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사회성이 없다고 평가 받는 한 노인이 있다. 그는 사브만 타왔고 볼보나 독일차를 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는 흑백으로 이뤄진 남자다. 그의 아내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는 숫자를 좋아했고 수학만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화학공장에서 일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그가 여덟 살 즘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나마 남아 있는 아버지의 단어들을 가져가 버렸는지 말이 더욱 없어졌다. 그가 고등학생일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 흑백일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는 무뚝뚝했다. 어느날 기차를 기다리며 만난 그녀는 그의 삶에 큰 위로였다. 이 남자는 40년 동안 그의 삶을 채색했던 아내가 죽자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짓궂은 이웃들이 끼어들며 그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 간다. 전혀 계획이 없이 이웃들과 엮이면서 그의 삶은 또 다른 색깔로 채워진다. 무뚝뚝하고 인간미가 전혀 없어 보이는 따뜻한 그 남자는 오베라는 남자이다.
지난 주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스웨덴 작가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큰 감동과 눈물을 준 책은 참 오랜만입니다. 먼저 항상 외국 소설을 읽을 때 저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들도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입니다. 미네소타의 이주민 중에 스웨덴 같은 북유럽인들이 많다보니 더 흥미를 갖고 봤는데 한국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웃에 사는 코카시안들도 내가 갖는 기쁨과 절망, 환희, 슬픔 등의 감정 가운데 살아가고 있겠구나라는 이해가 훨씬 깊어진 듯합니다. 두번째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웃’과 ‘로컬’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고 그 이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환희와 기쁨을 선물해 줄 수 있는지 우리는 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 애써 ‘이웃’을 우리 사전에서 지우려하고 ‘골칫덩어리’로 고쳐 읽으려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곁가지일 수 있지만 저와 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두리안’입니다. 두리안은 겉에 딱딱한 갑옷이 쌓여 있는 과일입니다. 갑옷에다 가시까지 겉면을 싸고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겉모양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겉면을 벗기면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하는 사차원의 향기는 이 과일을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육을 맛 본 사람은 그 과일의 진가를 압니다. 오베라는 남자가 딱 두리안같은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이웃들에게 딱딱하고 가시 돋은 말을 하는 그였지만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웃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와 어울리기를 기뻐합니다. 우리네 삶에도 이런 이웃 사랑의 기쁨이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두리안 처럼 부담스럽고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이웃이지만, 그들은 무미건조한 우리 삶에 색과 맛을 줄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에도 또 다른 오베가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