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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1.05 이민진 장편 소설, 파친코 1, 파친코 2를 읽고... 2

나는 2015년부터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중국, 미국 서부, 이제는 미국 중부에 거주하며 고향을 떠난 이민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경계선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중심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경계선에 서 있고 marginalized된 이들의 고충을 절대 모른다.나는 자이니치 조센진(在日朝鮮人)으로서 작가였던 서경식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글에는 경계선에 선 자로서 갖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이 있었고  우울하지만 애수에 찬 삶을 향한 동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마지널라이즈드 되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예술을 해석했고 작품들을 해석했다. 그의 글을 통해 나는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갖게 되었고 경계선에 선 자로서의 시선을 장착할 수 있었다. 

이민진의  파친코는 이민자, 나그네, 순례자, 디아스포라와 같은 비슷한 단어들에 많은 노출을 한 내 삶을 끌어 당기기에 매력있는 소설이 분명했다. 왜냐면 일본 사회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한국 사회에서 조차 일본인으로 취급되는 자이니치 조센진들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경계선에 선 자들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 내고 독자들에게 전달해내는 지 그 방법과 분위기가 사뭇 궁금했다. 

소설을 읽기 전, 애플티비를 통해 드라마 "파친코"를 본 것은 실수였다. 소설부터 보았어야 했다. 왜냐면 드라마는 이민진 작가의 의도를 많이 왜곡했고 많은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지 않고 소설만 읽었어도 좋았을 뻔 했다. 드라마에는 없고 소설에는 있는 이야기 중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노아"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드라마에는 노아의 어린 시절이 나온 후 그의 삶이 통째로 삭제 되었다. 파친코 소설에 있어서 노아의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존재감이 없는 드라마는 주제면에서 많은 부분을 왜곡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작가는 노아를 통해 자이니치 조센진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을 건드리고 싶었다. 노아는 선자가 한수의 씨를 받아 생긴 아들이지만, 30년 넘게 자신의 아버지가 이삭으로 알고 자라온 인텔리 청년이다. 인텔리면 뭐하나? 그는 자신의 신분적인 배경 때문에 일본 사회의 주류에 낄 수 없는 한계를 어린 시절부터 직시한다. 그의 그러한 민족적인 정체성을 심화시키고 갈등을 증폭시킨 것은 그의 삶에 조용히 드리운 한수의 그림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마저 부정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나가노라는 제 3의 장소를 찾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뿌리로부터 뽑혀 살 수 없는 식물과도 같았다. 16년을 숨어 살아온 그에게 어머니 선자가 나타나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신의 생을 통째로 도려 내버린다. 이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란 것, 인생의 으미라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결국 정체성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선자가 이삭의 묘지에 갔을 때 묘지 관리인으로부터 노아가 나가노에 있을 당시에도 이삭의 묘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다. 결국 노아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본을 향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연약한 존재였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결국 정체성, 뿌리, 근본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에 이 정체성이란 것은 호흡과도 같은 소중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60-80년대에 이민와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주류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어만 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것은 너무나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국에서 자녀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켜 본 이들은 이 고충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갔을 때 미국 주류 사회는 아무리 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도 그들을 끼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인과 미국인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나그네들에게 정체성이란 호흡과 같다는 것을 새삼스레 소설을 통해 깨닫는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이민자들의 삶의 현실을 조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파친코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업종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야쿠자이거나 야쿠자와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파친코였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인들에게 그런 시선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이면 어떤가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왜냐면 일본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돈으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돈은 신적 유사성을 가진 물건이다. 돈이 있으면 신이 가지고 있는 전능성을 발휘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돈을 소유하고 거부가 된다면 그들은 그 사회 속으로 편입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일본사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민감한 사회였다. 백이삭 목사의 아들 모자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정직하게(?) 파친코 사업을 해가며 부를 축적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유일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자기와는 다른 고상한 직업을 갖고 일본의 상류사회로 진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미국 유학까지 마친 아들 솔로몬도 결국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지경에까지 이른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사회의 높은 벽을 통감한 것이다. 모자수가 그렇게 존경하고 따랐던 그의 형 노아도 와세다 대학까지 나온 수제였지만 그 또한  파친코 사업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자 했고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구원이 되어주었다. 작가는 파친코라는 직업을 통해 조선인들이 꿈꿔 왔던 야망과 열망 그리고 욕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파친코를 통해 일본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의 한인 이세 삼세들도 이와 비슷한 한계를 경험한다고 익히 들어왔다. 유색인종으로서 이 사회 상류까지 진출하는 데 느끼는 한계가 많이 있다고 들었다. 이민진 작가는 본인 스스로가 7살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와서 살아온 경계인으로서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는 파친코를 통해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을 조명했지만 그 깊은 동기에서는 미국내에서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빗대어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파친코를 단숨에 읽으며 가장  충격이 됐던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노아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노아가 그의 아버지 이삭의 묘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부분을 읽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 지금도 방황하고 있을 이민 이세 이민 삼세들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아들들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배타적인 일본사회 그리고 일본인들이 더 싫어지는 것은 나의 잘못만은 아니겠지? 일본사회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열린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나의 헛된 기대이자 바람일까? 소설 파친코는 경계선에 서 있는 순례자로서의 나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다. 

Posted by speramus