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작성자 : 김경헌 목사, 2022년 2월 19일
본문 : 출애굽기 2장 15-22절 (새번역)
15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17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18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느냐?"
19그들이 대답하였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목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고, 우리를 도와서 물까지 길어, 양 떼에게 먹였습니다."
20아버지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를 불러다가 음식을 대접해라."
21c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c 모세의 장인은 민 10:29 및 삿 1:16과 4:11에서는 호밥이고, 출 2:21에서는 르우엘이고, 출 18장에서는 이드로이다)
22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d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d 히, '게르')
1. 들어가기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빕니다.
2022년이 시작 된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갑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푸르른 봄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봄이 되면 이런 영어 한 소절이 자연스레 튀어 나옵니다.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 그렇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리고 추운 날들이 있었지만, 이제 곧 따뜻한 희망의 봄볕이 비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엉망진창이 되고 망가진 이 세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가 죄에 빠진 이후 줄기차게 실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으로 하나님의 복과 샬롬을 누리게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 그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천천히 그렇지만 주도면밀하게 만들어 오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주 연약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봄볕에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돋아나는 연하디 연한 푸른 새싹처럼 아주 연약한 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를 써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죠. 어린 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2장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여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아주 멋지게 이뤄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남성들 위주의 사회 가운데 많은 차별과 아픔을 견뎌 왔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일꾼으로 쓰임 받아 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역설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 라는 책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은 차별의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 책에 백인남성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미국 사회 내에서의 특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사회 가운데 많은 특권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차별을 받는 유색인종이나 여성들의 자리에 서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누리고 살아갑니다. 현금의 사회에서도 이런데 기원전을 살아갔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와 처우란 상상 이상으로 낮고 박했을 겁니다. 출애굽기 서막과도 같은 1-2장에 보면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의 활약상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2. 십브라와 부아
모세 이야기로 들어가 보실까요? 모세는 출생에서부터 두 할머니의 보호 가운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 준 할머니는 십브라와 부아라는 할머니였습니다. 이 여성들의 용기와 깡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신 적있습니까???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히브리인들의 번성함에 큰 위기를 느낀 파라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죠.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여자들의 출산을 돕던 산파 둘이 있었으니 십브라아 부아라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당시 신이면서 사람이었던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 놓으신 자비와 정의를 산파들은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출애굽의 계획은 일단 성공적으로 한 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
3. 요게벳과 미리암
하나님은 어떻게든 모세라는 인물을 잘 성장시켜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대면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라오라는 인물의 삶을 누구보다 이해해야 할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그분의 구원 플랜을 진행시킵니다. 바로 모세라는 어린이를 적의 심장부에 심어 넣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위해 쓰임 받았던 여인들이 바로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그의 어머니 요게벳이었습니다. 요게벳은 3개월간 심혈을 다해가며 자기에게 맡긴 핏덩이를 잘 양육했습니다. 더 이상 그 품에 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함으로 파피루스 상자에 아이를 실어 강으로 떠내 보냅니다. 요게벳의 명령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동생이 실린 갈대 상자를 따라갑니다. 미리암의 마음 속에 있는 측은지심이 발동된 것으로 보입니다. 젖살이 오를대로 올라 너무나 귀여운 3개월 된 남동생을 그렇게 그냥 보낼 수 없어 강가를 서성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미리암이 상상이 되시나요?
4. 파라오의 딸
자 모세가 3개월이 될 때까지 살아남게 되는데 성경은 여성들의 활약상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파라오의 딸의 등장 때문입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유행가도 있는데 파라오의 딸이 갑자기 모세가 떠내려 가고 있는 나일강으로 멱감으러 나옵니다. 아~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외면하신다고 생각 되어지시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클라이막스를 기다리셨다가 구원의 손길을 우리 삶에 뻗치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이처럼 극적이게 우리 삶에 다가오기도 하지만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쨌든 이 절박한 타이밍에 파라오의 딸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역전시켜 버립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투 아웃 3점 뒤진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2-3 풀카운트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이 터진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 그러니까 이집트 공주가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했는지 여러분은 상상해 보셔야 합니다. 이집트 공주는 파피루스 상자에 담긴 아기를 보고 이 아기가 히브리 남자 아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 아기는 이집트 남자 아이와 달리 할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모르는 이집트 여자는 없었으니까요. 그 순간에 극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모세가 “응애 응애” 심하게 울고 있었을 겁니다. 아기가 울고 있는데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을 정상적인 여인이 있을까요? 여자들 안에는 남자들보다 훨씬 풍성한 감정적인 유전자가 내재돼 있습니다. 이 아이가 히브리 남자아이지만 “이 아이는 내가 길어내야 해.”라는 결연한 의지가 공주 안에서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리암의 용기가 필요했는데 미리암은 너무나 훌륭하게 모세를 어머니 품으로 다시 되돌려 놓게 하지요. 앳된 소녀의 용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젖을 뗄 때까지 합법적으로 어머니 품에서 다시 양육 될 수 있었죠. 문제는 젖을 뗀 이후부터입니다. 왜냐면 이제 모세라는 어린 히브리 남자아이가 파라오 앞에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다시 한 번 파라오의 딸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파라오는 극악무도한 캐릭터였습니다. 자비란 일도 없는 인물이었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잔인한 폭군이었습니다.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죽여버리라고 명령한 인정사정 없는 그런 인물이었는데 그 파라오를 설득시킨 건 바로 그의 딸이었습니다. 얘나 지금이나 딸의 애교를 당해 낼 아빠는 없나 봅니다. 저는 아들만 셋 있어서 딸의 애교가 무엇인지 평생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라오의 딸의 노력으로 모세는 적의 심장인 파라오의 궁전에서 40세까지 합법적으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라는 한 리더를 만들어내기 위해 헌신한 여인들의 믿음과 용기를 보십시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장에는 한 명의 여인이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십보라입니다.
