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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1.09 01082023 다하나교회 설교문, 막1:1-8, 회개의 세례

본문: 마가복음 11-8

제목: 회개의 세례

 

1.례요한의 배경

마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요한이라는 세례자로(John the Baptist)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1).” Good News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을 우리는 복된 소식이란 뜻의 복음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신 예수가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Good News를 먼저 전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세례자 요한이라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낸 이야기와 그가 만들어낸 삶의 스토리는 그리스도(메시아)가 앞으로 펼쳐 갈 복음의 내용과 같은 방향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나기 200여년 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헬라하면 떠오르는 왕이 있죠? 누구인가요? 미국인들이 지금도 좋아해서 이 왕의 이름을 자기 아들과 딸에게 붙여주기도 합니다.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대왕입니다.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자 헬라는 네 개의 나라로 갈라지게 되죠. 그 중에 한 왕조가 셀루커스 왕조(Seleucid Empire)인데 시리아(Syria)일대를 다스리게 되죠. 셀루커스 왕조 전까지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은 제사장들이 자율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왜냐면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같은 제국들은 세금만 받아가고 자율적인 통치를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죠. 하지만 헬라제국 그중에서도 알렉산더가 죽은 후 등장한 셀루커스 왕조부터 팔레스틴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Antiochus VI Epiphanes)라는 왕은 이스라엘의 종교성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기로 마음먹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야웨(Yahwhe)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헬라의 신들을 섬기게 강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전에 헬라의 신상들을 들여 놓게 하고, 할례를 금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때 돼지를 잡아 드리게 하고 돼지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이 돼지 아니겠습니까? 이 때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저항 운동이 마카베우스 항쟁(Maccabeus Revolt)입니다. BC 167년에 벌어진 사건이었죠. 마카비(Machabee)는 망치(hammer)라는 뜻인데 맛디디아(Mattathias)의 아들 유다(Judah)의 별명이었죠. 이 항쟁(revolt)은 성공을 거두고 이스라엘은 셀루커스 왕조 대신 마카비의 후손들이 다스리게 되죠. 마카비의 후손들을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ty)라고 부릅니다. 이 마카비 항쟁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세력이 핫시딤(Hasidim)”이란 집단이었죠. 핫시딤이라는 말은 자비나 사랑을 뜻하는 Hesed에서 파생된 말로 경건한 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스몬 왕조가 제사장 권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을 보고 핫시딤들이 매우 실망합니다. 하스몬 왕조가 타락함을 직감한 거죠. 이 경건한 무리였던 핫시딤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지방으로 흩어집니다. 이 핫시딤들이 두 분류로 갈라집니다. 핫시딤의 제사장 무리들은 쿰란(Qumran)같은 사해 주변의 광야에서 금욕적인(Ascetic)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제사장 무리들을 일컬어 에세네(Essenes people) 파라고 하죠. 그리고 핫시딤의 다른 한 부류들은 지방의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 바리새파 (Pharisees people)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제사장이 아니라 평신도 그룹이었죠.

 

이렇게 길게 역사를 짚은 것은 요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Essene 파로서 광야에서 수도적(monastic) 금욕생활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세네파는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단절하여 금욕적인(ascetic)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사유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수도원적인(monastic)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에세네파는 결혼이나 성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 출신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그들의 운동을 지속시키고자 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Zechariah)와 엘리사벳(Elizabeth)은 노년에 요한을 가졌기 때문에 요한이 어린 시절 죽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에세네파 공동체에 맡겨지고 길러졌다고 추측하는 거죠.

 

2.세례를 행하는 요한

요한이 에세네파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운동(movements)을 일으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 운동이 에세네파가 보여준 형태와 매우 비슷했구요. 요한이 이스라엘에 시작한 운동은 바로 세례Baptism” 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에세네파와 무슨 상관있냐는 질문이 들죠? 고고학자들은 쿰란이라는 지역에서 에세네파가 공동체 생활한 흔적들을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물에 몸을 담그고 정결하게 씻는 정결 예식(ritual)를 행하는 ritual bath도 발견되었습니다. 에세네 사람들은 자신을 죄로부터 씻어내고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배쓰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침례(baptism)가 에세네파의 정결예식과 많이 닮아있는 거죠.

