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살림을 중곡동에 마련했었습니다. 주일 어느날 아차산역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가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고구맛순을 다듬으시며 바구니에 쌓아 팔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고구맛순을 다듬던 기억에 고구맛순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께서 다듬어 놓신 고구맛순을 다 사들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즐겨 해주시던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비빈 고구맛순 반찬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어릴 적 어머님이 만들어주신 손맛이 그리워 요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후로 몇 번 나물을 다듬어 파시는 할머니들만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서 사드리곤 했죠. 저는 나물 반찬과 특정한 음식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소환해 내곤 했습니다. 아이들을 세 명이나 키우며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는 하지만 아직 어머니의 내공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는 자기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만큼 값없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려 온 것이겠지요. 5월이 되고 고무맛순이 무성히 자라기 시작하는 시절이 되니 어머니 품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형제들이 고향집에 내려갈 때에만 영상통화를 통해 어머니의 얼굴을 뵙게 되지만, 화면 너머의 어머니의 주름이 더욱 깊어만 보입니다.

 

어머니의 주름을 보며 저 주름 고랑 중 하나는 내 몫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 품을 떠나 형제들과 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유학을 하게된 저는 주말이 되면 의례적으로 시골 집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입시준비와 대학생활로 바쁜 형 누나들 대신 늘상 저는 쌀과 반찬들을 공수해 나르는 역할을 해야했습니다. 주일 오후 다섯 시에 광주로 떠나는 버스에 올라타기 전, 의례껏 저는 어머니와 실갱이를 하곤 했습니다. 실갱이의 이유는 왜 이렇게 반찬을 무겁게 많이 쌌느냐, 쌀은 왜 이렇게 많이 담았느냐 뭐 그런 거였죠. 버스에 오를 때도 의례껏 “다시는 내가 내려오나 봐라.”하며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버스에 자리 잡고 앉자 마자 후회가 밀려오며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어머니에게 나도 손을 흔들며 답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어머니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이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지체장애 1급이었던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님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두 다리와 오른 팔이 마비된 딸을 위해 두 시간 마다 한번씩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고 합니다. 암투병을 하시던 장영희 교수가 죽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라고 합니다. 

“엄마 미안해. 먼저 떠나게 돼서.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도 속도 썩혔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죠. 어머 니만큼 향기롭고 다정하며 성스런 이름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