5. 십보라
모세는 동족을 살해한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들통이 나서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망명을 갔죠.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실패감과 절망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겁니다. 거의 재기 불능의 나락까지 떨어져 있는 모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물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7명의 미디안 여인이 양떼에게 물을 주기 위해 우물가로 왔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 그 여인들을 훼방하며 양떼에게 물을 못 먹이게 하며 쫓아내버리죠. 이것을 지켜보던 모세가 그 여인들을 도와 그 목자들을 쫓아버리고 여인들의 양무리들에게 물 먹이는 것을 도와줍니다.
여인들의 아버지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라는 사람이었고 그는 자기 딸들을 도와준 이집트 남자를 자기 사위로 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던 딸 십보라를 그에게 주었죠. 모세는 새롭게 정착하게 된 미디안 땅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음에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아들을 낳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구나.”라는 뜻으로 게르솜이라는 이름을 지었을리 만무하죠? 아들을 낳고 적잖이 위로를 받았던 것이죠. 그만큼 십보라는 모세에게 큰 위로가 된 여인이었습니다.
6. 여성성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
성경의 출애굽기 네러티브는 너무나 중요한 서사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출애굽기의 서사는 반복해서 기억되고 기념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출애굽기는 구원의 모티브가 되어 성경 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히브리인 들의 절기 속에서도 매년 출애굽의 모티브들은 반복되어 기념되곤 하였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삼대 절기가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기념되는 절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출애굽의 역사인데 그 중요한 출애굽의 구원계획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연약한 여인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됩니다.
다양한 나잇대와 다양한 신분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여인들이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에 70프로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입니다.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교회는 유지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역사는 남자들이 만들어가지만 그 남자들은 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뤄가는 주인공들이신 여성분들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행하시는 가사들이 전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그러한 사소한 가사 노동이 없다면 가정이 유지되겠습니까? 여러분의 헌신이 없이 어떻게 아이들이 그렇게 잘 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이름 없고 값없이 행했던 봉사로 교회 또한 이만큼 성장하였고 풍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키워낸 아이 가운데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이 일꾼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 만큼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일꾼을 길러 내시어 그분의 나라의 구원계획을 진행해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 일에 여성분들이 매우 요긴하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핵인싸입니다. 핵인싸는 매우 중요한 중심 인물이라는 요새 젊은이들의 용어입니다.
7. 라스콜랴노프를 끌어 안아 버리는 쏘냐
여러분 구원은 모든 것을 품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공감하고 측은히 여기는 여성성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기 전반부 1-2장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여성들이 이끌어 가는 것을 통해 애키우고 아이를 돌보고 사랑해 주는 여성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이 일류를 구원할만큼 중요한 일임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지요.
도스토에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을 보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가운데 느껴지는 빈부격차에 고뇌하는 청년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의 노파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돈에 노예가 된 노파 정도는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에 살해하였는데 현장에 노파의 조카가 있었고 함께 그 조카까지 얼떨결에 살해하게 되죠. 라스콜니코프는 이후 심한 죄책감과 불안에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 라스콜니코프의 해결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했던 죄책감의 난제를 소냐라는 매춘부가 풀어주게 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제어능력이 없는 기폭제를 설치해놓고 불안에 떨고 있는 연약한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소냐’라는 생계형 매춘부는 ‘라스콜니코프‘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기폭제를 용감히 끌어안아 버립니다. 놀랍게도 남자 주인공은 소냐의 품에서 다시 어린아이처럼 잠잠해지죠.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던 라스콜니코프도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나서 그를 향하여 날아올 정죄의 화살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냐는 그 모든 발작을 스펀지처럼 다 빨아드려 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의 발작은 잠잠해졌을 뿐 아니라 안식까지 누리게 되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구원은 여성성의 용서와 용납에서 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주인공의 발작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한 여성에 의해 그것이 용납되어짐으로 구원은 외부로부터 타자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인공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이 시대에 필요한 힘은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의 남성적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성은 이 세상을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망치고 헝클어 놓았습니다.
이 남성적 엔트로피에 의해 헝클어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성이 필요합니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말랑한 관용 속에 구원의 진주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엄한 아버지의 이미지라면 사랑의 하나님은 여성적인 이미지의 어머니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런 어머니의 이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매님 여러분을 특별히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말 없는 섬김과 헌신을 우리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여러분들 처럼 부드럽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 오고 계시는 섬김과 사랑을 포기하지 마시고 줄기차게 이어 가십시오. 여러분의 그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힘차게 전진해 갈 것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