요한을 세례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요한이 회개의 침례라는 새로운 예식을 유대인들에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침례를 행하라는 율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침례는 구약성경을 거스르는 예식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죄를 씻고 정결케 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회개의 유일한 길은 짐승을 죽여 제사 드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 율법을 거슬러 새로운 회개의 예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방인들을 유대인 공동체에 받아들이기 위해 행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라는 것을 행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 세례는 기쁜 소식인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3. 회개의 형식과 본질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종교에는 의식이나 예식이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그 형식(form, style)은 어떤 본질(Substance,essence)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형식과 본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본질을 선택하겠죠.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에도 형식과 본질이 있죠. 회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내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둘째, 나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셋째,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통해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이런 회개의 본질을 감싸 안는 형식이 바로 대속 제사(redemptive sacrifice) 였습니다. 대속 제사라는 형식을 행하면서 회개의 본질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만 남고 본질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는 종교가 되어 버린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죠. 회개할 마음이 있고 회개의 본질은 갖추었는데 제물을 살 경제력이 안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할 줄도 모르는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도 했죠. 이런 것을 이용해 먹은 사람들이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스몬 왕조 말기에 에돔 사람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하스몬 왕조의 고위직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에돔 사람이 로마에 딱 달라 붙으면서, 헤롯 집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헤롯 가문이 이스라엘을 100년 동안 다스리면서 대제사장의 평균 임기가 5년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죠. 이전 대제사장이 죽어야 다음 대제사장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대적했다고 나오죠. 대제사장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가문에 뇌물을 많이 갖다 바치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며 많은 사람을 세웠기 때문이죠. 이들이 받친 뇌물은 지금돈으로 100만불 200만불 정도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100-200만불의 뇌물을 바쳐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한다면 내가 대제사장으로 봉직하는 기간 동안 모든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겠습니까? 갖다 바친 뇌물 이상을 회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들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겁니다. 돈벌이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냈던 헌금이나 십일조를 가지고 고리대금업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두번째 돈벌이 수단은 제물을 비싼 값에 파는 것이었죠. 일반 시장에 가면 10만원에 살 수 있는 양 한 마리를 성전에서는30만원에 파는 겁니다. 그런데 안 살 수 있습니까? 시장에서 양을 사오면 부정하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제사장에 의해서 정결하다고 인정받는 것들만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나 일반 시장에서 산 짐승을 가져오면 제사장들이 다 부정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성전이 한 마디로 종교 사업을 한 겁니다.

 

누가복음 32절에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Annas and Caiaphas were the Jewish high priests. At that time God spoke to Zechariah's son John)”고 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장인과 사위 사이죠. 한 집안에서 대제사장직을 독차지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가 아무 의미 없이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대항 세력이 바로 이들 대제사장 세력으로 대표되는 성전체제(temple system)였던 겁니다. 이들을 대항해서 회개의 본질, 나아가 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운동이 바로 세례 운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싸움은 형식에 대한 본질의 싸움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껍대기만 남은 성전체제와의 싸움이 이 복음의 시작이죠.

대제사장들의 종교 장사가 악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사람을 수단화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자기의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례 요한은 형식화 된 종교와 싸웠습니다. 형식화 된 종교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악한 종교였기 때문이죠. 이 형식과 본질의 싸움이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마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율법의 형식을 깨뜨리면서까지 복음을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이것이 세례 운동에 숨어 있는 복음입니다. 종교 장사에 희생되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준 것이 세례 운동이었던 겁니다

 

4.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복음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다를까요? 오늘날 기독교는 종교 장사를 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형식은 본질을 담아내고자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심령은 새로워지고 계신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행하며 살아갈 마음이 여러분에게는 있으신가요?

 

