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풀리니 여러 모로 좋습니다. 무엇보다 겨우내 추위 때문에 꺼려졌던 산보를 하니 좋습니다. 교회 주변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산 속으로 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봄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걷노라면 새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다양한 종류의 새소리인데 모두들 봄이 와서 신났다고 재잘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걸으면 해결된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로제 폴 드루아라는 사람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걷기를 통한 사색의 힘에 있었다.”라고 말하며 걷기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렇다는 생각을 걸으면서 많이 합니다. 걸을 때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걷기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걷기와 기도의 상관 관계는 매우 깊어 보입니다. 제가 가장 선호하는 기도 방법, 그러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은 걸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 속이나 숲속 아니면 잔디밭을 걸을 때 하나님과 깊이 접속하게 됩니다. 얼마 전 3월 17일이 자신의 성일이었던 아일랜드의 성자, 성 페트릭(St. Patrick)은 숲을 무척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기적으로 숲을 방문하여 며칠이고 그 안에 머물다 오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성 페트릭을 상징하는 색깔이 초록색이 되었다고 하죠. 성 페트릭을 존경하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새깔도 초록색이 되었구요. 숲 속을 걸으며 회복하고 충만해지는 것은 단지 저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걷기와 영성형성’에 관한 것입니다. 걷는 것이 우리 영성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주는 것인지 해 본 사람은 이해할 겁니다.
오늘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걷고 있다는 것은 내가 주저앉지 않다는 것이겠구나.” 주저앉거나 좌절한 사람은 걸을 수 없습니다. 서 있다는 것, 걷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고 희망 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LA에 있는 Getty Center라는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Giacometti의 “Standing Woman”이라는 조소 작품을 감상한 적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Walking Man”을 만들기 몇 년전 그는 서 있는 여인을 먼저 만듭니다. 중국에서 추방당한 지 몇 달이 안 되었고 어떨결에 미국까지 흘러온 상태에 있던 제게 서 있는 여인의 상은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서 있어보이지만 그는 주저 앉아 있진 않았습니다. 걸을 준비를 하며 재기를 노린거겠죠. 직립, 그것은 사명을 달려가기전 숨고르기 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활(復活)이라는 헤라어’아나스타시스’와 라틴어’resurrection’ 모두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은 다른 게 아니라 주저 앉았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이 봄에 주님의 부활을 맞이한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다시 일어나 걸으시겠어요? 걸으면 해결될 겁니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함께 걸으시는 주님 계시니 다시 일어나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