이를 하곤 했습니다. 실갱이의 이유는 왜 이렇게 반찬을 무겁게 많이 쌌느냐, 쌀은 왜 이렇게 많이 담았느냐 뭐 그런 거였죠. 버스에 오를 때도 의례껏 “다시는 내가 내려오나 봐라.”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버스에 자리 잡고 앉자 마자 후회가 밀려오며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어머니에게 나도 손을 흔들며 답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어머니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이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지체장애 1급이었던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님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두 다리와 오른 팔이 마비된 딸을 위해 두 시간 마다 한번씩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고 합니다. 암투병을 하시던 장영희 교수가 죽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엄마 미안해. 먼저 떠나게 돼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도 속도 썩혔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죠. 어머 니만큼 향기롭고 다정하며 성스런 이름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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