본질을 찾기 위한 형식과의 싸움은 요한이 보여준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앞으로 만들어 가실 좋은 소식(Good News)의 이야기가 본질을 찾기 위한 끊임 없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요한은 같은 도상(on the same road)에 서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찾고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예수님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질인 자비와 사랑으로 행하는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셨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체제(temple system)로 작동하는 유대교가 종교장사를 하는 것을 가장 못 마땅해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성전이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답답하실 수 밖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이 회복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할 성전에서 사람이 이용당하고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죠.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근대에 와서 기독교는 자본주의 종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이고 효율이죠. 자본주의에서 생산성이 뛰어나고 효율성이 뛰어난 것이 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합니다. 숫자를 통해 선과 악을 가늠하곤 합니다. 교인 수가 많은 큰 교회는 좋은 교회, 교인 수가 적은 교회는 나쁜 교회라고 생각하죠. 헌금을 많이 드리는 성도는 좋은 성도, 적게 드리면 나쁘다생각합니다. 과연 숫자 안에 종교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를 비판합니다. 그는 디지털 사회가 놓치기 쉬운 서사(narrative), 즉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는 Digital 이라는 말이 손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손가락은 숫자를 새기 위한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디지털이란 새는 손가락, 즉 숫자를 바탕으로 합니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 인스타그람의 스토리라는 항목마저 샘을 위한 도구로 쓰여집니다. 몇 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하트 표시를 했는지에 의해 그의 인간됨이 판가름되기도 합니다. 친구도 숫자로 새지고, 애착도 호감도 숫자를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셀 수 있게 가공됩니다. 숫자로 나타내야만 성과와 효율성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 안에서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의미를 잃어가게 됩니다. 숫자 안에서 인간은 도구화 되고 수단화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절대 도구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으로 와서 자신들에게 이득을 남겨줘야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가자 요한을 이단으로 취급합니다. 성전 제사를 통해 수입을 올려주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자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blasphemy) 한다고 없애려 하였죠. 요한이 예비한 주님 오실 길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desperate struggle)였습니다.

우리들의 복음의 시작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슨 계명을 지켰고 안 지켰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 안에 숨겨 있는 본질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만의 자비와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죠. 교회는 헌금이나 사람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복음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일 주일 동안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들어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고 교회에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모여서 주님의 복음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매 주일 예배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숫자를 통해 표현되는 효율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본질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소중하듯 다른 이들의 삶이 소중함을 아는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여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사투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Scripture: Mark 1:1-8
Sermon: Baptism of Repentance / translated by Ji-Han Park

1. Background of John the Baptist
Mark says that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begins with John the Baptist. “This i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v. 1).” We interpret the Greek word ‘Euangelion’, which is translated as good news, as the gospel. There is a story that Jesus, the Son of God and the Messiah, tells, and that story is very good news. There is a person who preached the Good News first, and he introduces himself as John the Baptist. The story of John the Baptist's life and the story of the life he created are in the same direction as the contents of the gospel that Christ (Messiah) will unfold in the future. In order for us to understand the story of John the Baptist, we must first look at the history of Israel.

When you think of Greek Empero, is there a king that comes to mind? Who is it? Americans still like it so much that they give the king's name to their sons and daughters. That's Alexander the Great. After Alexander's sudden death, Greece splits into four kingdoms. One of them was the Seleucid Empire, which ruled over Syria. Prior to the Seleucid dynasty, the areas inhabited by Jews were governed autonomously by priests. Because empires like Assyria, Babylon, and Persia only received taxes and left them to rule autonomously. However, among them, the Seleucid dynasty, which appeared after Alexander's death, began to directly rule Palestine. In particular, Antiochus VI Epiphanes decides to completely destroy the religion of Israel. Antiochus Epiphanes IV forced the Israelites to serve the Greek gods in order to stop serving the God Yahweh. In the temple of Israel, the gods of Hella are put in, and circumcision is prohibited. And when the Israelites hold a sacrifice, they force them to slaughter a pig and eat pork. Isn't the pig the most hated animal by the Israelites? At this time, there is a resistance movement centered on the priests, and the representative resistance movement is the Maccabeus Revolt. It happened in 167 BC. Maccabee means a hammer, and it was the nickname of Judah, the son of Mattathias. This revolt succeeds, and Israel is ruled by the descendants of the Maccabees instead of the Seleucids. The descendants of the Maccabees are called the Hasmonean dynasty. The forces that actively helped the Maccabi Rebellion was a group called “Hassidim”. The word Hassidim is derived from ‘Hesed’, which means mercy or love, and means “the godly one.” However, the Hassidim are very disappointed to see that the Hasmonean dynasty seizes both priestly and political power. He felt that the Hasmonean dynasty had fallen. This godly group, the Hassidim, leave the temple in Jerusalem and scatter to the provinces. These Hassidim ar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The group of priests of Hassidim begins an ascetic community life in the wilderness around the Dead Sea, such as Qumran. This group of priests is called the Essene people. And the other type of Hassidim were the Pharisees people who were in charge of practicing and teaching the law centered on local synagogues. The Pharisees were a group of laymen, not priests.

