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은 돌아오는 때를 안다.
어느 샌가 봄이 우리 가운데 성큼 다가왔습니다. 자연의 순환을 볼 때마다 놀랍지 않나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정말 춥고 과연 봄은 오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봄은 이미 우리 가운데 돌아왔습니다. 봄이 오면 이제 강남에 갔던 제비도 다시 돌아 오겠지요. 자연이 돌고 도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 모든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에게만은 그런 돌아갈 마음을 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그런 회귀본능을 주셨는데도 인간이 교만하여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요? 본문 예레미야 8장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주제와 테마는 돌아옴입니다. 히브리 말로 슈브라는 말인데요. 돌이키고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5절을 보세요. 예루살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을 떠나있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7절에 보면 공중의 학, 산비둘기, 제비, 두루미는 그들이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미물보다 못하다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는 게 쉽지 않죠. 한국의 청년이 제일 가고 싶어 하던 교회, 삼일교회에서 시무했던 전병욱 목사는 교회의 여성도들에게 수차례 성추행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죠. 그리고 교회에서 제시한 1년의 치리 기간을 무시한 체 가까운 홍대 옆에 새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의 현 주소인 것이지요. 자신의 죄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꼬집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모습과 똑같죠. 죄를 지었지만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 지 모릅니다. 죄를 지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인정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인정하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제 아내는 항상 잔소리를 해줍니다. 잔소리가 무척 싫죠. 짜증도 냅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는 말은요 “내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라며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돌아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알아야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허랑방탕했던 탕자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인식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내 모습이 어떤지 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주님 내 모습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그리고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2. 치료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의 상태를 병들었다라고 진단하십니다. 11절에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백성의 상태가 상처가 가득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21절에도 보십시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
하나님은 백성들을 딸이라고 칭하십니다. 딸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딸은 아들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고 귀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겠죠. 반면에 딸은 연약하여 부모의 관심이 더 많이 가는 존재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도 한 때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연약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하나님은 딸이라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스런 딸이 상처가 가득하여 너무나 마음이 슬프다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딸의 피부가 썩어 문드러져 고름과 진물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 딸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처투성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아버지의 마음 또한 상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상한 백성들의 환부를 치료할 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문 22절은 그 치료약이 있는데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있고 치료하지 않으려고한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기르앗에 있는 향료로 그 병을 치료할 수 있고, 그곳에는 의사도 있어서 능히 이 병을 치료할 수 있건만 백성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만들고 선지자 예레미야를 슬프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병든 마음, 죄악 된 마음을 치료할 치료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치료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 치료약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의사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 몇 가지를 정리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첫째, 상한 마음의 치료는 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 나에게 이런 연약함이 있구나. 내가 이런 죄를 저질렀구나.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었구나. 깨닫는 순간부터 치유는 시작됩니다.
둘째, 깨달았다면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깨닫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은 치유와 회개의 완성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처럼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품으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셋째,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한 마음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썩어 문드러진 양심을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사이시며 치료자이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만 이런 하나님의 치료의 혜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마음의 병과, 육신의 질병을 깨끗이 치유받고 돌아가십시오. 우리의 마음과 우리 육신의 병을 고칠 향유와 의사가 있습니다.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돌아오십시오. 우리의 참된 치료자 하나님의 품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