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 날다!!>
몇 주전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에 한 권사님께서
"목사님 외모나 풍기는 이미지에서 세례요한을 연상시켜요"라고 하셨다.
기분나쁘지 않았다.
실은 내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을 때 받은 말씀도
이사야 40장의 "광야에 길을 내는 자, 하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였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주제 말씀 아니던가?
선천적(?)으로 나는 광야와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광야는 늘 나에게 있어 매력적인 장소였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도, '광야학교에 입학을 축하한다'고 포켓성경에 축하 메시지를
써주던 선배의 글을 두고 두고 감사히 묵상했었다.
세례요한은 사역자로의 모습 중 자신은 낮추고 예수님은 커지기 바랐던 부분은
늘 사역자인 나에게 도전이 되는 부분이다.
세례요한과 어떻게 한 번 엮어 보려고 하는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해 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오늘 커다란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사단 신교대 교회에서 있었던 진중세례식이었다.
군대에서 세례를 주는 것에 탐탁지 않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막상 내가 직접 군인들에게 세례를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부목사로서 세례를 직접 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목사 안수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이런 세례를 주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나 세례 요한으로 부르심이 맞나보다 ㅎㅎ
언제나 첫 경험이란 설렌 것이다.
물을 적셔 고슴도치 같은 군인들 머리에 손을 얹고 세례를 선포하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40명 정도 세례를 준 것 같다.
장갑을 낀 손은 부를대로 불러 있었다.
마치고 교회문을 나서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세례를 베푼 사람에게 이 음성이 들리는 것이 으아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 첫 경험, 잊지 않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버지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지~
오늘 저녁엔 오른 손을 씨지 않고 자야겠다~
오늘 세례 요한 드디어 첫 날개짓 하는 날이었다.
이사야 40장의 "광야에 길을 내는 자, 하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였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주제 말씀 아니던가?
선천적(?)으로 나는 광야와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광야는 늘 나에게 있어 매력적인 장소였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도, '광야학교에 입학을 축하한다'고 포켓성경에 축하 메시지를
써주던 선배의 글을 두고 두고 감사히 묵상했었다.
세례요한은 사역자로의 모습 중 자신은 낮추고 예수님은 커지기 바랐던 부분은
늘 사역자인 나에게 도전이 되는 부분이다.
세례요한과 어떻게 한 번 엮어 보려고 하는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해 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오늘 커다란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20사단 신교대 교회에서 있었던 진중세례식이었다.
군대에서 세례를 주는 것에 탐탁지 않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막상 내가 직접 군인들에게 세례를 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부목사로서 세례를 직접 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목사 안수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이런 세례를 주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나 세례 요한으로 부르심이 맞나보다 ㅎㅎ
언제나 첫 경험이란 설렌 것이다.
물을 적셔 고슴도치 같은 군인들 머리에 손을 얹고 세례를 선포하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40명 정도 세례를 준 것 같다.
장갑을 낀 손은 부를대로 불러 있었다.
마치고 교회문을 나서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세례를 베푼 사람에게 이 음성이 들리는 것이 으아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 첫 경험, 잊지 않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아버지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지~
오늘 저녁엔 오른 손을 씨지 않고 자야겠다~
오늘 세례 요한 드디어 첫 날개짓 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