The reason why I pointed out such a long history is to understand John's background. Many people think that John may have lived a monastic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as an Essene. The Essenes people lived a community life in this kind of wilderness and lived an ascetic life cut off from the world. They were people who never married, did not own private property, and lived a monastic life. It is said that the Essenes wanted to continue their movement by adopting children from priests because they did not have marriage or sex life. John's parents, Zechariah and Elizabeth, had John in their old age, so they may have died while he was a child. So it is assumed that John was entrusted and raised by the Essene community.

2. John the Baptist
It doesn't matter whether John is an Essene or not. His life is only similar to that of the Essenes. The important thing is that John is creating new movements unheard of in Israel's history. That the movement has its roots in the Essenes. The movement that John started in Israel was “Baptism”. Then you ask what does baptism have to do with the Essenes? Archaeologists find traces of Essenes living as a community in the Qumran area. Ritual baths were also found there, where rituals of purification were performed by dipping and washing the body in water. Essene people went into a bath to cleanse themselves from sin and to keep themselves clean. The baptism of John the Baptist is very similar to the purification ceremony of the Essenes.

The reason why John is called the Baptist is because John performed a new rite called the baptism of repentance to the Jews. Even in the Old Testament, there is no law requiring baptism anywhere. Rather, baptism is a ceremony that goes against the Old Testament. In the Mosaic Law, we are told to offer sacrifices to wash away sins and purify them. The only way to repent was to kill an animal and offer it as a sacrifice. By the way, John the Baptist is doing a new ceremony of repentance against this law. Baptism was a ceremony performed to receive Gentiles into the Jewish community. But Jews are receiving that baptism. For what reason did John the Baptist perform baptism to the Jews? And what does this baptism have to do with the gospel, the good news?

3. The Form and Nature of Repentance
We have worship services every Sunday. Pray to God, praise God, and listen to His Word. There are rituals or ceremonies in the religion we practice, but they have a certain form, and the form (style) is a means to pursue a certain essence. If I had to choose between form and essence, I would choose essence. The same goes for repentance. Repentance also has a form and an essence. What is the nature of repentance? I could say three things. First, I am heartbroken and remorseful for my wrongdoing. Second, the essence of repentance is not only to feel sorry for the person who has suffered damage due to my wrong actions, but also to compensate for the damage. Third, the essence of repentance is to move in the opposite direction through a resolution and determination not to commit such a sin again.

In the law of Moses, the form that embraced the essence of repentance was the redemptive sacrifice. It is to pursue the essence of repentance while performing the form of the ransom sacrifice. However, as time passes, only the form remains and the essence disappears. It has become a religion with no substance and only a shell. There are also the opposite cases. There were also people who had a heart to repent and possessed the essence of repentance, but did not have the financial power to buy sacrifices. People like this were pointed at as bad people who did not even know how to repent. Religious leaders often used tactics like these.

After the Hasmonean dynasty, the Herod family began to rule Israel. It is said that the average term of office for the high priest was 5 years while the Herod family ruled Israel for 100 years. Originally, the high priest served for life. The previous high priest must die before the next high priest can be established. But in the Gospels, it says that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resisted Jesus. The high priest is in the plural. Because he appointed a person who brought a lot of bribes to the Herod family as the high priest and appointed many people. The bribes they paid were enormous amounts of money, about $1 million to $2 million in today's money.

If I became the high priest by paying a bribe of one to two million dollars, where would all the attention be focused during my service as high priest? Shouldn't we recover more than the bribe paid? That is why, from that time on, these high priests put up the name of God and became frantic about making money. One of the means of making money was usury with the offerings or tithes that people paid. Their second means of earning money was selling sacrifices at high prices. If you go to the general market, you can buy a sheep for 100 dollars, but the temple sells it for 300 daollars. But is there any choice not to buy it ? Buying a sheep from the market is considered unclean. Under the law, only those things recognized as clean by the priests could be sacrificed. If people bring animals they raise at home or animals bought in the general market, the priests say that they are all unclean. People have no choice but to buy sacrifices at the temple. In a way, the temple was doing religious business.

Luke 3:2 says, "Annas and Caiaphas were the Jewish high priests. At that time God spoke to Zechariah's son John." Annas and Caiaphas are father-in-law and son-in-law. He is holding the position of high priest in one family. Luke does not mention Annas and Caiaphas without meaning. The opposing forces of John the Baptist were the temple system represented by the forces of the high priests. The baptism movement was a holy movement to counter them and restore the essence of repentance and, furthermore, the essence of religion. John the Baptist's battle was a battle of substance against form. The fight against the temple system that has lost its essence and remains only a shell is the beginning of this gospel.

The reason why the religious business of the chief priests is evil is that they use people as means. It is to think of people as a means to satisfy one's own desires. It is a very evil act to use people to satisfy one's own interests. Because man is a being made in the image of God. John the Baptist, on the other hand, fought against formalized religion. This is because the formalized religion was an evil religion that used people as its means. Mark says that this battle between form and essence i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our Lord Jesus. John the Baptist tried to live out the gospel even by breaking the formality of the law. This is the gospel hidden in the baptism movement. It was the baptism movement that opened the way to meet God to those who were sacrificed in the religious business and could not meet God.

4. The gospel of restoring the image of God
Is today different from the time of Jesus? Can we confidently say that Christianity today is not in the business of religion? We worship every week. There is a certain format in worship, and the format was created to contain the essence. The essence of worship is to meet God. Are you meeting God through the form of worship? Is your spirit being renewed through worship? Do you have the heart to discern God's will through preaching and to live by doing that will?

The fight against form to find the essence was the beginning of the gospel that John showed. In other words, it tells us that the story of the Good News that Jesus will create in the future will be a constant battle to find the essence. In that sense, Jesus and John are standing on the same road. Jesus used to say that he came to this earth to find the essence of the law and fulfill the law. Jesus emphasized that the form of worship offered in the temple is not important, but the importance of faith in mercy and love, which is the essence of the law. And Jesus showed that mercy and love directly. Jesus was most displeased with Judaism, which operates as a temple system, doing religious business. It can only be frustrating because the temple that should have saved people is killing people. A person who owes the form of God is restored and a person is used and used as a means in the temple that needs to be made anew. People made in the image of God became tools to satisfy the desires of the high priests.

In modern times, Christianity seems to have become a species of capitalism. The most important thing in capitalism is profit and efficiency. In capitalism, being productive and being efficient is considered good. So capitalism uses numbers to make it easy to recognize. We often judge good and evil through numbers. A big church with a lot of members is a good church, and a church with a small number of members is a bad church. It's good when a lot of offerings are collected, and bad when little is collected. Can the essence of religion be contained in numbers?

German philosopher Byung-Chul Han criticizes digital society in his book “Transparent Society”. He talks about the importance of narrative, that is, the story, which is easy to miss in the digital society. He said that the word digital comes from the Latin word “digitus” which means finger. Fingers are for counting numbers. So digital society is based on numbers. Even the Facebook Timeline and Instagram Stories items are based on numbers. Someone’s humanity is judged by the number of likes and hearts. Friends are counted in numbers, and attachment and liking are expressed through numbers. Today everything is countable. This is because performance and efficiency can only be expressed in numbers. In numbers, the story of our lives loses its meaning. In numbers, human beings are used and objectified.

Jesus never looked at people as tools. It was His purpose to restore the image of God in man. The high priests came to the temple and treated John as a heretic when people flocked to him because they had to give them a profit. When the people who had to raise their income through the temple sacrifices flocked to Jesus, they tried to get rid of

Jesus for blasphemy. The way John prepared for the coming of the Lord was a desperate struggle to return to the essence. The beginning of our gospel should be like this. It doesn't matter what commandments you kept or didn't keep. It must be a life of pursuing and practicing the essence hidden in the commandments. Now we have to create our own story of mercy and love. We have to create a beautiful story unique to our church. The church is not a place filled with offerings or people.The church is a place filled with beautiful gospel stories. We must gather at church with the beautiful stories we have created in our lives for a week. And we must gather here to hear the story of the gospel of the Lord and return to our place of life with a new imagination.

I hope that the essence of our faith will be restored through worship every Sunday. I hope the essence of valuing and loving a person is restored, not efficiency expressed through numbers. I hope it is a faith that knows that the lives of others are as precious as I am. We must move forward with a faith that makes love of God and love of neighbors into stories by practicing them with our lives, not faith that we only know in our heads. John the Baptist and Jesus are still inviting us to this holy struggle.

 

Posted by sper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